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상처와 아픔

-시경 권이편

권정안 / 소장․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이 시는 삶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사랑이고, 이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만들어 간다. 그러나 우리 인간 모두의 현실적 삶의 과정에는 그 삶의 굽이굽이마다 숨어 있다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우리의 삶을 뒤흔들어 상처를 만드는 갖가지 삶의 아픔들이 서려있다.

우리의 삶의 요구와 바램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인가? 우리의 삶의 조건이 너무 부족해서 그런 것인가?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힘인 사랑조차도 오히려 너무 작은 힘이라서 그런 것인가? 평범한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사회와 역사가 할퀸 것이라서 그런 것인가? 모든 인간이 존재적 숙명으로 짊어진 ‘無常의 가을 바람’이 스쳐 지나간 것이라서 그런 것인가?

삶의 상처와 아픔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이런 삶의 상처와 아픔들만큼 우리 인간을 우두커니 멈춰 서서 망연하게 만들고, 견딜 수 없는 조바심에 으르렁대게 만들고, 뼈저린 회한과 절망에 치를 떨게 만들고, 슬픔과 노여움과 원망으로 방황하게 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누가 이 인간이 걸머진 삶의 상처와 아픔이라는 짊과 그 짊을 지우는 갖가지 숙명의 그물에서 초연한 체 할 수 있을까?  


     采采卷耳             도꼬마리를 뜯고 뜯어도

     不盈傾筐             기울어진 광주리도 채우지 못하네

     嗟我懷人             오호라 내 마음 속의 그리운 사람

     寘彼周行             저 큰 길 가에다 광주리를 내던졌다네


     陟彼崔嵬             저 높은 산이라도 오르고 싶으나

     我馬虺隤             내 말이 비루가 먹었네

     我姑酌彼金罍         내 짐짓 저 금 술잔에 부어 마셔서

     維以不永懷           이 사무치는 그리움 잊어보려네


     陟彼高岡             저 높은 산마루라도 오르고 싶으나

     我馬玄黃             내 말이 비루먹어 색이 변했네

     我姑酌彼兕觥         내 짐짓 저 물소 술잔에 부어 마셔서

     維以不永傷           이 사무치는 아픔을 잊어보려네


     陟彼砠矣             저 돌 비탈 산이라도 오르고 싶으나

     我馬瘏矣             내 말이 지쳐 다리를 절고

     我僕痡矣             내 종도 발병이 났으니

     云何吁矣             어쩌면 좋을지 한탄할 뿐이네



離別의 상처와 아픔


우리의 삶에서 겪게되는 상처와 아픔은 갖가지이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가 갖고 누리는 모든 내외의 조건과 나아가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을 우선 멈추고 잊게 만드는 것이다. 그 모든 상처와 아픔 가운데 아마 가장 보편적이고 다양한 폭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이 시가 보여 주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아닐까?

1장은 그 이별의 아픔을 가진 여인의 노래, 아내의 노래이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이별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2장 이후로 보면 남편은 아마도 전쟁터에 있는 것 같으니, 國防의 義務를 수행하러 떠난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이 功名을 세우러 자발적으로 나간 것이건, 아내가 출세의 기회라고 권해서 보낸 것이건,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경우이겠지만 사회가 의무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데려간 것이건, 그 모든 원인을 떠나서 지금 이 여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사랑하는 남편이 그녀의 곁에 없다는 아픔인 것이다.

또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없다는 것이 어찌 이 한 가지 아픔만의 원인이겠는가? 가족의 생존을 위한 삶의 조건을 만드는 主役이었던 남편의 부재는 그대로 삶의 조건의 궁핍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남편이 하던 모든 역할까지 짊어져야 하는 아내의 고생은 가시밭길이었을 것이고, 홀로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고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는 어느 한 가지인들 절름발이의 삶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삶의 아픔들 그 뿌리에는 사랑하는 남편의 부재와 그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도꼬마리는 큰길가에 흔하게 나는 풀. 어린잎은 나물로 쓰지만 평범한 음식거리이며, 열매는 약재와 기름을 짜는 용도가 있지만 가시가 있어 사람의 옷에 잘 달라붙고 잘 떨어지지 않아서 귀찮은 식물이다.

아내는 그 도꼬마리를 뜯고 또 뜯는다. 핑계는 나물을 뜯으러 나온 것이지만, 사랑하는 남편이 곁에 있다면 결코 이 평범한 도꼬마리 나물 뜯으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맛있는 나물뿐이랴? 남편과의 즐거웠던 삶의 기억과 남편이 돌아온다면 함께 할 행복한 삶에 대한 다짐 속에서 아내는 다시 생각한다. 남편이 떠나갈 때, 할 수만 있었으면 이 귀찮은 도꼬마리 열매처럼 꼭 달라붙어 남편을 따라갔으면 좋았겠다고.

이런 갖가지 상념 속에 여전히 도꼬마리 나물을 뜯어보지만, 그리운 남편에게 가 있는 마음 때문에 밑이 얕은 기울어진 광주리도 채우지 못한다. 孔子는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라 하였다. 어찌 ‘하루가 석 달 같고, 하루가 삼 년 같을 뿐(王風 采葛)’이겠는가? 진실로 매 순간은 ‘一刻如三秋’이면서, 동시에 시간은 그 헤어짐의 순간부터 멈춰버린 것을.  

상념에서 깨어나 그 아픔이 생생한 현실로 돌아온 아내는 그 광주리 큰 길 가에다 던져버린다. 돌아보면 별로 맛도 없는 흔하디 흔한 도꼬마리 뜯겠다고 큰길가로 나온 것부터 그렇다. 그 큰길은 사랑하는 남편이 떠나간 길이고, 그 그리운 사람이 돌아올 길이고, 그 그리운 사람에게 한 발이라도 가까운 곳이어서,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운 남편이 있을 그 큰길의 저쪽을 아내는 우두커니 멈춰 서서 바라본다.

그 아내의 눈길이 닿은 저쪽 끝 하늘 아래, 그 그리운 사람이 똑같이 그리운 사람을 향해 서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 시선이 만나는 곳, 아니 그 사랑하는 사람들의 거리를 넘어서서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상처와 그들의 아픔은 하나이다. 이제부터 이 시가 남편의 그리움과 아픔을 노래한 것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그 아픔이 어찌 남편만의 것이거나 아내만의 것이겠는가? 1장의 아내의 아픔이 곧 남편의 아픔이고 2장 이후의 남편의 아픔이 곧 아내의 아픔이듯이,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갖가지 이별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朱子는 이 시를 ‘文王이 조회와 정벌에 나가 있을 때나 羑里에 구금되어 있을 때, 后妃가 지은 것이 아닐까?’ 하였는데, 과연 이 시가 문왕의 아내인 太姒가 지은 노래인지는 확인할 길 없고 또 내용으로 보아 여인 혼자의 노래는 않은 것 같지만, 이런 점을 제외한다면 주자도 역시 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그 이별의 상처와 아픔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 고향을 떠나 낯선 戰場이나 他鄕을 떠돌거나, 심지어는 문왕이 羑里에 구금된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남편의 상처와 아픔이 어찌 아내에 대한 그리움 한 가지 뿐이겠는가? 그 현실의 갖가지 困苦와 挫折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움만 하더라도 어린 자식들이나 다른 가족과 이웃 친구들과 그들과 어울려 살아가던 추억들까지 그 모두가 그리움에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여전히 그 중심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것이다. 이 아내에 대한 남편의 그리움은 아내가 있는 고향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고자 높은 산  언덕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한다. 그러나 눈길로라도 아내가 있는 고향을 바라보고 싶은 남편의 현실은 더욱 가혹하다. 작은 틈이라도 내서 가까운 산마루에 오를 수만 있다면, 좀더 고향 쪽 가까운 곳을 볼 수 있을 텐데, 남편에게는 그런 여유마저 주어져 있지 않다.

내 말이 비루먹었다는 한탄은, 고향 쪽으로 가기는커녕 눈길이라도 멀리 보낼 수 있는 산마루에도 오를 여유와 방법이 없는 그 현실의 아픔과 탄식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아내와 만날 방법이 없는 현실의 아픔과, 그래서 아니 그럴수록 더욱 깊어 가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견뎌냄과 아픔의 심화


인간에게 요구가 있고 바램이 있되 그 내외의 조건이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 바로 그 자리에 인간의 상처와 아픔이 있다. 中庸에 ‘천지의 큼으로도 오히려 사람은 유감이 있다.(天地之大也 人猶有所感)’ 하였으니, 이 요구와 조건의 괴리와 이로부터 생겨나는 인간의 상처와 아픔은 모든 현실적 실존 자체의 보편적인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괴리에서 오는 상처와 아픔에 해결 방법이 있고 탈출구가 있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 상처와 아픔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진정으로 문제는 바로 그 방법과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 속에도 그 힘이 확인되지 않고 외적인 상황에서도 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그 한계상황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절망하게 한다.

이 ‘한계상황’과 ‘절름발이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대응은 바로 그 현실의 상처와 아픔이 우리를 힘들고 절망하게 하는 것을 우선 ‘견뎌냄’이다. 이 견뎌냄은 一見하면 너무나 소극적이어서 비극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지만, 돌아보면 현실은 물론 인류의 전 역사적 생존을 지켜 온 뿌리의 힘이며 우리 인간 하나 하나의 삶에서도 그 나름의 소중한 가치들을 지켜온 뿌리의 힘이 아닌가?

실로 견뎌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살아있음’ 그 자체에 있는 뿌리의 힘이다. 그러므로 이 삶의 상처와 아픔은 우리 생명의 뿌리에 있는 ‘견뎌냄’이란 힘에 대한 도전이요 시험이다. 기독교의 성경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그것은 도리어 이런 시험 속에서 폭로되는 우리의 견뎌냄이란 힘과 그 힘의 원천인 우리의 전 생명이 얼마나 軟弱하고 有限한 것인가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며, 그 흔들리는 존재라는 자각 위에서 이어지는 두려움과 회한의 표현이 아닌가?

‘폭풍 속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숲속에서 어미 잃은 아기 새처럼’ 그 삶의 상처와 아픔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겨우겨우 견뎌내는 우리는, 때로 그 현실이 너무나 두렵고 그 견뎌냄이 너무나 힘들어 짐짓 현실에서 눈을 돌려버림과 망각과 도피를 꿈 군다. 술은 그 길을 함께 해준 인류의 오랜 동반자. 남편은 짐짓 한 잔의 술로 그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짐짓 잊은 체 하면서 호기를 부려본다.

사내 대장부가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보일 수 있나? 호기를 부려보지만, 그러면 술은 왜 마시는가? 矛盾이지? 그래 모순이다. 정직하게 말하면 이 한 잔의 술로 아내에 대한 이 처절하고 긴긴 그리움 잠시라도 잊어보려는 것이다. 남편의 독백은 계속되지만, 그러나 더 깊은 남편의 진실은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그 그리움을 잊으려 기울이는 술잔보다 더 철철 흘러 넘치는 가슴속의 눈물을 멈출 수 없음이 아니겠는가? ‘사무치는 그리움’ 잊겠다고 말은 해보지만, 그 말은 도리어 절대로 잊지 못하겠다는 생명의 북받치는 울음과 비명 그 자체의 역설적 표현일 뿐이다.

이별의 아픔과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견뎌냄과 흔들림, 그리고 망각과 도피의 허망한 시도와 깊은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과 비명은 3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아니 그 현실은 더욱 더 어려워지고, 그 방법은 더욱 더 궁색해진다. 언덕은 더욱 높아가고, 비루먹은 말은 털 색까지 변해서 누렇게 되고, 물소의 뿔로 만든 잔으로 술을 들이켜 보지만, 그리움은 점점 傷心으로 깊어간다.

古詩 ‘行行重行行’의 몇 구절은 모두 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다.


   

       行行重行行         가고 가고 또 가고 가니

       與君生離別         그대와 살아서 이별하였네

       相去萬餘里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

       各在天一涯         제각기 하늘 끝 저쪽에 있네

       道路阻且長         길은 막히고 또 아득한데

       會面安可期         다시 만날 날 기약도 없네

       胡馬依北風         북쪽 오랑캐 말 북풍을 의지하고

       越鳥巢南枝         남쪽 월 나라 새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네

       相去日已遠         서로 헤어진 시간 나날이 길어가

       衣帶日已緩         옷과 허리 띠 나날이 헐렁해가네(후략)



남편이 그리워 큰길로 나온 아내나 아내가 그리워 산봉우리라도 올라 고향을 바라보려는 남편, 북쪽 고향이 그리워 북풍에라도 기대는 胡馬나 남쪽 고향이 그리워 남쪽 가지로만 집을 짓는 越鳥의 마음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헤어짐의 시간이 길어갈수록 그리움이 상심으로 깊어 가는 남편의 마음은 몸이 점점 수척해져서 옷과 띠가 점점 헐렁해져 가는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怨望과 自責의 끝에서


그리움과 상심의 아픔과 상처를 견뎌내면서 터져 나오는 울음과 비명이 있는 그 누가 원망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어느 누가 그런 원망에 대해서 섣부른 위로를 할 수 있으며, 하물며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가? 이 아픔과 상처를 공유하지 않은 사람의 비난이란 잔인함과 다른 말이 아니며, 공감 없는 섣부른 위로란 무책임한 자기 기만일 뿐인 것이다.

孔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不怨天 不尤人)’ 하였지만, 누가 이 아픔을 가진 사람이 남을 허물하고 하늘이라도 원망해보는 것을 시비할 수 있겠는가? 또 공자는 ‘슬퍼하되 상심하지 않는다.(哀而不傷)’고 하였지만, 누가 이 상심을 지나치고 잘못된 감정이니 절제하고 평정을 찾으라고 권할 수 있겠는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나서는 것은 대부분 오만한 헛소리일 뿐이다.

남편은 우선 그 원망의 대상을 저[彼] 산에서 찾는다. 저 산은 왜 그리 높은 것인지, 저 산은 왜 오를 수 없는 돌 비탈인지, 모두가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 아픔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누구도 대답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저 높은 산’은 그의 아픔의 ‘저 쪽에 있는’ 모든 것의 상징이요, 당연히 원망의 대상이 된다. ‘남을 원망하고 하늘을 원망한들’ 누가 그 원망이 대상을 잘못 골랐다고, 원망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그래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은 단지 스스로의 뼈저린 아픔 속에서 온갖 원망을 하고 또 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달래고 또 달래다가 나온 다짐일 뿐이다. 이 아픔과 상처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면 사라질까? 시대의 탓으로 돌리면 사라질까? 하늘에 돌리면 사라질까? 무엇에 원인을 돌려 원망해보아도 사라지지 않는 아픔과 상처를 스스로 보듬을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며 다짐이다. 그러나 ‘하늘도 원망하지 말자’ ‘다른 사람도 허물하지 말자’는 체념과 다짐은 체념과 다짐일 뿐, 이 아픔과 상처에서 솟구치는 원망과 상심을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망과 상심이 忿怒로 이어지기 전에 문득 밖에 있는 저 수 많은 산을 향해 보내던 원망의 시선은 스스로에게 돌려진다. ‘왜 나는 이 상처와 아픔을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지 못했는가?’ ‘ 내 삶의 어느 모서리에서 이 상처와 아픔의 원인을 내 스스로가 만든 것은 아닐까?’ ‘ 그래. 틀림없이 그 때 그 일 때문에 이런 상처와 아픔을 내가 받게 된 것이니, 누굴 원망할 수가 있나.’ 남편은 온갖 因果를 떠올리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반성하고 자책해본다.

삶의 상처와 아픔을 직면한 인간은 누구나 밖을 향한 원망과 자신을 향한 자책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면서 그 상처와 아픔을 풀어낼 방법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원망할 것을 찾다가  찾다가 분노를 풀 대상을 찾지 못하면 하늘이라도 원망하게 되는 것이고, 자책을 하고 또 하다가 절망으로 자학에 이르기도 한다. 2장과 3장의 앞 두 구절은 이런 밖을 향한 원망과 자신을 향한 자책의 끊임없는 되풀이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지막 4장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이다. 저 산은 왜 하필이면 돌 비탈인가? 내 말은 왜 지쳐 다리를 저는가? 그러나 이 원망과 자책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보다 깊은 자책으로 이어진다. 왜 내 종은 하필 발병이 났는가? 그것은 밖에서 원망과 분노의 대상을 찾기 어렵거나 그 대상을 알아도 원망을 풀 길이 없는 상황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후회와 반성과 자책의 심화가 절망과 체념의 끝을 넘어서 새로운 희망과 시작을 만드는 소중한 동력이 되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대부분의 현실은 언제나 자책보다는 밖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그 상처와 아픔을 풀려고 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아니 자책할 것에는 애써 눈을 돌리려고 하고, 원망의 대상을 찾는 것에는 너무나 총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孔子는 ‘자신에 대한 자책은 두텁게 하고, 남에 대한 책망은 조금 하는 것(躬自厚而薄責於人)’이 君子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허물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은 단순한 체념과 다짐만이 아니라, 이런 현실에 대한 통찰을 함께 담은 작은 목소리의 慰勞이자 自覺의 勸告이다.

이제는 더 이상 한 잔의 술이 아픔과 상처를 달래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이 되지 못함을 직시한다. 잠시 그 순간만을 잊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자각하는 순간, 그 일시적인 방편은 무의미해지고, 눈은 잠시의 瞬間이 아닌 永遠을 겨누게 된다. 그러므로 4장에서는 2장과 3장에서 연이어 나온 한 잔의 술로 그리움과 상심을 잊으려는 가사는 더 이상 없다.  

그래도 이 시는 여전히 자책의 심화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탄식하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다. 아니 이 상처와 아픔은 그 자책과 탄식으로 끝을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책을 하고 또 하면서 어쩔 줄 몰라 우두커니 서서 아내가 있는 고향을 바라보는 이 남편의 탄식을 누군가는 들어야 하고, 누군가는 답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그 탄식 속에서 분노를 읽고 두려워할 줄 아는 누군가가 그립다.

유학의 이상적 지도자로 불리는 文王은 그런 ‘그리운 지도자’였다. ‘백성을 상처 입은 사람처럼 보고(視民如傷)’ ‘어린 아기를 돌보듯이(如保赤子)’ 하였다. 백성들의 탄식과 분노 이전에 그들이 무엇을 아파하는가를 무엇을 바라는가를 알고, 그 아픔과 바람을 내 아픔과 바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고, 그런 지도자가 참으로 그립다.

그러나 틀림없이 대부분의 이른바 지도자들은 단지 지배자였을 뿐이다. 이 남편과 같은 백성들의 아픔과 바람에 무관심하고, 그 탄식과 비명에 고개를 돌렸을 뿐 아니라, 그 상처와 아픔을 더 크게 만들고 그 탄식과 비명을 더욱 처절하게 만들고 그 분노를 노도처럼 키웠다. 그래서 나는 이 어리석고 추악한 지배자들은 물론 지도자도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는다.

이 각성은 ‘그리운 지도자에게서 희망을 찾아 새로운 시작을 하기’가 아닌 ‘스스로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시작하기’로 우리를 인도해간다. 그리고 이 轉換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 삶의 모든 상처와 아픔도 그리움과 안타까움도 원망과 자책도 울음과 비명도 좌절과 체념도 절망과 분노도 또 누군가의 비난과 위로도 할큄과 권고도 발뺌과 변명도 모두 그 새로운 희망 찾기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소중한 동력이 된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남편의 시선은 아내에 대한 짙은 사랑과 그리움 속에서 작은 불꽃을 크게 키우고 있다. 아내가 여기에 없어도, 아니 저기에도 없어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이 가슴 속에 있는 한 그 삶의 모든 상처와 아픔은 도리어 그 불꽃을 더욱 오래, 더욱 크게 피우는 동력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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