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으로 본 중국 역사

백영서


  자장면은 누구나 다 알다시피 화교, 곧 중국인 이민자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 낸 비빔 국수이다. 이 자장면을 그저 즐겨 먹는 데 그치지 말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그것이 우리에게 친숙하게 된 내력을 따져 보자. 그러면 자장면은 더 이상 단순한 음식에 머물지 않고, 우리에게 중국 역사를 보여 주는 하나의 창으로 변하게 된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과 우리나라가 교류하기 시작한 것은 저 멀리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중국인이 우리나라에 와 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를 찾아온 화교의 94%가 산동성 출신이다. 유교의 영향으로 조상이 묻힌 고향과 혈족에 남달리 강한 애착을 지닌 중국인이 고향을 등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산동 출신들의 이민이 1900년을 고비로 급격히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산동 지역의 중국인들이 그 무렵 생존의 위협을 느낄 정도의 위기에 빠져 있었던 탓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1900년 무렵 중국의 이 지역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을까? 1898년부터 산동에서는 서양인을 내쫓자는 민중 운동(의화단 운동)이 전개되었다가, 1901년 서구 열강에 의해 진압당하고 만 일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의 혼란과 좌절로 생존이 위기를 느낀 산동성 주민들이 이주해 온 곳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바로 우리나라이다.

  그렇다면 의화단 운동은 왜 일어났으며, 그것은 중국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해진다. 자장면에 대한 관심이 마침내 우리를 중국 근대사의 한복판으로 이끈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역사의 심층에 자리한 구조, 특히 주도적인 사회 세력들의 상호 작용이 빚어내는 역동적인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19세기 들어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중국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서구 열강의 종속에서 벗어나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길이 중국인 누구에게나 꼭 같지는 않았다. 중국을 움직여 온 황제권 ․ 관료 지배층 ․ 민중의 세 세력은 제각기 현실적인 이해 관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들이 선택한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당시 황제권을 쥐고 있던 청 왕조는 이제까지의 제국적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변화를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영국과 벌인 두 차례의 전쟁(제1, 2차 아편 전쟁)에서도 전쟁의 확산을 피하기 위해 타협적인 자세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전쟁에서 밀리기도 했지만, 전쟁을 오래 끌면 민중이 동요되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에, 더욱 그 종결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청 왕조로 상징되는 제국적 질서의 틀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던 관료 지배층에게는 청 왕조가 너무 허약해지는 것이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고위 관료층은 청 왕조를 움직여 스스로 부강해지기 위한 운동을 추진했다. 서구 열강을 모범으로 삼은 이른바 양무 운동이 그것인데, 이 자강(自强) 운동을 통해 중국은 어느 정도 근대적인 군비와 공업 시설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어 벌어진 청일 전쟁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자 젊은 하위 관료 지배층은 정치 ․ 사회 제도 자체의 개혁으로까지 자강 운동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개혁 운동, 곧 1898년의 무술(戊戌) 개혁 운동은 이를 반대하는 보수 세력과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에 밀려 100일 만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정치 변혁 과정에서 민중이 직접적으로 참여할 길은 없었다. 사실 서구 열강이 진출해왔다고 해서 민중들의 삶이 당장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구 열강과의 잇따른 전쟁은 만성적인 불안정을 가져왔을 뿐더러, 패전으로 인해 중국이 물어야 할 배상금은 결국 조세로 부과되어 민중의 부담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드디어 민중의 생활은 불안정해지고 궁핍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이겨내기 위해 민중이 택할 수 있는 길의 하나는 자기들끼리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숱한 민중 종교들이 발생했다. 그 가운데 상제회라는 종교의 교도들은 소규모 공동체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천국을 현실 속에 건설한다는 기치를 내걸며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바로 1853년에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이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지주이자 지방 유력자인 관료 지배층의 일부는 향용이라는 민간 의용군을 조직해 서구 열강의 지원 속에 이 난을 진압했다.

  태평청국 운동의 실패 이후 민중의 생활은 더 한층 악화되었다. 민중은 어째서 이렇게 생활이 악화되는지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단지 민중의 생활 세계에 느닷없이 찾아온 서양 선교사가 모든 변화의 원인으로 비쳤을 뿐이다. 그래서 중국의 이곳저곳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반기독교 운동이 번져 갔다.

  중국의 북부에 위치한 산동 지역은 서양인과의 접촉이 뒤늦은 곳이었다. 청일 전쟁 이후 독일군이 이 지역에 나타나 주민들과 마찰을 빚었다. 주민들은 불안했다. 때마침 기근이 잇따르자 주민들은 그 원인을 ‘서양 귀신’이 나타난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서양 귀신’에 대한 증오는 이 지역 주민의 호신술이었던 의화권(義和拳) 조직을 통해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이것이 1898년부터 1901년까지 계속된 의화단 운동이다. 그들은 선교사는 물론이고 서양적인 것이라면 남김없이 파괴하였다. 중국을 나눠 지배하려는 서양인들을 내쫓고 중국을 보전하자는 그들의 주장에 호응이 커지면서 사태는 중국 북부 전체는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청조는 의화단 운동 덕에 열강에 의한 분할 지배의 위기로부터 일반 벗어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구조적으로는 열강에 더 깊이 종속되어 버렸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서구 열강에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대등하고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중국인의 목표 실현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황제권 ․ 관료 지배층 ․ 민중이 제각기 그 나름의 대응 방식을 모색했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가까지는 오랜 시간이 요구되었다.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 뒤에도 군벌과 제국주의가 여전히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에 찬 중국 근대사의 줄거리이다. 중국 근대사의 과제를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고난을 겪었지만, 그 속에서 일상적인 삶조차 제대로 이어가기 힘들었던 대다수 민중의 고통은 남달리 극심했다. 그래서 삶의 뿌리를 뽑힌 민중의 일부는 도적 떼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낯선 땅에서나마 새로운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다. 이들이 바로 한국, 일본, 동남아, 멀리는 아메리카까지 진출한 화교들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 근대가 안고 있는 모순이 화교를 낳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그릇의 자장면이 있게 되기까지의 내력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중국 근대사의 흐름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자장면은 고난을 극복해 온 중국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의 일부요, 그 상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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