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교육철학의 근본정신


권정안 / 소장․공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 교수



사람과 세계


사람과 세계의 인연을 다시 묻는다

삶의 주체로서 우리 인간과 그 삶의 조건으로서 세계는, 적어도 모든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한, 뗄 수 없는 상호연관성을 갖는다. 그 관계의 성격과 관심을 갖는 영역이 어떤 형식과 내용을 갖든, 기본적으로 생명체인 인간은 삶의 요구를 가지고 있고 세계가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의 조건인 이상, 인간과 세계 그리고 그 관계맺음에 대한 관심과 해명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일반적인 것이다.

인간과 세계 그리고 그 관계맺음에 대한 이 일반적인 관심과 해명은 동아시아 고대 사상과 그 흐름에서 천인지학(天人之學) 또는 천인론(天人論)이라는 학문적 영역을 구축해왔다. 그 기본적인 구조와 변화 발전의 양상은 본래는 점서(占書)였던 주역(周易)이라고 하는 경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는데, 학문적으로 말하면 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존재론적 경향과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당위론적 경향이 상호 교섭과 대립 긴장을 통하여 보다 진전된 인간관과 세계관, 그리고 천인관계론(天人關係論)을 형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 존재와 당위, 과학과 윤리의 본질과 그 관계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내포하고 있는 이 사상적인 흐름은, 동아시아 고대를 통하여 이미 두 가지 특성적인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인문주의의 방향

그것은 첫째 관심과 물음의 중심이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성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하늘로부터 인간으로, 존재로부터 당위로, 자연으로부터 사회로, 생명적 가치로부터 인간다움의 가치로 관심의 중심 축이 이동해왔다는 사실이다. 공자(孔子)는 이미 이런 방향을 인간의 문화와 역사의 기본 방향으로 인식하였지만, 이것은 사실 동서양의 모든 문화와 역사가 진전하는 보편적 양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흐름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은 말할 것도 없이 이 세계에서 인간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자각과 합리적인 세계이해의 증대이며, 문화의 발전과 역사의 진전 속에서 확인한 인간 역량의 증대와 가치의 제고와 궤적을 함께 해서 강화되어 온 것이다. 주(周)나라 초기인 기원전 12세기 말에 결정적인 전환을 맞이하여 형성된 이 고대 동아시아 인문주의는 일반적인 인문주의의 보편적 특성에 하나인 강한 반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주례(周禮)라는 인문적 제도와 이를 통한 사회운영의 성공 그리고 이런 성취에 대한 자신감을 축적한 이들은 사회적 합리성의 확대를 통한 인문주의 문명 건설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시대로 들어오면서 이런 낙관적 견해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핵심은 인문적 문화의 주체인 인간과 그가 창출한 문화제도의 상대성(相對性)이 너무나 빨리 그리고 다양하게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한계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이 인문주의적 문화와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분명히 초기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종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문화의 소멸과 함께 하늘과 자연과 존재와 생명적 가치에 대한 배제와 소외, 아니면 적어도 무관심과 방치를 상당 부분 동반한 것이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오만과 세계에 대한 경시는 이런 한계를 더욱 확대시켰다.

이 위험을 가장 크게 경고한 것은 노장사상(老莊思想)이었다. 그들은 세계를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다시 살려내려고 할 만큼 반 인문주의적이지는 않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오만과 세계에 대한 경시가 초래할 인간정신의 상대적 빈곤과 그 사회적 병폐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예언적인 통찰력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들은 우선 인간의 가치와 문화가 보여주는 반자연적 특성을 인위(人爲)로 규정하고, 그 인위적 문화와 가치의 본질을 온전한 생명과 절대적 가치를 담지한 자연(自然)을 파괴하는 상대주의(相對主義)라고 규정하였다. 건강하고 순수한 영아(嬰兒)로부터 늙고 추하며 교활한 모습으로 죽음을 향해 거의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인간 군상과, 명리(名利)의 욕망에 매몰되어 가장 소중한 자신의 생명까지도 도구화하여 사물화(事物化) 되어버린 인간의 존재적 전락과, 이를 교묘하게 부추키면서 감당도 못할 허상의 고상한 규범을 내걸어 인간을 억압하는 주류문화와 지배계층 전체의 허위성(虛僞性)에 대한 노장의 냉소는 물론 당대 현실 속에 뚜렷이 나타난 인문주의의 한계, 즉 ‘전락(顚落)하는 상대주의’에 대한 문명비판(文明批判)이었던 것이다.

이 노장의 인문주의 비판이 당시 동아시아 고대 사회에 던진 딜레마는 다양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그 이후의 인류 역사는 물론 오늘날의 있어서도 다양의 형태로 변형되어, 지금까지도 우리 개개인과 사회에 딜레마로 제시되어 해결과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이런 딜레마에 직면한 인간과 사회는 대부분 그런 상황을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이 선택의 기준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형성해가며 이 기준에 의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리고 이 ‘피할 수 없는 선택’에 직면한 인간은 당연히 다른 선택의 가능성에 대한 긴장과 고뇌를 경험하고, 사회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하거나 주장하는 구성원과 또는 다른 사회와 갈등과 충돌을 겪게 된다.

 

새로운 관계구조의 형성

노장사상이 던진 딜레마 속에서 바로 이 점을 문제의식으로 가진 일군의 사상가들에 의해 세계와 인간 자연과 인문의 딜레마적 상황을 돌파하려는 두 번째 특성적인 방향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세계와 인간을 새로운 구조의 관계맺음을 통하여 하나로 만들어 가는 방향이었다. 앞의 방향이 전 인류적인 보편성을 지닌 방향이라면, 이 두 번째 방향은 동아시아적 사상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와 인간을 하나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이런 관점이 바로 천인관계론이다.

이와 같은 천인관계론은 대체로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삼 단계의 역동적인 구조로 이해하였는데, 그것은 관계의 출발점에서의 본질적인 일치와, 관계의 전개과정에서의 대립과 상호요청, 그리고 궁극적인 지향에서의 관계의 통일과 새로운 승화라는 패턴이었다. 이 삼 단계의 구조를 전통적인 표현을 빌리면 천인본일(天人本一) - 천인양립(天人分立) - 천인합일(天人合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조에서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주장하는 것이 천인본일(天人本一)로의 복귀(復歸)라면, 공맹(孔孟)을 계승하여 역전(易傳)과 중용(中庸)을 형성한 유학자들은 인간중심적 인문주의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본질 과정 지향의 제 단계에서 세계와 자연에 적절한 의미부여와 역할을 인정하는 새로운 관계구조를 설정하고, 그 관계의 핵심적인 고리를 제시하였다. 그들은 이런 모델을,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자이면서도 기존의 반종교적 인문주의자들과는 달리 종교문화적 전통의 긍정적 의미를 인문주의 문화의 터전과 본질로 수용한 공자(孔子)의 방식에서 찾았다.

물론 그 관계 구조와 관계의 중심적인 고리도 그들이 처음 찾아낸 것이기보다는 그 이전 동아시아에 있어서 세계 이해와 인간 이해 및 상호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한 것이지만, 이런 이해들을 종합하여 천인관계론이라는 광범위한 사상체계로 구체화한 것은 분명히 이들의 사상적 공헌이라 하겠다.

앞에서 제시한 삼 단계의 관계구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세계와 인간이 그 모든 단계에서 기본적으로 공생(共生) 공존(共存) 공조(共助)의 관계맺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출발점과 지향점에서 이들의 일치와 통일은, 과정에서의 분립이나 중심이동이 단순한 다른 것의 배제와 소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본래의 일치를 회복하고 통일을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의미 있으며, 그 분립된 양자(兩者)가 모두 그 동력으로 의미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근거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현실에서 본일과 합일의 체험 대신에, 현실적인 분열과 대립의 부분적인 과정 속에서 개인적 삶을 살아가거나 어떤 사회의 짧은 역사적인 단계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존재의 상대적 절망과 인간가치의 상대주의적인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인문주의적 선택의 일환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노장사상처럼 상대적인 것의 포기와 취소를 통해서 절대를 회복하는 방식 대신에, 상대적인 것 자체에서 절대적인 차원의 가치를 인정하고 과정을 단순한 수단(手段)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이해하여, 모든 인간과 존재의 삶을 이 온전한 세계 속에서 의미 있도록 하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구조가 세계와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제 관계의 보편적인 동시에 바람직한 사유구조(思惟構造)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유구조는 인간의 사회적인 제 관계는 물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물, 집단과 집단의 외적인 관계맺음에서는 물론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체 속에서 타자와 집단의 모습을 확인하고 부분 속에서 전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내적인 관계맺음을 주시하고, 그 공생과 공존과 공조를 바람직한 것으로 지향하는 의식을 형성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런 사유구조는 동아시아의 사상전통 속에서, 하늘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고 하늘을 점점 인간적인 하늘로 만들었으며, 사람에게서 하늘을 보고 인간을 더욱 소중한 존재로 부각시켰고, 부분에서 전체를 보아 부분의 고립을 깨버렸으며, 전체에서 부분을 보아 전체의 내용을 풍요롭게 했으며, 타자에게서 나를 보아 타자를 우리로 받아들이며, 나에게서 타자를 보아 나를 확대된 자아로 성장시킬 수 있는 힘으로 기능하였다.


생명의 고리와 서로 살림의 벗

그러나 이런 사유구조가 동아시아 사상사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살아날 수 있도록 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세계와 인간 사이에 영원한 인연을 맺어준 생명이라는 고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초기 인류사회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이 세계는 인간에게 변화(變化)를 그 특성으로 보여주는 것이지만, 동아시아에 있어서 그것은 단순한 변화보다는 오히려 생성변화(生成變化)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당연히 생성력 또는 생명력을 주시하게 되고, 세계와 인간을 생명을 고리로 한 관계맺음의 구조로 파악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연히 세계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나아가 이를 고리로 한 그들은 가장 친화적인 관계를 본질로 한다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형성하였다. 여기에서 세계는 냉정한 방관자나 타자가 아니라, 서로 생명으로 이어지고 우정으로 맺어진 동반자의 모습을 형성하게 된다.

서구적 문명의 전통 속에서 릴케는 ‘천사(天使)들이 다감하게 느끼는 이 우주(宇宙)에서 우리 인간은 아직 미숙한 존재일 뿐’이라는 절망에서 세계를 타자(他者)로 밀쳐내고, 겨우 ‘사물(事物)로써 태어나 사물들 속에서 사물로서 살다가 사물로서 죽어감’에 인간의 자리를 찾으려 발버둥쳤지만, 동아시아적 문화 전통 속에서는 저 무한한 하늘도 너른 대지도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도 땅위에 솟구친 산과 흘러가는 강물도 그 가운데 스쳐 가는 바람과 흩뿌리는 비도 세계 자체와 그 속의 삼라만상(森羅萬象)도 모두 생명의 고리로 우리 인간과 본래 하나였고 지금도 하나이며 영원히 하나인 것이다.

바로 이 생명을 고리로 한 관계맺음에서 모든 나와 너에 대한 긍정과 신뢰 존중과 사랑이라는 인간정신인 동시에 세계정신이며 문명정신의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그 생명을 고리로 한 관계맺음의 뒤에 서로의 역할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서로의 생명을 살려감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세계의 본질적 가치도 살려감에 있으며 (天地之大德 曰生 : 周易), 인간의 본질적 가치도 살려 가는 힘(元 善之長也 : 주역, 仁 德之總名 : 朱子)에 있으며, 그들의 관계맺음의 본질도 서로 살림(相生)에 있는 것이다.

이 본질의 일치와 서로 살림에 대한 굳건한 신념 위에서, 모든 현실에서 어울림과 조화는 물론 대립과 긴장과 갈등조차도 궁극적으로는 본래의 하나임을 회복하거나 보다 높은 지향을 성취하기 위한 소중한 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적 현실은 언제나 그 이상을 성취하기 위한 토대이면서 한계이지만, 그 토대와 한계로서 역사적 현실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토대에 대한 애정과 신뢰, 그리고 한계를 돌파하는 지혜와 용기로 서로 살림의 성취를 확대해 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진정한 한계는 바로 이런 서로 살림의 부재(不在)와 부정(否定) 그 자체이다. 세계와 인간 그리고 그 관계맺음의 모든 영역에서 서로 살림의 부재와 부정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스스로에 대해서는 자만과 탐욕과 자포자기(自暴自棄)로 대상에 대해서는 증오와 소외와 불신과 경시로 나타나는 반생명적 타자회(反生命的 他者化) 사물화(事物化) 도구화(道具化)이며, 관계맺음에 있어서는 지배적 소유화(所有化), 권력화(權力化)와 이를 관철하는 죽임의 폭력화(暴力化)이다.   

그래서 배움과 가르침이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과 어떤 관계를 맺건 이 서로 살림의 부재와 부정을 떨쳐내고, 바로 그 인간의 자리에서 점점 더 이 서로 살림이란 세계정신을 배우고 닮아 가는 인간의 세계화과정이며 동시에 이 세계에 점점 더 많은 서로 살림이란 인간정신을 채워 가고 키워 가는 세계의 인간화과정의 자체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와 우리와 모두는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존중하고 존중받으며 신뢰하고 신뢰받는 스승이며 제자이며 결국은 본래부터 벗이었고 지금도 벗이며 영원히 벗이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우리 민족사를 보는 유학적 관점

단재는 그의 조선 상고사 총론에서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 하였다. 우리는 이 말이 민족의 생존과 주체성이 극도로 위협받던 위기상황을 전제로 한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필자는 우선 이 말이 갖는 彼我의 관계구조와 관계내용에 주의하고자 한다. 그 때 이 말은 적어도 통시대적이거나 보다 넓은 차원의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부분적인 진실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물론 우리가 민족국가 형성 이전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민족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역사무대 속에서 등장한 이후 오늘 인류사의 한 부분으로 살기까지, 우리의 역사적 체험은 우리 또는 민족적 주체성에 대한 긴장을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피아의 대립구조와 내용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며, 그 대립을 포함한 공존과 친화 교섭과 고립의 다양한 구조와 내용을 경험해왔고, 그 모든 역사체험이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역사를 진전시키고 보다 보편적인 문명의 가치를 담은 문화를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주체성이란 바로 그런 성공과 실패, 공존과 대립, 교섭과 고립의 역사적 경험들을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발전의 계기로 삼아온 주체가 우리라는 의미이며, 그 주체가 항상 보다 넓고 높은 보편적 가치들을 획득하고 창출하는 역량을 담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열린 주체성의 민족적인 근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홍익인간의 이념이다. 필자는 이 이념에서 인간존중과 인간중심의 의식과 함께 우리 인간의 생명과 삶 그리고 심성의 근원인 이 세계를 긍정하면서, 우리 민족의 문명사적 의의를 하나 하나의 인간과 동시에 인류 전체를 폭넓게 도와 가는 주체로서 성장해가고자 하는 인류사적 전망을 확인한다.

이런 민족적 주체의 형성이나 그 전망의 구현은 물론 단숨에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조급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 가족 부락 지역 국가 민족 인류를 거쳐 세계에 이르는 전 삶의 단계와 구조를 함께 감싸고 가야하는 원대한 과정이며, 각 단계에서는 항상 전 단계의 성취를 당대 문화건설의 주체적 기반으로 확인하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언제나 보다 확대되고 높은 다음의 단계를 지향하는 방식이었다.          


민족 단위의 역사의식 형성과 전개

필자는 이런 민족단위의 역사의식과 역사체험이 과연 정확하게 어느 시대에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것인지 정확하게 제시할 근거가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고려는 분명히 이런 민족의식이 폭넓게 자리잡은 시기이며, 그 이전의 역사적인 단계에서 이런 의식을 형성하게 된 역사적인 체험이 자리잡고 있으리라는 견해들에 동의한다. 특히 김철준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이 민족국가 의식은 부족적인 결집력을 성공적으로 동원한 통일신라가 그 경험을 보다 높은 단계의 민족공동체 건설에 실패한 것에 대한 반성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고려라는 민족국가의 형성은 이런 공감에도 불구하고 후삼국의 궁예와 견훤의 실패를 거친 뒤에야 가능하였다. 이들의 실패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그렇게 작은 시간적인 비약도 용납하지 않는 역사현실의 냉엄함과 명백한 전망의 결여와 합리적인 실천방안의 미숙함이 초래하는 결과의 차이이다.

이 뒤 고려의 민족주의적 흐름은 비록 중세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었지만, 고려시대 전체에 걸쳐 모든 정치 문화 역사의 기본 방향으로 작동하여, 일반 민중에게도 폭넓은 공감을 가진 시대정신이었다. 이런 특성은 외침을 당했을 때 그것을 민족적 위기로 이해하여 단호하게 저항하는 의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지만, 의외로 선진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개방적인 수용을 통해 민족의 문화역량을 제고하는 개방성을 보여주었다.

한 사회가 보다 높은 문화와 확대된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할 때는 주체적인 역량의 내적 심화와 확대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이런 확대된 문화 방향과 문화 역량을 준비하여 한 사회를 인도하던 지성은 그것을 민중이 학습하여 확대시켜 가는 과정에서 도리어 지배자로 전락하여 사회의 문화진전과 역사발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이다. 고려 후기에도 이 점은 마찬가지였다.

지배계층은 더 이상 새로운 민족문화의 전망을 세우지 못하였고, 그것은 고려 민족주의 문화가 한계에 부딪쳤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민족사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 돌파구를 준비한 것은 성리학으로 이론무장을 한 일군의 신진사대부였다.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체계적인 학습을 통하여 이론 무장을 한 이들은 곧바로 그 이념의 사회적인 실천에 착수하였다.

 

동아시아적 문명사회의 건설

공맹의 이상과 성리학적 이론 및 수양을 통하여 역량을 비축한 이들은 당시 타락한 불교와의 사상적인 투쟁과 기득권을 가진 친원파(親元派) 귀족 권력과의 투쟁을 통하여, 유학적 문명사회관에 입각한 조선왕조를 건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포은(圃隱)과 삼봉(三峰)은 방법적인 차이를 보여 대립하였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과 전망에 있어서는 그들은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공감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은 고려가 갖고 있던 민족주의 문화의 성격과 내용을 계승하지만, 보다 확대된 동아시아적 세계관에 입각한 의식을 가진 사회인 동시에 보다 높은 문화내용을 담지한 문명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이었고,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곧 인륜문화공동체라는 유학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들은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전체적인 문명사회건설의 주역(主役)까지 되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단계를 그런 문명의 일원으로 진전시킨다는 사명의식을 갖고 거기에 충실한 점은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사대주의로 오해받기 쉬운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오해받은 이들의 의식은 무엇보다 유학적인 의리관(義理觀)에 기인한 것이다. 그들에게 진리인 의리는 모든 일상에서 부모에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존중하며 벗 사이에서 신의를 지키는 소박한 내용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삶의 전 영역에서 언제나 보다 높고 넓은 보편성을 지향하는 대의(大義)를 선택하기에 자신보다 사회를 임금보다 국가를 국가보다 백성을 그리고 때로는 문명한 인류 전체를 추구하며, 그 근거를 자신 속에 확인된 인간의 보편적인 양심에서 확인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런 대의를 구현하는 삶을 통하여 스스로의 삶과 나아가 우리 민족의 삶을 진리와 문명의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였다. 이런 문화방향 아래 조선초기 이들은 예제문화(禮制文化)의 건설과 관료제도 및 교육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당시 중국은 물론 인류사회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이 문화적인 성취에 안주하여 그 열매를 독점하려는 훈구파가 형성되었을 때는, 포은과 야은의 정신을 계승한 사림파가 등장하여 기존의 문화적인 성취를 좀더 높은 단계로 진전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동력이 되었다. 그 대표자인 조광조는 당시 훈구파가 유학의 본령인 의리보다는 현실적인 명리(名利)와 사공(事功)을 추구하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요, 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이라는 유학의 본령을 구현하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제시하였다.

조광조를 비롯한 이들 사림파는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상에 대한 열정과 특히 인간이해에 대한 치열한 학문적 탐구와 수양 및 이에 기반한 실천, 그리고 이들에 대한 민심의 지지는 훈구파와 척신(戚臣)들에 대한 청산과정을 거쳐, 선조 무렵에 이르면 사림파가 독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조에 있어서 유학적 가치인 의리(義理)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 시기에 이르러 명백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런 성취는 새로운 문화방향을 전망하고 이를 통한 문화기반과 제도의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율곡의 경장론이 제시되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여러 차례의 사화에 지치고 새로운 주도적 역할에 자만한 사림파는 도리어 당파라는 내적인 분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물론 당파는 표면적으로는 시비(是非) 선악(善惡) 의리(義利)의 기본이념에서의 갈등이기보다는 주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떤 방법이 진정한 의리를 구현하는 길인가에 대한 노선투쟁(路線鬪爭)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이런 내적인 분열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야만적인 외침을 당하게 된다. 이 민족적 위기의 상황에서 사림을 통하여 배양되어 민중에게 스며든 의리정신은 이 두 차례의 외침을 극복한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에 절사한 중봉 조헌은 ‘인도와 평화를 옹호하는 정신 속에서 진정으로 굳세고 영원한 힘이 나온다.’는 신념 아래 민족의 뿌리 속에 스며든 의리정신으로 이를 이겨낸다는 역사의식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근대의 사회변동과 민중의 대두

민족의 주체적인 자존의식과 동아시아적 보편세계에 대한 공헌의식으로 출발하여 사림의 의리정신으로 확대되어온 민족의 문화정신은 두 번의 외침을 통한 반성의 과정에서 민생회복을 중시한 실학운동과 문명사회 회복을 위한 배청북벌론으로 분화되었다. 반계, 성호, 다산 등 경기지역의 남인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실학은 민생의 회복이 민족적 자주성의 실질적 토대가 된다는 관점을 가졌다면, 우암을 위시한 기호 노론학자들이 주도한 배청북벌론은 동아시아에 유일하게 남은 문명국가라는 자존심과 사명의식을 토대로 진리와 문명의 궁극적인 승리라는 역사적 당위를 실현코자 한 것이다.

실학적 반성과 대안의 제시는 지속되었지만 사회적 실천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문명적 대의를 표방한 노론 집권세력은 외척과 결탁하여 권력화의 길을 가면서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서양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된다. 초기 선진적인 기술과 기독교를 통해 접근해온 서양은 차츰 침략적인 제국주의의 속성을 노골화하였다.

국력의 대소와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주권을 인정하고 호혜적이고 평화적인 선린관계에 익숙한 우리 민족에게, 선진적인 문물과 종교까지 제국주의적 침략에 이용하는 이들의 속성은 매우 낯설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실학은 서구의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개화파로 이어지고 의리학파는 서구를 반문명적인 야만으로 규정하여 수동적인 형태의 척양척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정치권력은 물론 조선조를 지탱해 온 선비계층은 더 이상 새로운 문화방향을 제시할 이념적 지향도, 실천적 역량도 갖추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오히려 민족의 문화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문화방향을 제시한 것은 각성한 민중이었다.

19세기 초반에 이미 당시의 현실을 민족사적 세계사적 전환기로 직감한 이들은 새로운 후천개벽의 변혁사상을 제시하여, 그것을 우리 민족의 새로운 문화방향으로 제시하였다. 그것은 크게 민족적 문화전통 속에서 형성된 인간존중과 평화의 정신과 유학적 의리사상의 교양 속에서 형성된 인도주의적 문명의식과 실천적인 사회의식, 그리고 새로운 인류세계의 전망을 담은 인간평등의 정신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이 제시한 이념은 실로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문화방향을 넘어서서 인류적 문화방향이라 해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소중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역량이 부족했고 방법이 서툴렀으며, 무엇보다 수운(水雲)이 검무를 추며 그렇게 바란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두 세기 우리는 우금치의 좌절과 가장 치욕스러운 식민지의 굴욕과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과 인류적인 이데오로기의 투쟁과 개발독재의 경제성장과 금융자본주의 세계화 등 온갖 민족적 인류적 모순의 쓰레기 속에서, 바로 그것을 토양으로 삼아 신동엽이 예언한대로 온 세계와 인류의 밀알들을 썩혀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어린 율곡은 금강산에서 ‘황혼에 만 그루 나무 가운데 홀로 서’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이 땅과 이 하늘과 이 인류사회가 모두 우리 인간의 세계라는 자부심과 우리 하나 하나의 역량을 키워 반드시 인간의 문명한 역사로 성취하겠다는 다짐과 실천으로 모두가 하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번 기행이 문명과 진리의 역사를 추동시켜 온 우리 민족적 지성들의 향기를 배우면서 그런 다짐과 실천을 기약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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