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 주남편의 경학적 이해

 

葛覃 - 勞動

 

권정안 / 소장․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유학과 노동


후한 때 반고(班固)가 지은『한서(漢書)』의「예문지(藝文志)」에는 유학(儒學)의 기원을 ‘인륜 교육을 담당하는 사도(司徒)라는 관직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학이 노동과는 거리가 먼 지배 계층에 속한다는 뜻이며, 그 주요한 관심도 생산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윤리 도덕의 교육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학이 노동과 거리가 멀다는 것은 이미 공자(孔子) 당시에도 이런 평가가 있었다.

『논어(論語)』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다. 즉 공자가 천하를 두루 돌아다닐 때, 제자인 자로(子路)가 뒤떨어졌다가 삼태기를 메고 가는 노인을 만나서 “그대는 우리 선생님을 보셨는가?” 하고 묻자, 그 노인으로부터 “사지를 부지런히 놀려 노동을 하지 않고 오곡(五穀)을 구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을 무슨 선생이라 하느냐?”고 조롱을 당하였던 일이다. 또 공자 자신도 농사짓는 법과 기르는 것을 묻는 번지(樊遲)라는 제자에 대하여 “나는 나이든 농부나 채소 가꾸는 사람만 못하다”고 하면서, 이런 생산 노동에 관심을 갖는 번지를 소인(小人)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공자도 어린 시절에 일찍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축을 돌보는 일이나 회계 정리와 같은 노동에 종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어째든 이런 공자의 관점은 그 이후의 유자들로 하여금 사지를 움직여 노동하는 삶과는 상당한 거리를 갖게 하였으며, 이 때문에 유학은 노동을 천시한다는 비판을 받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은 상당수의 유자(儒者)라고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정당한 것이었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만 공자와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이 단지 노동은 하지 않으면서 고상한 윤리 도덕을 논하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오히려 공자는 인간의 윤리적․도덕적인 삶을 인간다운 삶의 핵심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에게 이런 삶을 요구했지만, 그것은 먼저 일반 백성들의 생존 문제를 해결한 뒤에 이를 기반으로 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 점은 공자가 무거운 세금, 국가 재정의 낭비 등 백성들의 생존 기반을 무너뜨리는 폭정에 대하여 가졌던 분노와 비판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당시 노(魯)나라 계씨(季氏) 가문의 재상으로 있던 그의 제자 염구(冉求)가 계씨를 도와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자,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염구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그를 북을 쳐서 공개적으로 성토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논어』「선진」)”라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공자는 비록 제자들에게 노동을 가르치지는 않았고 성인(成人)이 된 후로는 그 스스로 노동에 종사하지도 않았지만, 이런 노동을 통해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의 조건을 파괴하는 부당한 정치와 지배 집단의 착취를 문제로 제기해 비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공자에게는 이 현실 정치의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삶에서의 노동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이라 하겠다.

앞에서 노동의 문제가 유학에서 중시되지 않았음을 말하였지만,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유학의 나름대로의 견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공자가 직접 정리하고 제자들 교육의 주요 교재로 삼은『시경(詩經)』속에는 노동에 관한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시경이 당대의 민중의 삶을 많이 반영하고 있으며, 유학의 주요한 관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민중의 삶과 그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생존은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일반 민중의 구체적인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의(衣)․식(食)․주(住)의 조건을 확보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孟子는 항산(恒産)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식량과 재목(材木)에 부족함이 없어 가족을 충분히 부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유감이 없게 만들어주는 것을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출발로 보았던 것이다.

 

'생존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노동’을 주제로 한 시, 갈담(葛覃)

그러면 이 중요한 의․식․주의 생존조건은 무엇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노동이다. 실로 땀흘리는 노동의 소중함은 우선 그것이 인간의 생존 조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명백한 사실은 우리의 식량은 어디선가 땀흘리는 농부들의 노동의 결과이며, 우리들이 입는 옷은 어느 봉제 공장의 노동자가 흘린 땀의 결정이며, 그 이외의 어떤 생존 조건도 이 땀 흘리는 노동의 결과 아닌 것이 없다는 점이다. 이 시의 주제는 바로 이 생존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노동이다.

이 갈담(葛覃)의 주제인 노동은 모든 인간의 생존을 위한 외적인 조건을 형성하는 출발점이다. 한자의 '男'字가 '밭에서 힘들여 농사짓는 사람'을 그린 것으로 생존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식량을 생산하는 노동자를 의미하는 것과 같이, 적어도 성인(成人)으로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존조건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사실이며 동시에 정당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다만 이 갈담은 식량을 생산하는 것을 주요한 책임으로 짊어진 남성과 그 노동보다 옷을 만드는 길쌈노동을 하는 여인과 그 노동을 통하여 우리의 생존조건이 어떤 노동의 과정을 통하여 획득되며, 나아가 그 노동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노래이다.


      葛之覃兮           칡넝쿨이 이어짐이여

      施于中谷           골짜기 한가운데로 뻗어간다

      維葉萋萋           그 잎새 무성한데

      黃鳥于飛           노란 꾀꼬리 날아와

      集于灌木           관목 숲에 모여서

      其鳴喈喈           그 울음소리 쪼롱쪼롱

      

      葛之覃兮           칡넝쿨이 이어짐이여

      施于中谷           골짜기 한가운데로 뻗어간다

      其葉莫莫           그 잎새 짙푸르거늘

      是刈是濩           이 칡을 베고 이를 삶아서

      爲絺爲綌           고운 베도 짓고 거친 베도 지으니

      服之無斁           그 옷 입어 싫어할 수 없네


      言告師氏           女師에게 말씀드려

      言告言歸           근친하러 다녀온다 여쭈라고 했네

      薄汚我私           내 평상복도 자금자금 빨고

      薄澣我衣           내 정장도 자금자금 빠니

      害澣害否           무언 빨고 무언 빨지 않겠는가

      歸寧父母           근친가서 부모님께 문안드려야지

 

사랑의 노동

1장은 갓 시집온 여인이 칡 베옷을 만들기 위해 칡을 베러 나간 노래이다. 골짜기로 뻗어나간 칡넝쿨이 무성하고 꾀꼬리 쌍쌍이 날아다니니 따뜻하고 화창한 늦은 봄이요, 야트마한 관목들과 칡넝쿨이 뒤엉켜 자라나는 척박한 비탈이다. 그러나 분명히 길쌈을 위해 칡을 베러 나간 이 여인의 노래에서 적어도 이 첫 구절에는 길쌈하는 노동의 어려움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구절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봄날의 화창함과 꾀꼬리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뿐이다. 더욱이 쪼롱쪼롱 울어대는 꾀꼬리의 노래 속에는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는 신부의 즐거움이 배어 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앞의 관저에서의 부부사랑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출근한 남편을 기다리며 장을 보고 요리를 준비하는 신부나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며 직장에서의 업무를 즐겁게 하는 신랑에게, 그 모든 노동이 말 그대로 ‘고생스러운 몸짓’이 아니고 모두 사랑이 충만한 기쁨이듯이, 이 여인의 노동은 사랑하는 사람의 옷을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어디에도 노동의 어려움은 드러나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사람과의 삶의 기쁨만이 가득한 것이다.

생존의 조건을 얻기 위한 고생스러운 몸짓으로서의 노동, 그러나 이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것일 때는 즐거운 사랑의 노동이 된다. 바로 이런 사랑의 노동이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의 한 모습이 될 때, 우리 하나하나는 이 아름다운 노동으로 살아가는 정직한 삶의 주인들이 되고, 세계는 서로 서로에게 이 사랑의 결실을 나누는 따뜻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립다. 

 

 

노동의 어려움

 

사랑의 노동이라 하더라도 ‘고생스러운 몸짓’으로 ‘수고스러운 일’로서 노동 자체는 역시 어렵고 힘든 것이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우선 인간 생존의 조건을 획득하는 일 자체가 녹녹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녹녹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때로 ‘간난(艱難)’ 그 자체이며, 때로는 생명 자체를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가 농업사회로 접어들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생존의 조건을 획득하기 위한 노동의 어려움은 전혀 녹녹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수고로운 노동의 결과로 얻어진 생존 조건의 성취들은 그대로 ‘자신과 세계의 생존을 위한 공로(功勞)’가 되는 것이다. 역시 어렵지 않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칡넝쿨을 베어서 뜨거운 솥에 삶아 굵고 가는 베올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베틀에 올려 옷을 만드는 노동의 어려움은 얼마다 고통스러운 과정인가? 지난 시절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 삶의 대부분을 뙤약볕 아래서 농사일로 보내고 우리의 어머니들이 베틀 위에서 길쌈으로 지새운 것을 생각하면, 노동이란 어려운 것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한가한 것이고 오히려 참혹한 것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모든 어려운 노동의 과정이 반드시 가치 있는 성과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가치 있는 성과들은 반드시 어려운 노동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 아니 아주 작은 가치를 가진 성과물조차 역시 녹녹하지 않은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제2장에서 여인은 이 어려운 노동을 통해서 아주 작은 생존의 조건조차도 그것을 획득하는 어려움과 소중함 그리고 그것으로 영위되어 가는 삶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확인한다.

어찌 엉성한 베옷인들 싫어할 수 있으며, 거친 나물밥인들 함부로 버릴 수 있겠는가?

 

어려움을 통한 인간 성장  

이 삶과 노동의 어려움과 소중함에 대한 준엄한 깨달음은 우리를 철들게 한다. 물론 ‘안일을 좋아하고 수고로움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인 것[好逸惡勞 人之常情]’이기에, 노동하는 삶을 그 자체로 좋아함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고로운 노동을 우리가 감수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존조건을 만드는 창조적인 생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랑의 가장 중요한 징표는 어려운 노동의 감수이다. 공자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수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것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가를 확인하려면, 우리가 과연 그 누군가를 위해서 어떤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는가를 되돌아보면 된다. 또 누가 학생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교육자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면, 그가 과연 학생들을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가를 확인하면 된다. 또 누군가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다고 하면, 과연 그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어떤 헌신을 했는가를 물으면 된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서 어려운 노동을 감수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우리를 진정한 의미의 성인(成人)으로 만들어 가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이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을 받기만 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로운 노동을 기꺼이 감수할 줄 모르는 철부지의 삶이었다는 자각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함과 사랑을 받음의 어려움과 엄중함을 모르고 그것을 당연시했던 철부지의 눈뜨기이다.

그것은 자연 지금까지 노동의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삶을 되새겨보게 만든다. 이 반성은 어디로 그 정서와 생각을 이어가게 할까?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여인은 노동의 어려움을 통해 철모르던 시절 거친 옷 입기 싫다고 투정 부리던 자신과, 그 투정을 다 받아주면서 노동과 삶의 어려움을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더 해주지 못해 가슴 아파하면서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이 새삼스러운 감동의 북받침은 친정 부모님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누구보다 삶과 노동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잘 아시면서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그런 내색조차 없이 더 잘해주지 못해 안타까워했던 것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찾아뵙는 근친(覲親)의 길인 것이다. 어떻게 준비를 하고 갈까? 

여인은 근친을 가면서 평상시에 입던 옷이나 외출할 때 입는 정장을 모두 깨끗이 빨면서 그 준비를 한다. 그것은 철모르던 자식으로부터 의젓하게 성장한 어른의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것이며, 시집간 딸이 행여라도 고생하고 구박받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한 배려이다.  노동의 어려움을 통해 부모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부모의 마음을 배려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인간은 아름답지 않은가!


 

노동의 사회적 공헌과 분노


땀흘리는 노동의 간난(艱難)과 신고(辛苦)를 마다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만, 적어도 그 노동의 성과는 전 사회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요, 이런 점에서 노동의 사회적 공헌은 절대적인 것이다. 특히 식량의 중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기에, ‘농사는 천하의 큰 뿌리  [農者天下之大本也〕’라고 한다. 또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여기고, 백성은 식량을 하늘로 여긴다[君以民爲天 民以食爲天]’고 하여,  식량을 ‘하느님의 하느님〔天之天〕’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중한 식량을 생산하는 농부와 그들의 노동은 그 사회적 공헌에 비겨 너무나 참혹한 대접을 받아왔다. 공자가 ‘농사를 짓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서인데, 바로 그 농사짓는 사람들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들이 가장 많다’고 탄식했듯이, 노동하는 사람들은 그 수고로운 노동의 성과물들을 터무니없이 빼앗기면서 가장 굶주려 왔다.

그래도 그 소중한 노동의 결과를 제공하는 것이 그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라면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또 모두 다 같은 노동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맹자(孟子)는 ‘어진 임금은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한다〔與民並耕〕’는 주장을 하는 농가사상가(農家思想家) 허행(許行)에 대하여, 사(士)가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공헌함을 강조하면서, “공인(工人)들의 일도 농사를 지으면서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천하를 다스리는 것만을 유독 농사를 지으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강요할 수 있겠는가?『맹자』「등문공(滕文公)」상)”라고 말했다.

사람을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勞心者〕’과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勞力者]’으로 나누고, 마음 고생을 하면서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삶의 기반을 안정시켜 주는 사람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결과를 제공받음이 천하의 보편적 정의라고 하였다. 이런 맹자의 주장에는 사회의 분업적인 구조에 대한 인식이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맹자의 그 말은 상당한 정당성이 있다. 온 천하가 대홍수(大洪水)에 고통받을 때, 치수(治水)를 위해 9년 동안 자신의 집 문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갔으면서도 들어가 보지 못한 우(禹) 임금을 어찌 대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농부가 농사를 지어 식량을 생산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공헌을 하듯, 지도자와 선비들이 그만한 사회적 공헌을 한다면, 이것은 단지 각자의 능력에 따른 분업일 뿐이며, 때로는 그 공헌도에 따라 더 나은 대접을 받음도 하나의 정의(正義)이다.

그러나 공헌은 없이 명예와 부를 누린다면 어떨까?『시경(詩經)』의「벌단편(伐檀篇)」은 이런 사람을 비판하고 있다.


   坎坎伐檀兮               열심히 애써서 박달나무 베어왔더니        

   置之河之干兮             저 황하의 물가에 내던져 두는구나

   河水淸且漣猗             황하의 물 맑고 또 물결도 곱지만

   不稼不穡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지도 않았는데

   胡取禾三百廛兮           어찌 벼가 네 창고에 가득하며

   不狩不獵                 사냥도 하지 않았는데

   胡瞻爾庭有縣貆兮         어찌 네 뜨락에는 담비가 매달려 있니

   彼君子兮                 저 진정한 군자들은

   不素餐兮                 공로 없이 흰밥 먹지 않는다

 

땀흘린 노동의 소중한 성과가 황하처럼 질펀하게 낭비되는 것을 보아야 하고, 그 호사스러운 낭비 위에 미끈하고 여유 있게 사는 자에 대한 분노는,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곡식이 가득하고 사냥도 하지 않으면서 고기가 풍족한 것에 대한 신랄한 비난과, 공헌 없이는 흰 쌀밥을 먹는 짓을 하지 않는 진정한 지도자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으로 나타난다.

이뿐인가? 이처럼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자들일수록 노동하는 사람들의 성과를 독점적으로 향유하면서도 도리어 그들을 경멸한다.


   糾糾葛屨               엉성한 칡으로 만든 신을 신어도

   可以履霜               찬 서리 내린 땅을 걸을 수는 있지

   摻摻女手               가늘고 여린 여인의 손으로도

   可以縫裳               멋들어진 치마를 만들 수는 있지

   要之襋之               허리 달고 동정 달아 내니

   好人服之               멋들어진 사람들이 입는다네


   好人提提               멋들어진 저 사람들 얌전떨며

   宛然左辟               내 옷 입고 품위있게 예의 차리는데

   佩其象揥               상아 빗치개를 곱게도 찼네

   維是褊心               그러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是以爲刺               이 때문에 속상해 풍자하는 것일세

                      (『시경(詩經)』「위풍(魏風)」 갈구(葛屨))


어린 여공들의 여리디 여린 손으로 길쌈한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품위있는 체하면서, 감사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경멸한다.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뿐인가? 고마워할 줄 모르고 경멸할 뿐 아니라, 그 힘든 노동의 성과물들을 갖가지 이름을 붙여 갖가지 방법으로 도둑질해 간다. “무릇 백성으로 땅에서 농사지어 먹고사는 사람들이, 그 수확의 십분의 일을 내서 관리들을 고용해서는, 자신들을 공정하게 다스리는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이제 그 고용의 대가는 모두 받아가면서도 그 맡은 일은 태만히 하는데, 온 천하의 관리들이 모두 그렇다. 어찌 그 임무에 태만한 것에 그치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당하게 백성들의 것을 도둑질을 한다.”( 柳宗元「送薛存義書」)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동의 기쁨과 삶의 정직성


생존과 사랑을 위한 노동은 사회와 역사로 나오면 온통 분노의 노동이 된다. 그러나 이 분노를 넘어서서 노동과 노동하는 삶에는 진정한 기쁨이 있다.

『시경(詩經)』의「빈풍(豳風)」7월편(七月篇)은 옛날 농업사회에서 그 노동과 노동하는 삶의 즐거움을 노래한다. 거기에는 온 가족이 들에 나와 일을 하다가 들밥을 먹으면서 권농(勸農)을 하러 나온 관리들과 어울리는 노래도 있고, 아가씨들이 봄날에 뽕잎을 따러 나섰다가 멋진 사나이에게 시집갈 꿈을 꾸는 노래도 있다. 사랑하는 임을 위해 길쌈을 하면서 행복을 설계하는 설렘의 노래도 있고, 농사가 한가한 틈에 함께 어울려 사냥하면서 신체를 단련하고 군사 연습을 하는 어울림의 노래도 있다.

늦가을 집안을 깨끗이 정돈한 뒤에 한 겨울 온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노래도 있고, 철철의 농산물로 입맛을 돋구면 술을 빚어 흥을 돋우고 한 해 동안 애쓴 농부들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노래도 있다. 힘들지만 뿌듯한 가을걷이를 끝내고 지붕을 새로 덮고 단장한 뒤에 새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기쁨의 노래도 있고, 한 해의 농사를 무사히 끝낸 감사의 마음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함께 어울려 서로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잔치의 노래도 있다.

이 노동과 노동하는 삶 속에서 기쁨을 얻는 이 정직한 삶이 가능한 세상, 그것이 바로 유학이 꿈꾸는 이상세계의 첫 걸음이다. 공자가 꿈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이런 것이 아니겠으며, 인도(仁道)와 정의(正義)가 충만한 사회도 이 기반 없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땀흘리는 노동을 하고, 그 성과를 흐뭇해하며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들은 안다. 그들의 정직한 노동의 대가조차 그들의 노동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그 땀흘린 노동의 성과물 속에서 이 천지 자연의 한량없는 은혜와, 그 노동의 현장을 가꾸고  도구들을 발전시켜 온 조상들의 은혜와,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노동해온 모든 사람들의 땀방울을 보고 감사할 줄 안다.

한식(寒食)의 고사를 만든 춘추시대 개자추(介子秋)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재물을 훔치는 자도 오히려 도둑이라 한다. 하물며 하늘의 공로를 훔쳐 제 노력이라고 말하는 자이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우선 이렇게 다짐해야 한다. 하늘의 공로를 훔치는 것은 고사하고 우선 남의 노동한 공로를 훔치지는 말자. 하늘과 조상에게 감사하기 전에 지금 우리의 삶의 주위에서 땀흘리며 노동하는 사람에게 감사하자. 그리고 우리도 이 소중한 삶에서 남의 공로를 훔치면서 헛 위세를 부리는 거짓된 삶에서 깨어나, 겸허하게 땀흘리는 정직한 삶으로 돌아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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