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의 원근법
오주석
‘몽유도원도’에는 우리 옛 그림의 원근법이 갖는 장점이 잘 드러나 있다. 작품을 보면, 첫째, 깎아지른 높은 산을 아래서 위로 치켜다 본 시각(고원법, 高遠法)이 있고, 둘째, 엇비슷한 높이에서 뒷산은 비껴 본 시각(심원법, 深遠法)이 있으며, 셋째, 높은 곳에서 아래쪽을 폭 넓게 조망한 시각(평원법, 平遠法)도 있다. 이를 통틀어 옛 그림의 삼원법(三遠法)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주위 경치에 감탄한 나머지 사진기 셔터를 열심히 눌러대곤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인화된 사진을 보면 꿈결처럼 아름다웠던 경치는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인물 뒤고 너무나 낯설고 지극히 평범한 풍경만 남아 있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산에서 맛보았던 황홀한 인상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사람의 눈은 최고의 성능을 가진 카메라이며, 인간의 두뇌 역시 엄청난 고성능 컴퓨터이다. 눈은 대상의 성격에 따라 순식간에 올려다보는가 하면 내려다보기도 하며, 광각 렌즈처럼 겹쳐진 봉우리 사이로 저 멀리 아른거리는 먼 산의 풍경까지 비껴 보기도 한다. 가까운 것은 가까운 대로, 먼 것은 먼 대로, 밝은 것은 밝은 대로, 어두운 것은 어두운 대로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적응하면서 다양한 대상의 갖가지 모습을 정확히 포착한다.
이렇게 살펴본 주위 경관의 모습은 또다시 대뇌 안에서 하나의 전체적 영상으로 합성되며, 내용 또한 지적으로 정돈된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은 같은 물체라도 다른 각도로 보게 되는데, 이로부터 대상의 거리를 측정한다. 그리고 대상의 거리가 판단됨에 따라서 실제 물체의 크기를 가늠하고, 또 보이는 일부 면의 형태를 미루어서 입체적인 전체 모양을 상상하며, 가까운 곳에 보이는 물체의 재질을 기억해서 먼 곳에 있는 다른 물체도 실상은 같은 것임을 알아낸다. 그 밖에 명암은 명암대로, 색깔은 색깔대로 다양한 시각 정보가 모두 순간적으로 종합되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고성능 카메라가 정착된 초고속 컴퓨터 이상의 존재다. 즉, 어떤 특정 장소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는 인간의 오감 전체를 통해서 느껴지고 기억 속에 저장된다. 등산 중에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탄성을 발했을 때에 받는 인상 속에는 비단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촉각, 후각 등 조형 외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들려오는 바람 소리, 차가운 물소리, 맑고 싱그러운 솔바람을 마셨을 때 코와 폐부에 느껴지는 상쾌함, 그리고 자욱한 물안개가 살갗에 닿는 촉촉한 느낌 등이 그것이다.
이렇듯 산이 주는 갖가지 느낌은 조형만으로는 충분히 환기되기가 어렵다. 게다가 인간은 문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가 느끼는 감수성의 내용은 다만 오감으로 포착되는 현재의 감각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무엇인가를 체험했을 때, 그것은 즉각 우리가 과거에 경험했던 다양한 문화적 체험과 결합하여 좀더 고차원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를테면 하나의 경물이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어떤 문학 작품이라든가 음악의 분위기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 결과 사람마다 서로 다른 나름대로의 독특한 심상(心象)을 이루게 되니, 똑같은 대상을 보고서도 사람마다 반응이 각양각색인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복잡하고 종합적이며 고차원적인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산수의 심상을 단일 초점을 가진 사진기라는 기계가 그대로 옮겨 오기 어렵다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산수의 참모습은 사실 사진기뿐만 아니라, 많은 서양화가들이 종종 고백하는 것처럼 서양의 풍경화로도 담아 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거기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양화의 일점투시도법(一點透視圖法)에 있다. 서양화의 이른바 과학적 원근법은 부동의 관찰자라는 단 하나의 시선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서양의 풍경화를 눈여겨보면, 설령 화폭에 인물이 그려지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화면의 밖에 반드시 한 사람의 관찰자가 있어서 이젤 앞에 못 박힌 듯이 서서 주위 풍경을 측량하듯이 바라보는 차갑고 단조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자연 풍경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앞에 인간이 있으며, 그 인간이 바로 모든 풍경의 기준점이 되어 있다. 그러므로 풍경화 속의 부분 부분은 한결같이 작품 밖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한 개인, 즉 객관적인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 투시법으로 그려진다.
이와는 달리, 우리 옛 산수화에서는 어디까지나 산수 자체가 주인공이다. 사람은 주인공인 산을 소중하게 한가운데 모셔 두고서 치켜다 보고, 내려다보고, 비껴 보고, 휘둘러봄으로써 산수의 다양한 실제 모습에 접근하려 한다. 산수화의 목적이 자연의 형상뿐만 아니라 거기서 우러나는 기운까지 담아 내는 것이라고 할 때, 서양의 일점투시는 일견 과학적인 듯 보이지만 카메라 앵글처럼 포용력이 부족한 관찰 방식이다. 일점투시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의 산물인 까닭에 자연의 살아 있는 모습을 따라잡는 데는 실로 많은 어려움을 드러낸다. 애초 산이란 것이 하나의 숨쉬는 생명체라면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하는 동양의 고차원적 인본주의, 즉 회화적으로는 삼원법에 의해서만 충분히 표현된다.
그런데 옛 그림의 삼원법, 즉 고원, 심원, 평원의 다양한 시각이 어떻게 ‘몽유도원도’라는 한 화면 속에 무리 없이 소화되고 있는가? 그 점을 눈여겨보는 것이 사실 옛 산수화를 보는 재미의 가장 커다란 부분의 하나다. 얼핏 생각하기에 다양한 시각이 뒤섞여 있으니 작품 전체가 매우 이상하게 보임직한데, 작품을 보면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서양의 투시 원근법상의 논리로부터 슬그머니 도망쳐 나온, 수없이 많은 자잘한 여백들이 경물과 경물 사이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이의 시선은 그려진 대상을 제각각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떠돌며 옮아다니게 된다. 이를테면 깎아 세운 절벽은 아래쪽에서 쳐다보는 느낌을 주고, 넓은 평원은 자신이 그림 속의 높은 곳에 올라서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작품 속의 자연이 그렇듯이 여기저기 발걸음을 옮겨 놓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피카소가 서양 입체파의 선구자로서 사물을 보는 자유롭고도 상상력 넘치는 시각을 이용해서 복합적인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서양 회화사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 작품은 종종 형상을 너무나 무리하게 왜곡시켜 보는 이에게 대상의 객관성을 배제하고 주관 속의 일그러진 인상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오는 어리둥절함을 신선하고 자극적이라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지만, 우리 한국인에게는 아무래도 어딘가 편하지 않고 좀 지나치다 싶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나는 진정한 입체파의 모범은 오히려 우리의 옛 산수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규모도 훨씬 크거니와 결코 자연의 사실성을 희생시키거나 파괴하여 화가의 개인 의식 속으로 환원 또는 침몰케 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는다. 자연이라는 대상이 살아 있고, 그 대상에 반응하는 인간도 자연과 함께 존재하는 중용적인 시각, 그것이 옛 그림 속의 삼원법이 재현하고자 하는 경지이다. 그리하여 옛 그림 속의 산수는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연의 정기를 속속들이 추체험1)(追體驗)하게 하면서 보는 이의 마음에 크나큰 위안을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