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학원 안보내면 불안?
학원 시간표에 길들인 아이 스스로 공부하는 법 찾기 어려워
‘학원=만병통치약’생각 버리고 ‘자기주도 학습’ 단맛보게 처방을
한겨레 이미경 기자
» 초등학교 때 태권도·피아노로 시작되는 학원 수강은 검도·한자·영어로 점차 분야가 넓어지다가, 중학교 때 본격적인 과목 보충 학습으로 방향전환을 하고, 고교에 이르면 입시 준비와 내신, 논술까지 학원에서 ‘책임지는’ 양상으로 바뀐다. 부모나 아이가 학원 수강 효과를 따지기에 앞서 학원에 가는 행위 자체로 위안을 받는다면, 학원중독을 의심해 봐야 한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세상 모든 중독은 ‘불안’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불안하면 무엇인가에 쉽게 중독되고, 일단 중독된 뒤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몹시 불안하다. 술, 담배, 인터넷, 게임, 휴대전화…이런 것에 중독되면, 주변 사람들이 위험을 경고하고 심한 경우 중독자를 기피하기도 하니 스스로 자각증세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쉽게 빠져들면서도 스스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자각증세가 거의 없는 중독이 있다. 바로 ‘학원중독’이다. 성적이 떨어질까 불안해서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만, 아이가 일단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 절대로 끊을 수 없고 학원에 안 간다는 생각만 해도 불안과 초조가 엄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원중독의 후유증은? 다른 어떤 중독보다도 심각하게 나타난다는 것이 한국교육상담연구원 최원호 원장(한영신학대 겸임 교수)의 지적이다.

“상담을 하다보면 학원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다니는 우리 아이가, 왜 성적이 오르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중학생인 그 아이는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가 오후 4시쯤 잠깐 집에 돌아와 간식을 먹고, 다시 학원으로 뛰어가 빠르면 11시, 늦을 땐 새벽 두 시에 집에 돌아옵니다. 아이는 학교 숙제는 원래 안 하고, 학원 숙제를 하기에도 빠듯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잠도 모자랍니다. 다른 사람(선생님, 강사)의 말을 듣고 수동적으로 받아적는 시간으로 하루가 채워지고,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은 단 한 시간도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말은 남의 나라 얘기죠.”

아이의 부모는 초등학교 입학 시기 평균 서너개 학원을 다니게 했고, 그때 그때 부모가 꼭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채워진 ‘학원 시간표’에 맞춰 아이를 키웠다. 물론 아이가 가장 필요로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부모겠지만, 이처럼 아이의 하루를 부모가 설계하고 아이가 이를 수동적으로 따르도록 한다면 아이는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잃고 만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세운 작은 목표, 예를 들면 오늘은 꼭 과학 숙제를 하고 자겠다, 이를 세 번 닦겠다, 줄넘기를 잘 하는 사람이 되겠다…이런 약속을 스스로 하고, 또 지키면서 아이는 자아존중감이 생기고 성취감도 느낍니다. 그런데 하루 24시간 누군가 짜놓은 일정대로 움직이는 생활을 10년 이상 지속하니, 스스로 무언가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볼 틈이 없겠죠. 우리 애는 도통 하고 싶은게 없대요, 꿈이 없어요, 이런 얘기하는 부모들은 아이를 채근할 게 아니라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 있는 상황, 혼자 무언가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불안하다면, 부모는 스스로 학원중독이 아닌지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최 원장은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학원중독도 몇 단계를 거쳐 진행된다”고 말한다.

1단계:실험단계 처음에는 호기심에, 혹은 속는 셈 치고 단기 과정에 등록한다.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반신반의하는 상태다.

2단계:유희단계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아이가 왕따를 당하거나 사회성이 떨어질까 염려되어 또래 집단 구성원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학원을 선택한다. 남자는 태권도, 여자는 피아노로 시작하지만, 점차 미술, 검도, 한자 등 새로운 것을 한 두 가지씩 늘려간다. 이 같은 환경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 아이의 사회성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3단계:상황단계 어느 학원이 잘 가르친다는 말에 예민해지고, 정보교환이 더욱 활발해진다. 아이의 성적을 올리는데 학원이 효과가 없음을 막연히 알게되나 오히려 과목수를 늘리고, 학원에서 공부하면 학교보다 공부를 잘 할 거라고 믿어버린다.

4단계:남용단계 학교에 관계된 모든 것을 무조건 학원에서 해결하려고 한다. 보충학습 이외에 수행평가나 실기시험 등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5단계:강박단계 부모와 아이 모두, 학원에 안 가면 몹시 불안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모두 학원 안에서 이루어진다.

잘 가르치기만 한다면 거리와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학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다른 부모를 만나면 자식 교육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아이 뿐 아니라 다른 집 아이의 학원 등록에도 관심을 갖는다.

학원중독은 부모로부터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학원에 다니는 아이에게로 ‘전이’되어, 아이 역시 학원에 가지 않는 상황을 못견디고, 스스로 가만히 있는 시간, 자유롭게 무언가 할 수 있는 시간을 오히려 불편하게 여기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최 원장은 학원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무조건 아이를 믿어라. 학원을 중단하면 일시적으로 성적이 떨어질 수 있음을 감안해 시간을 갖고 기다려라 ▲부모가 아이에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차분하게 적어보라 ▲아이가 학원이나 과외에 대해 갖고 있는 솔직한 생각을 들어보라 ▲부모가 원하는 것, 아이가 원하는 것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아라 ▲서로 고쳐야할 부분과 지켜야할 약속을 정하고 문서로 작성하라, 고 권했다. 최 원장은 “아이가 하루에 공부할 수 있는 분량을 정해 규칙적으로 실천하도록 하고, 나머지 시간은 스스로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로 채워 본 뒤 이를 부모가 인정하고 지지하도록 했더니, 아이의 성적이 오르고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다”고 전했다.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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