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 삼락(三樂)

 

권정안 / 소장ㆍ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삶과 행복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목적은 제각기 다르고 또 다른 것이 정상이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폭 넓게 정의해본다면 아마 행복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다른 것은 행복 자체가 아니라, 그 행복의 서로 다른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는 나름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조건들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며, 그런 조건들을 얻지 못하거나 얻을 희망이 없을 때 조바심을 내기도 하고 궁핍과 좌절의 고통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50년을 넘게 살아온 저도 제 삶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단언하기 어렵고, 과연 무엇이 행복했고 무엇이 불행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내 뜻대로 잘되어서 득의양양한 경우도 있고, 아내와 연애할 때 설렘과 생명의 고양을 느껴본 경험도 있고, 타고르의 시처럼 아이들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를 보고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축복을 맛본 경험도 있고, 지난 월드컵 때에 행복했던 몇 주일도 있고, 지난 겨울을 포함한 산중에서 행복했던 공부의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제 삶의 행복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그것은 제가 이 여러 가지 행복했던 과거의 경험에 만족하기보다 행복의 조건들을 지금 여기와 미래에서 찾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분명히 저는 만족을 모르는 엄청난 욕심쟁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욕심쟁이 아닌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느냐고 엉뚱한 핑계를 대 보지만, 노자에게 단단히 꾸중을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지요. 정말로 욕심은 끝이 없어서, 50쯤 나이를 먹은 지금에 와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예전에 행복했던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이제 와서야 그것이 행복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경우입니다. 훨씬 행복했을 것을 놓쳐버린 이 지난 날의 어리석음과 미숙함에 대해서는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봄을 찾으러 온 들판을 쏘다니다가 돌아와 보니, 봄이 담장 위에서 기다리더라.’는 말은 얼마나 부러운 말인가요? 봄은 이미 가버렸으니.

 이처럼 우리 삶에 주어진 행복도 제대로 찾아 누리지 못한 사람이니, 이런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행복에 대해서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공부 헛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공부 다시 해야 하겠습니다. 가슴을 저며 오는 무상감을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행복(幸福)과 열락(悅樂)


 앞에서 주어진 행복과 만들어 가는 행복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사실 행복이라는 한자어는 주로 주어진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행(幸)이란 말은 다행, 즉 ‘행운이 많음’을 의미하는 말로써 때로는 요행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복(福)이라는 한자어도 역시 하늘이나 신이 내려주는 좋은 조건이나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성취한 좋은 조건이라는 의미의 덕(德)과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운(運)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크게 규정지어 버리는가를 생각해보면, 이 행운(幸運)과 다복(多福)을 합쳐서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있어서 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실체는 풍요로운 삶의 조건인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옛날 분들은 꿈조차 꾸지 못했던 풍요로운 물질적 조건을 갖추고 더 많은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물론 아직도 기본적인 생존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상대적인 박탈감에서 현재의 풍요조차 도리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과연 이 물질적 풍요와 욕망 충족의 쾌락이 행복인가 하는 회의를 느끼고, 이 물질적 조건과 욕망의 충족만이 행복이 아니라 사람마다 행복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다원적 가치의 시대를 찾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물질적 풍요에 대한 추구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치열한 경쟁에 스스로의 삶을 낭비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행복의 조건에 대한 다른 대안을 찾는 기회를 가져본 사람들에게 이런 흐름이 강한 것 같아 보입니다. 

 모색되는 대안들은 다양해 보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자신의 건강을 위한 활동과 취미 생활,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한 형태의 활동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기성세대가 이 흐름 위에 있으면서도 거의 맹목적으로 거기에 집착하는 형태라면,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행복한 삶의 조건을 어떤 고정된 조건과 관계에서 찾지 않는 이른바 ‘쿨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써 저도 전자에 가깝지만, 이 양자 사이에 공통점은 오히려 행복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행복의 주체인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기성세대나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자신의 행복 찾기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복의 외적 조건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에서 행복의 주체로 눈을 돌린 이 흐름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적어도 행복의 조건을 주어진 것으로 보는 수동적인 자세는 물론이고, 외적인 조건에서만 행복을 찾는 맹목적 추구의 멈춤과 반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행운과 다복이라는 의미의 행복(幸福)에서 희열과 쾌락이라는 의미의 열락(悅樂)으로 무게의 중심이 옮겨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봅니다.

 열락이라는 말은 만들어지고 쓰인 역사에 비하면 현실에서는 사실 별로 쓰이지 않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아마 우리가 지내온 대부분의 역사적 현실이 주어진 행복의 조건들에 의해 결정되거나, 행복을 말하기에도 너무나 참혹한 아픔과 상처들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이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회원들의 경우에는 스스로가 정당하게 성취한 행복의 조건조차 도리어 죄스럽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건 한자에는 초기에 열락의 열(悅)이라는 한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라고 희열이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설(說)이라는 글자를 빌려 희열을 표현하는 문자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 글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태(兌)라는 글자는 주역(周易)의 팔괘(八卦) 가운데 하나인데, 그 태괘의 중요한 상징 가운데 하나는 소녀(少女)입니다. 그러니 지금 열(悅)이라는 한자는 ‘마음 속에 젊고 아름다운 소녀 하나를 품고 살아가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요즈음 여성들에게 유행하는 꽃미남에 대한 노골적인 선호의 주역적인 버전이라고나 할까요?

 락(樂)이라는 한자는 본래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 가운데 큰북과 작은북이 나무로 만든 악기 틀에 올려져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음악이 인간의 행복의 중요한 표현 양식이고, 동시에 인간의 행복을 돕는 도구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북은 인간의 심장 박동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는 악기여서, 사람의 심장의 움직임을 ‘북 고(鼓)’ 자를 써서 고동(鼓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즐거움은 항상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감동의 상태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미 짐작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 희열과 쾌락을 결합한 열락이라는 말은 공자의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것으로, 우리 회지 창간호와 2호에 이 난에서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희열이란 개인의 내면에서 홀로 우러나는 기쁨이라면, 즐거움은 더불어서 함께 나누는 것임을 말씀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자가 말한 열락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관건은 그 열락의 주체인 인간이 군자라는 인간상을 갖추었느냐 아니냐의 여부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공자의 행복론 아니 열락론이 유학이 그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써 제시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도(道)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학에 대한 말씀을 드리면서 매번 유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지겨운 자기반성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인가를 말씀드렸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실은 지나온 제 삶이 이 경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가에 대한 고백이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공자의 열락론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마 제가 가슴을 스쳐 가는 세월의 무상감에 치를 떨고, 돈과 권력과 명예가 열락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에 이리저리 귀를 쫑긋거리고, 온갖 쾌락의 달콤한 유혹에 수도 없이 스스로를 기꺼이 내던지고, 이기적인 자기 합리화와 우스꽝스러운 자아도취 속에서 나의 안일을 추구하는 피투성이의 삶 속에서도 아직 이 견해를 포기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첫 번째 즐거움


 맹자는 이런 저에게는 너무나 부러운 분입니다. 유명한 맹자의 삼락(三樂)은 사실 군자(君子)라는 전제가 붙어 있는 것이니, 사실 제가 부러운 것은 그 열락이 아니라 그 군자라는 인간이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맹자 진심장 상(盡心章 上)에 나오는 이 말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의 왕자가 되는 것은 그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다. (君子有三楽 而王天下 不与存焉)


 이 구절 가운데 ‘왕천하’라는 말은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맹자가 사용한 이 말의 본래 뜻을 생각하면, 그것은 인류적인 지도자가 되어서 전 인류에게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유학의 이상인 동시에 수만은 인류의 지성들이 꿈꾸어 온 이상입니다.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해온 진정한 지성들에게 그 이상의 실현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요?

 물론 이 말의 세속적인 의미가 절대 권력을 쥐고서 천하를 제 마음대로 요리하는 한 사람만의 절대 자유와 그 행복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맹자의 본의는 이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사실 이 말이 갖는 본래의 의미는 오히려 앞의 논어에서 공자가 추구한 더불어 즐거운 삶의 궁극적인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입니다.

 다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맹자는 이 구절의 바로 다음의 구절에서는 이 내용과 달리 “천하의 중심에 서서 사해의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주는 것을 군자는 즐거워한다(中天下而立 定四海之民 君子楽之)”라 하였습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맹자는 바로 이 내용을 삼락을 말한 뒤에 다시 한번 강조하여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의 의미를 ‘한 사람이 진정한 지성이 되어서 인류적인 이상을 구현하는 기회를 갖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군자에게는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적어도 세 가지는 있다.’ 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에게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다.(父母倶存 兄弟無故 一楽也)


 우리가 행복의 조건들을 가치로 보는 것이라면, 이 말은 적어도 군자는 왕천하의 가치보다 부모님들이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에게 아무런 탈이 없는 것이 더 높은 가치이며, 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열락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적인 가치관을 갖는 사람은 물론 사회적 이상 실현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지성인들 모두에게 이 말은 녹녹하지 않은 도발적인 제안입니다.

 차라리 ‘자식들에게 아무 탈이 없고’ 라는 말이 들어갔다면, 저처럼 자식들을 길러본 사람들에게는 꽤 공감이 가는 말이었을텐데 말입니다. 물론 이 구절의 내용에 대해서, 그 부모와 형제에게 다른 조건이 붙어있지 않다면 상당히 공감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자신의 행복이나 오늘날 가족의 중심이 된 소가족의 행복에 어떤 형태이건 장애가 되는 조건이 달려있는 부모 형제라면 어떨까요? 참혹한 말이지만, 우리의 부모님들이 한창 나이 때에 입버릇처럼 탄식했던 ‘자식이 웬수다.’ 하신 말씀은 거의 전부 말씀일 뿐이었지만, 그 말을 뒤집어서 말이 아니라 현실의 행동으로 부모님께 돌려드리는 일이 너무 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 속에서 형제의 무고함이야 더 이상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는 이 말의 가치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이 행복을 잃어버린 분들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다행하게, 정말로 다행하게 이런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강의 시간에 이 말을 할 때마다 조심스러운 것은 저보다 훨씬 젊은 학생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이 말이 못을 박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 일이 아님에도 정말 가슴이 저려옵니다. 그리고 내가 그런 행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절대로 미안할 수 없는 일이면서도, 공연히 미안스러워 말을 주저하게 됩니다.

 맹자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직 명성이 나기 이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오늘날 교육열의 상징처럼 되어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 구절은 적어도 맹자가 아버지를 여읜 뒤에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맹자는 이 말을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기 위해 한 말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행복의 결여에 대한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 맹자가 말한 ‘부모님께서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에게 아무 탈이 없는’ 이 행복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사랑 받고 사랑했던, 그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전 삶의 영역에서 두 번 받기가 참으로 어려운 이 사랑의 주인공들이 계신다는 것은, 설혹 우리가 이미 그 사랑을 받음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고 해도 얼마나 우리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사람이라 합니다. 불쌍하다는 말은 한자로 ‘불상(不祥)’이라고 씁니다. 복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왜 복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한창 부모의 사랑으로 자라야 할 나이에 바로 그 사랑을 줄 사람을 잃은 것만큼 복이 없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일찍 부모님을 잃은 아이들에게는 작은 사랑 받음의 추억이라도 기억해보라고 권하고, 그 기억마저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 사랑을 상상이라도 해 보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얼어붙은 가슴을 녹이는 일은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지요. 하물며 그 아픔을 스스로 이겨내라고 난 체하는 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지금 세상에는 차마 말하기도 겁나는 더 참혹한 경우도 없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마지막으로 이런 행복이, 아니 그것을 갖지 못한 아픔이 하늘이 준 조건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논리일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참으로 아플 때 원망할 것이라도 있으면, 도리어 그것이 의지거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원망을 받아줄 수 있는 하늘을 닮기에는 아직도 너무 멀었습니다. 

 맹자가 말한 첫 번째 즐거움은 사실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이 결정하고 그 결정된 조건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조건이 감당하기 힘들고 참혹할 때, 그래서 하늘이 그 원망을 받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사실 이 경우에도 인간에게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맹자가 말한 ‘부모님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들 아무런 탈이 없는’ 이런 조건이 축복을 받은 모습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갖지 못한 경우에 인간이 불행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지만, 의외로 현실의 모습을 보면 훨씬 좋은 조건을 받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주어진 조건에 대해 불만을 느끼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역으로 분명히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나 심지어 객관적으로 보아서 나쁜 조건을 받고서도 그것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늘이 주신 조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에 의해 결정됩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우선 그 조건을 스스로의 현실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며 한 걸음 나아가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자세라고 합니다. 니체는 이것을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했지만, 동양에서는 이것을 ‘낙천지명(樂天知命)’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하늘이 좋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더 좋은 자식을 주시지 않았더라도, 이런 부족한 자식일지라도 축복이라고 여겨서 감사하고 행복해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가 중요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이 단지 이런 천명에 순종하는 소극적인 숙명론적 태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자세가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낙천지명’하는 자세야말로 그 주어진 조건을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의 유일한 조건임을 자각하고 인정하여, 바로 그 가운데서 우리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창출해 가는 터전과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가장 완벽한 자식을 가져야만 부모로써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족한 모습의 자식이라도 바로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 만들어 갈 수 있는 정의인 것입니다. 바로 이 길 위에만 부족한 자식이라는 주어진 조건을 바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날 분들은 이것을 ‘명중현의(命中顯義)’라고 하였습니다. 자식과 부모 이외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고 주어져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대입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즐거움

 

 앞에서 주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인간이 갖는 내외의 조건은 모두 결정되어 주어진 것만은 아닙니다. 의외로 인간은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스스로의 내외적인 조건들을 만들어 가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의 영역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그 선택의 출발점에서는 주어진 조건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 미래를 향한 매 선택의 순간에 우리들 앞에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선택의 주체가 비록 과거의 주어진 조건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고 그 조건에 의해서 규정되는 모습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순간에 인간 주체는 다양한 선택의 여지들이 주어지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거의 인생의 매 순간마다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곳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의 자리인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말이 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 선택들은 동시에 인간에게 매우 엄중한 선택의 책임을 물어오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주어진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결과들에 대해 그 조건들에 핑계를 돌릴 수가 있지만, 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에 영역에서는 책임을 돌리는 것이 쉽지 않고 그 스스로가 책임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 두려움은 의외로 녹록하지 않아서 인간은 때로 그 자유의지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기꺼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선택 자체가 보이지 않는 미래를 결정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다, 그 선택의 결과가 실패로 드러나는 상황이 되풀이될 때,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인간은 차라리 이 자유의지의 주인이기를 포기하고자 하는 유혹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두려움과 자포자기가 다른 사람의 삶과 그 삶의 조건들을 자신의 의사대로 휘두르고자 하는 탐욕스러운 지배의지와 함께, 우리들의 삶과 사회와 세계를 왜곡된 형태로 굴절시켜온 두 개의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이 두 가지 내외의 질곡을 모두 거부하는 그 자리에 바로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의 출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楽也)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임을 선언함은 그 어떤 다른 것에도 그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음이며, 그것은 당연히 나를 대신하여 나의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미숙하고 너무나 나약한 우리는 이런 것들의 유혹과 위협을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잘 알기에, 맹자의 이 말 속에 담긴 자유인의 드높은 기상이 얼마나 부러운 것인가 하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인의 드높은 기상은 사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즐거움의 출발점에 불과할 분입니다. 아니 전에 말씀드린 것으로 말하면 그것은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이기보다는 자신만의 희열에 속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진정으로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 자유의 기상과 그것이 주는 자기 희열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맹자의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음’이나 ‘굽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음’은 하늘과 마주 선 나와 다른 사람과 마주 선 ‘나’의 부끄럽지 않음인 것입니다. 그 부끄럽지 않은 나의 출발점은 이미 말씀드린 자유인과 그 자유인의 희열이지만, 이 희열이 우선 다른 사람을 마주해서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자유인으로 인정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역시 다른 사람을 독립된 자유인이 아닌 나의 소유로 만들어 지배하려고 하는 참으로 끈질기고 무서운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며, 그런 모든 제안과 권유를 담담하게 거절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정자(程子)께서 이 글을 공자가 인간다움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극기복례(克己復禮)’ 가운데 극기(克己)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뛰어난 통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소유하고 지배할 수 있어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는 우리 스스로의 유혹과 권유와 제안들을 담담하게 거절할 수 있어서 즐거우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어떤 경우에도 자유인으로 인정하고 존중하여 자유인과 자유인의 대등한 어울림을 만들어 갈 수 있어서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양심에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또 그것은 상당한 정도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다는 실체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현실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행동을 정직하게 비춰보는 온전한 양심과 양심의 눈을 갖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제가 몹시 부러워서 배우고자 하는 옛날 분 가운데 사마광(司馬光)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에 ‘내가 평생 한 일 가운데 남에게 말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하여 저를 절망시킨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글을 읽었을 때, 저는 겨우 20대 초반으로 남에게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입니다.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 둘째 구절입니다.

 참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저는 겨우 이 사마광의 말이 그가 평생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님을 눈치챘습니다. 아니 사실은 이런 의미인지 몰라도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이렇게만 해석한다면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무엇보다도 그 잘못된 지난날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저는 사마광의 이 말을 그는 그가 한 행동에 대해서 어떤 사람을 마주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자신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오만의 표현이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을 비록 미숙하거나 부족한 것이라도 용기 있게 드러내고 당당하게 책임지겠다는 자존의 선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결국 이 경우 저와 사마광의 차이는 용기 있고 당당한 자존심을 갖느냐 못 갖느냐의 차이인 것이며,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것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모든 현재의 결단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옛 분들은 맹자를 완전에 가까운 성현으로 보았고 이는 저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저는 맹자의 이 말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자부의 표현이기보다 오히려 부족한 자신이라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당당한 자존의 희열과, 바로 그런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부족한 모습을 너무나 분명하게 보면서도 그를 당당한 자유인으로 보아주고 대접해주며 더불어 함께 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첫 번째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은 더욱 두려운 말입니다. 우선 누가 하늘을 알겠습니까? 물론 저 푸르고 푸른 하늘[蒼蒼者 天]의 색을 모르겠으며, 그 창공이 무한하게 크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제 말은 도리어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끌어다대는 하늘에 대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맹자의 하늘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의 진심을 하늘은 아실 것이다.’ 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 글을 보고 정자께서 그를 준엄하게 질책하시기를, “하늘은 존엄하신 것이니, 하늘을 함부로 끌어다대지 말라.” 하였습니다. 저는 오히려 하늘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늘을 조금이나마 더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공자 같은 성인께서도 50이 되어서야 하늘의 명을 아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제 나이 이미 50을 넘겼지만, 저는 아직도 하늘이 무엇인지 또 그 하늘이 나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인지 온전하게는 물론 대충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제자가 주자(朱子)에게 천명(天命)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주자가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신 것으로 생각한 제자는 좀 더 큰 소리로 다시 물었더니, 이 위대한 인격과 학문의 소유자인 주자가 노여운 목소리로 ‘내가 천명을 모르는데, 어찌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늘을 잘 모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옛 분들의 글을 보면, 맹자의 이 말 이외에도 여러 곳에 하늘을 말하고 있으니, 사서의 주석을 낸 주자가 하늘이나 그 하늘의 명령을 전혀 몰라서 이런 말을 한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주자의 이 말을 조금 다르게 이해합니다. 그것은 주자가 무엇보다도 하늘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가두어두거나 제한하려고 하지 않은 자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의 미숙함과 온전하지 않음에 대한 자각인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한계에 대한 정직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같은 사람이 꿈속에서도 도달하기 어려운 학문적 경지와 인격의 깊이를 갖고 있는 주자에게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어찌 하늘을 가볍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용한 침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가볍게 말하지 않기는 실로 진정으로 하늘을 알고 닮아가기의 첫걸음이 아닌가 합니다. 자신의 미숙함과 부족함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하늘을 마주할 때, 우리는 우리의 완전함이 아닌 이 미숙하고 나약한 현존 속에서 언뜻언뜻 그 하늘의 편린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니 우리 자신 속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과 현상들 전체 어디서나 하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맹자의 말은 그래서 겸허하고 정직한 마음을 담은 외경의 눈길로, 사람만이 아닌 이 수 많은 하늘들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만나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주신 것들과 바라시는 것들을 자각하고 실현해 가는 ‘낙천지명(樂天知命)’의 터전 위에서,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늘이 주시고 바라시는 것을 더불어 완성해 가는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 번째 즐거움


 저는 하늘을 두려워하여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을 순서를 뒤집어서 말씀을 드렸지만, 논리적으로 말하면 역시 맹자의 순서가 옳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주어진 조건과 그 조건을 주신 하늘을 말한 뒤에 사람과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 순서에 따라 다음의 세 번째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해 볼까요? 두 번째 맹자의 즐거움은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늘이 주시고 바라시는 것을 더불어 완성해 가는 것의 구체적인 실천의 시작을, 그 모든 것들 가운데 우선 나와 같이 미숙한 존재이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더불어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맹자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맹자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사실 맹자가 이러한 벗으로 삼기에는 너무나 참담한 모습이었는데도 말이지요. 여기서 앞의 구절을 다시 한번 돌아볼까요? 두 번째 구절에는 오해하기 쉬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사람을 마주하는 맹자의 시각의 차이에 대한 것입니다. 맹자는 하늘에 대해서는 ‘우러러본다’는 의미의 ‘앙(仰)’이란 글자를 쓰고, 사람에 대해서는 ‘굽어본다’는 의미의 부(俯)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이것은 하늘을 보는 맹자의 시각과 사람을 보는 맹자의 시각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그 행동을 하는 마음과 의식 그리고 가치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더욱이 우리는 많은 현실에서 하늘을 우러르는 시선들이 사람을 얕잡아보는 시선들이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맹자의 이 시각의 차이에 대해서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온전하신 하늘과 비교해서 우리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이런 시각을 자초한 측면이 너무나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굽어본다는 표현이 아래를 향한 시각이라는 점에서 오해의 가능성은 더욱 커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맹자의 시각을 다른 의미로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도 앞에서 말씀드린 맹자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입니다. 적어도 맹자의 두 번째 즐거움이 단순한 자기도취나 자아만족의 즐거움이 아님을 인정한다면, 이 시각의 차이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오해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맹자의 시각의 이동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선 위로 하늘을 우러러보던 시선에서 아래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의 단순한 시각의 이동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이 가는 곳에 눈길이 가는 것이고, 눈길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는 것이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저는 이 시각의 이동은 마음의 이동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굽어본다’는 부라는 글자는 우선 낮은 곳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저의 은사 가운데 한 분이신 안병주 선생님께서는 맹자의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전국시대의 참혹한 현실에서 백성을 건져내려는 간절한 마음’이라는 의미의 ‘절어구민(切於救民)’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 가장 고통받는 낮은 곳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이란 우리 자신이며 동시에 수 없이 많은 낮은 곳에 있는 것들 가운데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맹자의 이 시각의 이동을 단순히 하늘을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림이 아니라, 오히려 하늘의 시선을 따라 가깝고 낮은 곳으로 시각을 낮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그곳에 우리들이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할 사람들이 보였던 것이며, 그것이 결국은 하늘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낮은 곳과 가까운 곳의 아픔과 고통을 더불어 함께 함으로써 하늘과 더불어 즐거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군자라면 말입니다.

  이제 맹자의 세 번째 즐거움을 말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군자는 하늘과 더불어 즐겁기 위해 가까우면서도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기 위해 하늘의 시선을 따라 내려왔습니다만, 그 즐거운 일을 누구와 더불어 해야 하는 것일까요? 아마 하늘의 시선이 가 계신 더 낮은 곳도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먼저 이 즐거움을 함께 해야 할 것은 바로 사람들이기 때문에 맹자의 시선이 그 사람들에게서 일단 멈춘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의 꽃다운 인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得天下之英才 而教 育之 三楽也)

       

 우리 회원 분들은 대부분 교육에 종사하시는 분이고 또 적어도 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니, 이 유명한 말에 대해서 나름의 이해와 공감이 있으실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영재라는 말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신 분도 꽤 있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아마 현실에서 이 영재라는 말이 둔재(鈍才)라는 말과 상대적으로 이해되고, 그것이 사람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되는 경험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차별을 당한 당사자인 경우는 더 말할 것이 없겠지요.

 옛날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한문으로 ‘입언지책(立言之責)’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맹자처럼 뛰어난 인물이어서 그 영향력이 큰 사람은 당연히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지셔야 하겠지요. 옳은 말입니다. 그래도 만약 그 말의 본의가 아닌 것으로 오해를 받거나 왜곡을 당한 것이라면, 사실 그 중요한 책임은 오해하거나 왜곡한 사람들이 더 많이 져야 하는 것도 사실이겠지요.

 특히 글을 전체의 문맥에서 읽지 않고 앞뒤를 끊어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을 ‘단장취의(斷章取義)’라고 하는데, 그것이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왜곡인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무서움은 사실 그들이 이런 왜곡을 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왜곡이 본래의 의미를 정당하게 이해하는 것을 심각하게 가로막는다는 점입니다. 맹자께서도 참 난처하고 속이 상하실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맹자를 위한 변명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천하의 꽃다운 인재’라는 말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천하라는 말은 ‘하늘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것은 사실 ‘하늘 아래 그리고 땅의 위’ 즉 ‘천하지상(天下地上)’으로 사람의 세계, 그것도 사람의 세계 전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당시 맹자 이전부터 그들이 아는 전체 인류사회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던 용어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인류 전체를 통 털어서, 그런 큰 사회 단위에서 꽃다운 인재라고 불릴 사람은 누구이고 또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런 사람을 제자로 만나 가르칠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우리 교육계에 떠도는 말 가운데 좋은 스승이 좋은 제자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자들이 좋은 스승을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교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올 때, 저는 대개의 경우 그것은 비겁함이나 탐욕스러움의 무의식적인 발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사실 저의 경우도 이런 비겁함과 탐욕스러움에서 전혀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이니, 이는 아마도 제가 들어야 할 질책이며 부끄러운 고백일 것입니다. 문제는 맹자의 이 구절을 긍정적으로 보건 부정적으로 이해하건 우리 모두가 바로 이런 부끄럽고 탐욕스러운 시각으로 맹자의 이 구절을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우리의 작고 더러운 그릇 속에 가두어 두듯이, 맹자를 우리의 못나고 탐욕스러운 그릇 속에 가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천하의 꽃다운 인재’라는 이 구절을 ‘온 인류가 모두 꽃다운 인재’라고 읽고 싶습니다. 현실의 저처럼 이 구절을 부끄럽고 탐욕스럽게 이해하는, 말만하면 스스로 거룩한 성직에 종사한다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우리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너무나 미숙하고 너무나 초라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맹자가 따라왔던 참으로 거룩하신 하늘에 시선이 바로 이 미숙하고 초라한 우리 모두에게 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인류 하나 하나가 거룩하신 하늘이 소중하게 바라보시는 존재인데, 정말로 하늘에 대한 외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그를 꽃다운 인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나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그래서 하늘이 소중하게 보시고 맹자께서 그 시선을 따라 소중하게 보아주신 우리들의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선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있는,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를 탐욕으로 더럽히고 미숙함으로 가려도 변함 없이 여기에 있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공자는 그것을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아 주셨다(天生德於予)’ 하셨고, 맹자는 그것을 인간의 본성이라 하면서 그 꽃다움의 실체는 선(善)한 것, 그것도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누군가에서 이 꽃다운 모습을 찾아내서 인정하고 길러줄 수 있다면 참으로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지요. 그 누군들 이런 꽃다운 모습을 갖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완강하게 스스로의 이 꽃다움에서 눈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그 꽃다운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거짓된 자유의지의 무서운 함정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이 함정에 의도적으로 심지어는 기꺼이 뛰어든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꽃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각기 다른 것이랍니다. 물론 비슷한 모습도 있지만, 제각각의 그릇에 담겨 있으니, 결국은 제각기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꽃들이 모두 꽃이고, 또 같은 종류의 꽃들이 있어도 결국은 하나 하나가 제각각의 꽃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각자의 개성적인 재능이고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가지를 길러주는 것이 교육자의 참 큰 즐거움이고, 참으로 의미 있는 진정한 교육이기는 하겠지만, 과연 우리는 그런 즐거움과 의미를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 꽃다움으로 가득한 그들을 길러주기는커녕, 도리어 우리들의 미숙함과 더러움으로 그 꽃다움을 망치고 더럽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내가 누구를 키웠다’고 으스대고, 다른 사람들의 피땀어린 세금을 더 내라고 칭얼대고, 심지어는 아이를 볼모로 삼아 돈을 갈취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더 큰 도둑과 강도들이 많아서 우리의 그런 모습이 폭로되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결국은 아무런 부끄러움과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 채,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은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바득바득 헐뜯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맹자의 이 교육이라는 말을 바꾸어 읽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우선 이 꽃다운 모습을 ‘알아주기’ ‘믿어주기’ ‘바라보아 주기’이며, 그것이 참으로 꽃답게 피어날 때까지 ‘참아주기’ ‘기다려주기’ ‘함께 아파 해주기’ ‘함께 울어주기’일 뿐 아니라 ‘끝없이 속아서 바보 되어 주기’ ‘모르는 체 눈감아주기’이며, 때로는 ‘보채기’ ‘닦달하기’ ‘꾸짖어주기’ 심지어는 ‘냉정하게 돌아서기’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그 아름다운 모습을 믿고 사랑하는 마음으로써만 말입니다.

 그래도 부족하지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사랑의 마음과 그 사랑에서 나온 행동을 하기에는 너무나 미숙하고 부족한 사람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들이 스스로 그 아름다운 모습을 피어낼 힘과 의지가 있음에 대한 믿음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되고, 그들이 장래 우리의 미숙함을 넘어서서 우리를 도와줄 뿐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의 미숙함을 끊임없이 채워주는 벗들임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더불어’라는 말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오직 대등한 벗들에게 있는 것이고, 벗들 속에 함께 있지 않고는 더불어 즐거움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더불어 즐거움이 가능한 우리를 함께 있게 하는 지평은 어디일까요? 하늘의 시선이 머무시는 곳, 맹자의 시선이 따라 내려온 곳, 우리들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그곳을, 주자는 진리의 지평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선 사람의 지평이라고 해두고 싶어서 이것을 인간의 진리라고 말해보지만, 그것은 역시 출발점이고 그 지평의  더 아래를 생각한다면 주자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루한 글이었습니다. 그래도 논어 첫머리에 대한 글과 함께 읽어주시면, 그 길이 하나임을 아실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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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정안 소장님 추구 강의
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 녹음 강의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www.chungnamedu.or.kr
)

함께 참여하시어 가꾸어 가는 강의가 되기를 바라시는 권정안 소장님의 바람처럼 선생님들 모두 함께하는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궁금하시거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홈페이지 추구란 해당강의 밑에 쪽지글에 남겨 주시면 소장님의 답변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추구 강의 시작에 붙여 소장님께서 홈페이지에 올리신 글의 일부입니다.

“추구는 전통적인 초등 교육의 한 교과로서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교육내용과 방법이 어떤 세계이해와 인간이해 사회이해를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재입니다. 앞에 말씀 드린대로 원문과 해석 그리고 제 나름의 풀이를 전통적인 성독과 함께 바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추구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교육은 종합적인 학문의 성격이 강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통합교과적인 성격이겠지요. 그러므로 참가하시는 선생님들께서 각 부분에 대해 자신의 전공의 입장에서 좋은 내용을 첨가해주시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추구는 시이니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관계된 시를 올려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