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오랫동안 존중받아온 책이다. '冊'이 대나무를 꿴 것을 형상화한 글자라면, '典'은 안상 위에 얹혀있는 冊을 형상화한 것이다. 곧 존중받는 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전이란 책의 어원은 여기에 있다. 어원을 굳이 따지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 꽤나 오래된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오랫동안 존중받은 책이란 대체로 역사적사회적 합의의 산물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의가 현실에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상식으로 주어진, 혹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선정한 고전이란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어느 누군가가 선정한 것이다. 과연 그 누구는 누구인가. 이 물음을 다시 던질 필요가 있다. 즉 고전의 선정은 어떤 사람에 의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의도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고전을 읽는다 함은 고전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논어나 플라톤의 대화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충만해도, 그것이 현재의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전이 아니라 무용한 정보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은 고전이지만, 유태인은 구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며, 프로테스탄트는 신약까지 경전으로 인정한다. 중국의 사서삼경(四書三經)이 고전의 권위를 갖게 된 것은 송대에 신유학-성리학이 성립하고부터였다. 내가 보기에 사드의 소돔 120일이나 규방철학은 고전일 수 있다. 역겨운 성행위 묘사로 일관하고 있는 이 책이 고전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성적 욕망의 극한치를 드러내어 인간이 성을 억압했던 교회 권력의 성담론을 정면에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 이렇게 읽었다). 이처럼 고전은 종교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지역에 따라 고전이 달라질 수도 있다.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후로 고전은 국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일본의 고전은 한국의 고전이 될 수 없다. 일본의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결코 한국인의 고전이 될 수 없으며, 한국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일본의 고전이 될 수 없다. 김일성 저작집, 피바다는 북한에서는 고전이지만, 남한에서는 불온 문서다. 모택동 전집은 중국에서는 무수히 읽히고 인용되는 필수적 고전이지만, 대만에서는 공산비도의 헛소리일 뿐이다. 이처럼 고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원한 초월적인 고전을 기대하지만, 그런 고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간과 지역의 제한을 벗어날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보다 큰 책일 뿐이다.
고전은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성의 고전 목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고전을 말할 때마다 누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꼽는다. 이 두 책은 번역본이 여럿 있고, 또 아동용으로까지 가공되어 있다. 하지만 읽어보면 큰 감동이나 재미를 느낄 수 없다. 두 책은 전공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하지만, 일반 독자나 교양층에게는 심각한 울림을 주는 그런 책이 아니다. 이 책이 한국인의 고전으로 선정된 것은 민족주의 때문이다. 아니 고려시대 이전에는 고전으로 꼽을 만한 책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일 수도 있다. 한국의 고전은 이런 이유로 선정된 것이 허다하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져 있고, 또 초등학교 어린이들까지 알고 잇는 한국인의 대표적 고전 『춘향전』을 생각해보자. 『춘향전』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춘향이 변학도로 상징되는 지배 권력에 저항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말해 『춘향전』의 주제는 ‘열(烈)’이란 전근대적 윤리의 선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춘향전』은 조선이란 체제가 추구해왔던 윤리적 통치가 18, 9세기에 와서 완벽하게 작동하게 되었던 사정을 배경으로 한다. 특히 남성에 대한 복종의 윤리인 여성의 ‘열’은 여성이 실천해야하는 모든 윤리에 선행하게 되었다. 여성은 친정부모, 혹은 시부모에 대한 효보다,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 ‘열’을 먼저 실천하는 것이 옳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18,9세기에 와서 친정부모, 시부모, 그리고 자식을 두고 죽은 남편을 따라 죽는 행위는 여성의 윤리 실천으로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변학도에 대한 춘향의 저항은 민중 저항이거나 순수한 사랑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18,9세기라는 전 군대 사회의 상황 속에서 읽힌다면 ‘열행(烈行)’일 뿐이다.
조선 체제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은, 유가적 사회의 장구한 유지를 위해 당시 흔히 존재했던 악질적이고 부패한 지방 관장에 대한 민의 저항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춘향전의 저항은 실제로 중세적 윤리를 선양하는 것이었으니, 춘향전에 반중세적 메시지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점에서 춘향전에서 반중세적 주제를 읽어내고, 그것에 기반하여 춘향전의 기법과 인물 창조를 리얼리즘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남성에 대한 여성의 성적 종속을 선전하는 이 책이 과연 지금 시대의 고전일 수 있을 것인가?
심청전의 경우는, 효한 윤리의 실천을 위해 자식이 자신의 신체를 공양하는, 인신공양의 모티프를 따르고 있다. 솔직히 말해보다. 이 글을 읽는 당ㅅ니이 부모라면, 당신은 자식이 제 몸을 죽여 당신의 어떤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는가. 작품 속의 심봉사는 몰랐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심청의 죽음은 궁극적으로 심봉사에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청전을 읽는 독자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심청의 죽음은 독자를 향해 말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이 가르치려고 하는 바는 명백하지 않은가. 효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심청전의 메시지다.
이것은 심청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자식이 효의 실천을 위해 생명과 신체를 바친 사례는 삼강행실도와 같은 윤리서,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자식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심청전의 극단적 효행은 바로 이런 텍스트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윤리를 위한 생명의 희생은 인간의 근본적 욕망, 즉 생명 개체로서 살고자 하는 욕망을 거스르는 반자연적인 것이다. 심청전의 후반부에서 심청이 죽지 앟고 왕후가 되었다는 것은, 이 반자연적 성격을 희석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초등학교 때 심청전을 읽고 나서 나는 너무나 무서웠다. 나의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면 나 역시 죽어야하는 것인가? 그리고 효자에 대한 전설을 들을 적마다 나는 어머니가 편찮으실 경우 손가락을 잘라야 하나 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심청전은 나를 해방하고 나에게 어떤 즐거움을 준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고 억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요컨대 심청전은 윤리를 명령하는 언어였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심청전은 고전이 아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우리가 믿는 고전은 사실상 고전일 수 없는 것이 숱하게 많다.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고전일 수는 없는 것이다. 『춘향전』과 『심청전』이 고전이 된 것은 한글로 쓰인 소설이라는 점, 즉 자국어문학을 우위에 놓고 존숭하는 민족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가 아니라면, 그 책은 잊혀진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전에 대해 강박증을 갖는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고전, 남이 선정한 ‘고전 백선’(百選)을 의무감을 갖고 읽으려 한다. 읽지 않았다는 데 대해 이상한 열등감을 갖고 심지어는 죄책감까지 느낀다. 이것은 고전이 하나의 권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어떤 언론 기관이나 대학이 자신의 권위로 선정한 이른바 ‘고전백선’을 신용하지 않는다. 아니 우습게 생각한다. 즉 내가 고전 백선 따위를 신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 목록이 우리를 행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고전은 어려운 책이 아니다. 나는 『신약성서』의 「마태복음」을 처음 읽었을 때, 『논어』의 「학이」(學而)편을 처음 읽었을 때 너무나 알기 쉬운 책이라 깜짝 놀랐다. 정작 어려운 것은, 이들에 대한 고매한 학자들의 주석이었다. 정말 웃기는 이야기가 아닌가. 고전을 어렵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고전 읽기를 방해한다. 읽다가 어려우면 안 읽으면 그만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대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고전과 저자를 완벽한 존재로 상정하고, 거기에 나를 맞추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어떤 고전을 읽더라도 그 저작을 정합적으로 이해하고, 그 저작을 쓴 사람과 저작을 정합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고전이란 것도 모두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이 역시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다. 인간이 무슨 그리 대단한 존재인가.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것인가.
고전 역시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도구에 불고한 언어로 엮인 ‘책’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책을 쓴 사람의 책임이지 독자의 책임이 아니다. 고전을 잘 읽기 위해서는 고전이 완벽하고 어려운 책이라는 잘못된 상식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사유도 저작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정합적인 것이다. 따라서 부정합까지 고려하여 고전을 이해하고자 하면, 고전은 스스로 자기 한계를 갖는 책으로 다가온다.
고전이 어렵게 여겨지는 것은, 고전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 그 책을 둘러싼 컨텍스트의 몰이해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언어의 차이이거나, 시간과 문화의 상거(相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서로 다른 언어의 번역에서 생겨나거나(영어와 한국어, 한문과 한국어), 시간과 문화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독자의 수준과 선행학습은 부차적인 문제다.
고전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산물이다.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특정 부분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고전적 저작은 그 초월성의 확률이 다른 저작에 비해 높다는 의미일 뿐이다. 어떤 고전도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다. 논어와 예기가 아무리 고전이라 한들, 그것은 춘추시대와 한漢나라 사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남성 중심주의에 입각해서 쓰인 것이다. 이 책들이 아무리 고전이라 한들, 여성에 대한 차별, 편견을 전제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 발언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남성-지배층을 위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적 저작을 읽는다 해도 반드시 그 시대의 컨텍스트 속에서 먼저 읽을 필요가 잇다. 그래야 고전의의미가 보다 명료하게 파악되고, 그것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의도를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내가 채택하는 과거의 컨텍스트 역시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에 따라 입장에 따라 다르겟지만, 나는 현재 우리의 삶은 자본-테크놀로지-내셔녈리즘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테크놀로지-내셔널리즘은 한편으로는 해방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을 끝장낼 파괴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자본-테크놀로지-내셔널리즘에 중독되어 있다. 내셔널리즘에 의식화된 인간은,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기계로 존재한다. 홀로 사유할 수 없는, 만들어진, 소비하는 인간이 지금의 인간이다. 그 결과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진보, 소비의 확대, 자본의 증식, 국가 권력의 폭력적 집행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당연한 전제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생태주의와 아나키즘, 사유 재산의 부정, 경쟁 아닌 협동, 테크놀로지에 대한 거부, 농업사회로의 회귀, 무역 관계의 단절, 소통이 아닌 고립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저작들은 어떠한가. 그것은 이 시대의 고전이 될 수 있지 아니한가.
서두에서 언급했듯 고전은 상대적인 것이다. 고전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대성을 넘는 고전은 또 있기 마련이다. 기성화한 고전에 대해 끊임없는 회의의 눈초리를 보내며 이 시대에 필요한 고전을 스스로 선정하되, 고전에 주눅들지 않고 인간의 존립을 위한 지혜의 차원에서 찬찬히 읽어내는 독법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