2006년10월13일 제6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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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포기할 수 있을까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언어의 압축력을 만들어내는 ‘지혜의 건전지’… 언어는 ‘섞임’의 토양서 자라는 것, 순 우리말 고집은 ‘대인기피증’ 같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몇 년 전,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육 관련의 한 학회에서 한자를 “서양인 등 한자문화권 외부인들의 한국어 학습의 장벽 중 하나”로 꼽은 한 국내 학자의 발표를 들은 일이 있었다. 이 의견이 국내 학계에서 거의 통설인 듯한데, 내 경험으로 봐서는 그렇게만 보기 힘들다. 이것이 외국어 학습의 변증법이라 할까?


△ 한글날을 맞아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외국인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이들이 글쓰기에 한창이다.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한자는 최대의 걸림돌이자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사진/ 연합)

최악의 걸림돌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좋은 학습 방법을 쓰면 바로 최고의 디딤돌이 된다는 법. 한국어를 전공하지 않는 학습자들에게 한자 학습이 추가 부담이 될지도 모르지만, 한자를 배울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진 전공자 같으면, 초기의 진입장벽, 즉 어려운 습자 과정이라는 산맥만 넘으면 그야말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표적수사’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많은 한자어들이 유럽 언어들에서 보기 드문 의미의 압축성을 과시한다. 예컨대 ‘일조권’(日照權)과 같은 의미의 표현을 영어로 지어보시라. 직역하자면 ‘햇빛을 누릴 권리’ 같은 설명식의 표현이 되는데, 한국어 능통자가 긴 설명 없이 이 의미를 석 자의 한자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 누가 봐도 부러운 일이 아닌가? 내 모국어인 러시아어 같으면, ‘일조권’을 의역하는 데 적어도 4~5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일조권’과 같은 의미의 표현은 유럽 언어들에서도 하나의 관용구가 될 수 있지만, ‘표적 수사’나 ‘친인척 비리’ 정도면 아예 따로 문장을 지어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표적 수사’의 러어 의역을 한국어로 다시 직역해보면 ‘수사의 주체 내지 감독자가 특별히 경계하거나 혐오하는 대상자가 표적이 되어 불공평하게 진행되는 수사’쯤 될 것인가? 어쨌든 학생 때 나는 이런 압축적 표현력을 가진 한겵?일의 언어가 끝없이 부럽기만 했다. 약 7년 전 국내의 한 전문 번역자 양성기관에 출강했을 때 ‘지식기반 사회’의 러어 번역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영어 같으면 준비된 번역어가 있지만, 이 간단한 여섯 글자의 한자 표현을 러어로 좀 어색하고 장황한 문어로 의역해야 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한자어들을 익히면서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정리할 수도 있구나!” 하고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학생으로서 나의 진정한 사랑은 고사성어였다. 나에게 넉 자짜리의 고사성어는 거의 한 권의 책과 맞바꿀 수 있는 지혜의 무게를 지니는 것 같았다. 예컨대 지금도 동아시아 종교사 수업 때면 불교의 방편론을 설명하려고 늘 칠판에 쓰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을 들어보자. 이 간단한 표현 하나를 머리에 떠올려 계속 반추하고 명상을 해보면,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면서도 기회주의자가 되지 않는 처세법을 다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처세서를 사느라 돈 쓸 일도 없이. 나는 이 표현을 접하면 꼭 남의 말에 잘 응대해 이 고사의 유래가 된 제나라 재상 안평중(晏平仲)에게서 개인적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고마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일일삼성(一日三省), 하루에 세 번 자신을 재점검하는 것이 좋다는 가르침대로 하루에 몇 번씩 각종 고사성어를 떠올리면서 내가 이 부류에 해당되지 않는지 생각해본다. 눈이 높아봤자 재주가 따르지 않아 아무것도 제대로 못하는 안고수비(眼高手卑) 아닌가, 자신의 밭에 물을 대듯이 이미 내린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논증 과정을 편의적으로 하는 아전인수 (我田引水) 격이 아닌가? 러어에도 어떤 유럽 언어에도 없는 이 ‘지혜의 건전지’ 없이 내가 과연 살 수 있었을까 가끔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고사성어를 모르고 사는 많은 사람들처럼 그럭저럭 살아갔겠지만, ‘임기응변’의 의미를 한 번도 고심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왠지 아쉬움이 생기기도 한다.

한글 통해 한자·한문·일본어까지 익혀

하이퍼텍스트인 인터넷에서는 한 사이트의 가치가 다른 사이트와 링크가 얼마나 잘되는지에 따라 많이 좌우된다. 언어 공부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습 대상으로서 특정 언어의 가치는, 그 언어가 다른 언어의 연속 학습의 디딤돌이 어느 정도 돼줄 수 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돼 있다. 나에게 한글의 가치는 한글 공부 그 자체에도 있었지만, 한글을 통해 한자, 한문 그리고- ‘한자 코드’를 통해- 초급 일본어까지 익힐 수 있는 데에 있었다. 말하자면 한자 문화권 바깥에서 이 한자 문화권 안으로 틈입한 자인 나로서는 배우기 쉬운 과학적·체계적기호 체계로서의 한글이란 바로 난삽한 한문·일본식 국한문 혼용 표기 세계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 “한자는 ‘남의 글’일 뿐일까?” 지난 8월 충북 충주 탄금호에서 열린 호수축제 기간 동안 도내 대표 서예가 125명이 천자문 합작 휘호를 하고 있다.(사진/ 연합 박일 기자)

나는 지금도 중국의 고전 한시까지 습관적으로 한글로 표기해 한국식 발음으로 읊고, 현재 체류하고 있는 후쿠오카의 간판이나 식당 메뉴판들까지도 한국어 한자어 지식을 총동원해 어렵게 판독하다시피 한다. 나는 한국어 속의 한자어를 익혔기에 일본어를 따로 배울 일도 없이 “요야쿠가 무료데스”를 들으면 예약이 무료인 줄로 당장 눈치챌 수 있다. 과연 ‘토종 한국인’들도 한자를 ‘국어 속의 이질적인 요소’ ‘남의 글’로 배척하기만 해야 하는가? 대중적인 글에서 한자를 남용할 일은 없지만, 국내 인구보다 30배나 많은 이웃 나라들의 인구에게 통하는 ‘코드’가 이미 우리 언어 속에 내재돼 있다는 것을 굳이 나쁘게만 볼 일인가?

메이지 시대 초기의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처럼 한자를 아예 폐기처분해 ‘언문일치’의 완전을 기하자는 일본의 근대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나, 그들 후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한국의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언어 국수주의자들이 한자를 ‘남의 글’로 규정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경우 아마도 이미 고조선 시기에 이용됐을 법한 한자를 ‘남의 글’로 본다는 것은, 불교를 ‘외래 종교’라 규정해 1868~72년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를 강제 환속시켰던 메이지 시대 초기의 신도(神道) 국수주의자들의 사유 방법이나, 기독교를 “독일 민족에 이질적인 유대인들의 종교”로 생각했던 히틀러의 사고방식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면 이두도 아닌 순수 한문만 쓴데다 그 저술에서 ‘신라’라는 자신의 국가 명칭을 겨우 몇 번만 썼을 뿐 주로 ‘국적이 없는’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했던 원효를 ‘우리’ 지성사에서 빼버려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진정한 ‘남의 말’이라 하더라도, 그 사용을 굳이 그렇게까지 꺼릴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우리에게는 예컨대 일본어나 영어에서 온 차용어들이 제국주의 침략과 연상돼서 불쾌하게 생각될 수도 있고 ‘언어 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단어들에 과연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한 유명한 국수주의적 언어학자가 ‘커피’라는 ‘외국말’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다 하여 ‘미국 차’라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역시 ‘순 우리말’이 아닌- 표현을 써왔다고 하는데, ‘커피’에다 과연 ‘미국’이라는 꼬리표를 꼭 달아야 하는가? 커피 원두의 원산지로 알려진 곳은 에티오피아고, 그 원두가 잘 자라는 한 계곡의 이름이 나중에 아랍어 ‘Qah’wa ’(중독성이 있는 음료)의 유래가 됐다는 설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럽 언어의 ‘커피’와 같은 단어는, 터키어를 매개로 하여 그 아랍어 단어를 기반으로 한다. 그 정도의 계보를 가진 단어라면 ‘미제 침략의 언어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공유해도 좋을 세계사의 일부분이 아닌가? ‘남의 말’이 만약 모두 ‘침투’라면 바깥 세계에서도 ‘태권도’와 같은 한국어 차용어를 서둘러 그쪽의 ‘순 우리말’로 ‘순화’해야 하는가?

단어들에 꼭 명확한 국적이 있는가

음과 양의 합침이 우주 만물을 만들고 두 사람의 합침이 가족을 만들고 수많은 방언겙訛?영향들의 합침과 스며듦이 언어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사람이 외부인들과의 ‘소통’ 속에서 성장하듯 언어도 외부와의 ‘섞임’을 토양 삼아 자란다. 외부와의 접촉을 지나치게 꺼리는 사람에 대해 우리는 흔히 ‘대인기피증’이라고 진단한다. 솔직히 말하면, ‘순 우리말’을 고집하시는 분들을 보면 꼭 떠오르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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