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호 (2006.9.20)


茶山의 寓話詩, 그를 통해 배우는 삶의 자세

 

정 출 헌(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예나 지금이나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백성의 최대 관건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이다. 실학파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토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그런 이유일 터다. 다산 정약용도 그러했다. 잘 알려져 있듯, 다산은 여전제(閭田制)라는 매우 급진적인 방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여기에서 다산이 제시했던 방안의 실효성을 따지기란 어렵다. 다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실험해 본 공동농장을 연상시키는 제안을 읽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다산의 무한한 신뢰, 그리고 개혁을 향한 다산의 순수한 열정에 가슴 저려온다는 점은 고백해도 좋겠다. 하지만 현실에 뿌리박지 못한 이상주의적 열정이 깨뜨려지기 쉬운 유리잔처럼 위태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오늘날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현실주의자로 기억된다. 어떻게 그런 평가가 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젊은 이상주의자가 간직하고 있던 ‘뜨거운 열정’이 유배지에서 경험한 ‘팍팍한 현실’과 접속함으로써 그처럼 변화된 평가를 받게 만든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다산이 겪 어야 했던 기나긴 유배지에서의 체험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그 점 수없이 강조된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변화의 흔적들을 자잘한 시편(詩篇)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

유배 체험과 다산의 우화시 세계

다산은 동물을 소재로 한 우화시를 상당수 남기고 있다. 대부분 장기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를 간 뒤에 창작한 것들이다. 인간 이
외의 삶, 곧 하찮은 미물조차 허투로 보지 않게 된 생활 조건이 제공해 준 뜻밖의 선물이겠다. 그러나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동물을 의인화하여 말하려고 했던 것의 변모이다. 유배 가던 첫 해(1801년), 다산은 <해랑행(海狼行)>이란 시를 짓는다. 자그마한 솔피[小 ]와 큰 고래[巨慝]의 피 터지는 싸움을 소재로 삼은 시다. 솔피와 고래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목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지배계층의 권력 투쟁을 우의(寓意)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중앙 정계의 피비린내 나는 쟁투를 다루는 이런 작품은, 종종 변방으로 쫓겨나게 된 자신의 울울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일련의 시들로 자연스럽게 연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배 직후의 상황을 읊고 있는 <고시 27수>의 제6수도 그러하다. 다산은 그곳에서 연못에서 놀던 ‘물고기’[다산 자신]가 주제넘게 ‘바다’[중앙정계]로 나갔다가 이권을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 던 ‘악어·고래’와 같은 무리[노론세력]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상황을 우의적으로, 그러나 노골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유배지, 이상주의자를 현실주의자로 만들어준 산실

유배 생활이 지속되면서 우화시는 계속 지어졌지만, 다산이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변화한다. 유배생활 10년이 지난 즈음에 지은 <이노행(狸奴行)>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는
백성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는 쥐, 그를 잡으라고 보냈더니 그와 공모해 더 큰 행패를 부리는 고양이를 다루고 있다. 쥐는 백성을 수탈하는 아전, 고양이는 수령에 각각 비유될 법하다. 쥐를 도둑으로, 고양이를 도둑 잡는 하급 관리로 볼 수도 있지만 어느 것이든 유배 초기에 지은 우화시에서 즐겨 다루던 문제의식과 멀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다산은 더 이상 우화시를 통해 중앙 정치 무대에서 벌어지던 지배층의 암투라든가 그런 와중에 변방으로 귀양 오게 된 자신의 울울한 심경을 담고 있지 않는 것이다. 대신 자신이 체험한 19세기 향촌사회의 심각한 모순들, 특히나 아전 및 수령의 가혹한 수탈과 그로부터 고통 받던 백성의 신산한 삶이 날카롭게 그려지고 있다.

어찌 보면 중앙정계의 추잡한 권력투쟁을 다루든 향촌사회의 가혹한 가렴주구를 다루든 그것 모두 다산 자신이 몸담고 있던 사회현실에 대한 울분과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뜻하지 않게’ 체험하게 된 19세기 향촌사회의 현실이 다산으로 하여금 자기 개인의 울분(鬱憤)을 넘어서서 일반 백성이 겪는 고통을 끌어안는 공분(公憤)으로 확장되도록 만들고 있는 변화의 순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배생활은 한 젊은 이상주의자를 대지에 확고하게 발 딛고 있는 현실주의자로 거듭나게 만든 산실이었던 바, ‘땅’이야말로 지식인 자신에겐 또 다른 생명이었던 것이다.


글쓴이 / 정출헌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이야기로 읽는 삼국유사, 이야기로 읽는 삼국사기』(웅진싱크빅, 2005)
            『고전문학사의 라이벌』(한겨레출판, 2006)
            『심청전: 어두운 눈을 뜨니 온세상이 장관이라』(나라말, 2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