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족의 화목을 생각한다

      권정안 / 소장․공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가족해체 시대의 ‘가화만사성’

지난 두 회에 걸쳐 점잖은 논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조금은 통속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본래 고전적인 근거는 없는 구절이지만, 한문을 잘 모르고 또 좋아하지도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말 가운데 ‘家和萬事成’이라는 구절이 있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이 말은 구체적으로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훈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老子가 이미 지적했지만, 不仁 不義의 시대에서 仁義의 주장이 나오는 것이고 不孝 不忠의 현실에서 忠孝의 당위가 강조되는 것이듯이, ‘가화만사성’이 이렇게 많은 가정에서 가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 많은 가정의 실패와 불화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IMF 이후 수많은 실업과 이에 따른 가족해체를 경험한 우리 사회에서 이 구절은 더욱 절실한 의미를 갖게 된 것 같다.

물론 가족해체는 단순히 IMF의 영향에서 온 것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특징짓는 큰 조류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대가족은 이미 해체된 지 오래 되었고, 노부모를 배제한 부부와 자식만의 소가족이 정착되는가 했더니, 어느새 자식을 두지 않는 부부만의 가족과 아예 부부라는 가족관계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증가해 가는 현실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혼자 살 수 있을 만큼 능력을 가진 성인들이라면 누군들 자식이나 부모와 같은 가족들을 위한 의무가 짐스럽지 않겠으며, 나의 행복을 위해 투자할 시간과 인생을 거기에 낭비하는 것이 아깝지 않겠는가?

‘자식이 원수’라는 옛 말이나 ‘결혼은 무덤이라’는 요즈음 말속에 담긴 가족제도 아래 삶의 끔찍한 굴레에 비하면, ‘고독한 황야의 이리’ 같은 삶은 표현만으로도 얼마나 자유롭고 멋진 것인가? 소가족제도 아래서 자식을 왕자와 공주처럼 기르기 위해 못할 짓이 없다고 헌신하던 얼마 전의 부모들도, 이제 와서는 자식을 키우느라 흘려보낸 젊은 시절이 너무나 아까워서 땅을 치고 후회하며, 이제라도 내 인생을 찾아 즐겨야겠다고 앞 다투어 나서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가족을 다시 말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어느 학자의 지적대로 가족제도와 가족주의는 ‘국가의 음모’인지도 모른다. IMF 라는 국가적인 실패에서 그 덤터기를 뒤집어써서 실업의 고통을 겪고 가족이 해체되는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서 국가와 그 당시 지도자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가족에게 그 책임을 떠넘겼으니, 이런 음모론이 나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는가?

의무가 있으면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민주적인 국가사회의 정의이다. 그런데 납세의 의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걷어가고 국방의 의무라는 명목으로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더니,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행복한 삶을 살 권리를 보장하는 의무에 대해서는 슬그머니 발을 빼서 가족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가족제도와 가족주의가 국가적 음모라는 비판을 들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더 심각한 도전도 있다. 이제까지의 가족공동체를 지탱해 온 혈연적 동질성이라는 기제 자체가 무너져 가는 추세가 그것이다. 먼 나라의 이야기로 농담처럼 말해지던 ‘네 아이 내 아이 우리 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이 현실적으로 늘어가고,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입양이 권장되는 상황에서 혈연적 동질성에 기반한 전통적인 가족관은 변화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찍이 대동사회의 건설을 주장한 강유위는 이 혈연적 동질성에 기반한 가족이야말로 대동사회 건설의 가장 큰 장애로 보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 가족의 해체와 1년 단위의 계약결혼제와 아이들의 국가양육제 등을 주장하였지만, 오늘날 과학의 발전으로 눈앞에 닥친 인간 배아와 복제인간의 가능성을 알았더라면 가족해체에 그렇게 열을 올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개인주의적인 삶의 풍미와 국가적 음모라는 질타와 혈연적 동질성의 이완 속에서 흔들리는 가족과 그 제도는 과연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이고,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나아가 이처럼 가족이라는 전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가족의 화목이란 또 얼마나 공허한 ‘흘러간 옛 노래’인가? 그럼에도 나는 다시 가족과 가족의 화목을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은 우선 가족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삶의 공동체 가운데 하나이고, 그 구성원의 화목은 행복한 삶의 중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평등’을 전제로 한 ‘화합’

즉 ‘家和萬事成’이라는 구절 속에는 가족의 행복한 삶에 대한 바람과 그 조건으로서 화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의식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가족 간의 불화가 불행한 가족생활의 중요한 원인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화는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불화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의미하니, ‘和諧’ ‘和合’ ‘調和’ ‘協和’ ‘溫和’ ‘和睦’ ‘共和’ ‘和平’ 등의 개념들이 대체로 긍정적인 가치를 담고 있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許愼의 說文解字에 의하면 ‘화’라는 글자의 본래 의미는 ‘相應’ 즉 서로간의 호응으로서, 주로 음악에서의 하모니 즉 ‘和音’이라는 의미로 쓰이던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선 조화롭지 못한 불협화음을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배제하는 것이니, 음악의 하모니처럼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가 갈등과 대립과 불화를 청산하고 조화와 화목을 성취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화는 불화와만 대립적인 모습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는 가장 가까워 보이는 모습과 대립되는 것이니, 그 대표적인 것이 같음을 표현하는 ‘同’이다. 물론 다름 즉 ‘異’와 대립의 짝이 되는 같음의 동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의미의 화와 대립되는 부정적인 의미의 동의 관계를 처음으로 지적한 것은 공자이다. 그는 논어에서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라 하여, 이 화와 동을 군자와 소인이 보여주는 관계맺음의 대립적인 특성으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뛰어난 음악 애호가 작곡가 연주가였던 공자의 체험 속에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여러 악기와 그 연주자가 하모니를 무시한  채 제각기 소리를 내는 것이 불협화음의 소음이듯이, 모든 연주자가 같은 악기로 같은 음만을 내는 것도 역시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사이비의 화와 동을 ‘附和雷同’이라 하는 것이니, 여기에서 진정한 화란 ‘각자의 개성과 주체성이 살아있으면서 함께 어울려 하모니를 이루는 관계맺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가족의 화목도 역시 가족 개개인의 개성과 주체성이 존중되면서 서로 어울리는 속에서 바른 모습을 가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가족생활에서 이런 화목의 모습은 역시 그 구성원 사이에 있어 권리와 기회 그리고 책임과 의무가 공평할 때 더욱 공고해질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가족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 ‘화목’과 ‘화합’은 반드시 ‘공정’과 ‘평등’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서로의 애정과 신뢰를 키워 가는 진정한 의미의 화목과 화합이 되는 것이다.

지난 시절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구호나 고속도로마다 서있던 ‘총화단결’의 표지판이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메아리 없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불화를 일으키고 단결을 깨는 ‘불공정’과 ‘불평등’을 방치하고 심화시키면서, 바로 그 불공정과 불평등에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불공정과 불평등을 조장하고 확대하는 사람들과 화합하고 단결하자는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공자가 왜 정치에 있어서 풍요의 중요성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가난한 것이 걱정이 아니라 고르지 못한 것이 걱정이다(不患貧而患不均)’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실로 ‘平和’란 한자어의 구조를 보면 ‘내적인 갈등과 불화, 그리고 외적인 전쟁 상태의 부재’라는 ‘和’의 앞에 공평과 균형을 의미하는 ‘平’을 먼저 말한 것을 보면, 왜 ‘平天下’가 인류 사회의 이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족은 혈연적 동질성에 기반한 애정과 신뢰가 일반사회보다는 훨씬 강력한 관계이기 때문에, 기회와 권리 책임과 의무의 불공정과 불평등이 있더라도 이해와 인내로 갈등과 불화를 상당히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족 사이라 하더라도 불공정과 불평등이 심화되고 지속된다면, 그들 사이에 애정과 신뢰가 줄어들고 결국은 가족관계 자체에 위기가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의 화목’은 언제나 ‘집안을 가지런히 한다’는 의미의 ‘齊家’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修身齊家’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大學에 나오는 이 유명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오히려 매우 드문 것 같다. 그래서 ‘제가’를 전통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일사불란한 가부장적 통제를 의미하는 것쯤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齊의 본래 의미는 ‘平等’과 ‘均衡’이다. 그러니 ‘제가’의 의미는 역시 가족 내에서 기회와 권리 책임과 의무가 공평하고 균형 있게 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그 책임은 주로 가장에게 있었고, 그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의 권리가 지나치게 주어졌기 때문에, 가부장적 제도의 여러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제가를 해야한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고, 제가의 내용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의 비민주성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민주적인 가정을 이 시대적 가치로 확신한다면, ‘제가’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의사결정을 가족 전체의 의견을 공평하게 반영하고 균형 있게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혈연적 동질성과 생활공동체로 함께 살아온 경험 속에서 형성된 애정과 신뢰, 그리고 그 구성원 사이에 기회와 권리 책임과 의무의 공정성과 균형성을 의미하는 齊家의 조건 속에서, 한 가족은 진정한 의미의 가족의 화목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가족은 그들 사이의 불화와 갈등을 해결하는 데 힘을 낭비하지 않고, 도리어 그 화목에서 형성된 강력한 힘으로 그 가족이 성취하고자 하는 소망을 이룰 수도 있고, 그 가족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周易에

‘두 사람이 한 마음이면 그 예리함은 쇠도 자를 수 있으니, 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말은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두 사람만으로도 그러한데 하물며 온 가족이 한마음으로 합심하는 것이겠는가? 어떤 목적인들 이루지 못하겠으며, 어떤 문제인들 해결하지 못하겠는가? 만에 하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 해도, 그 한 마음 되어봄과 화목 속에서 그 가족의 삶은 이미 충분하게 향기롭고 행복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여전히 나는 ‘家和萬事成’을 되뇌어본다.

나의 가족과 우리 연구소의 회원님들 모두의 가족과 특히 IMF 이후 더 힘들어진 모든 분들의 가족이 화목으로 소망을 성취하고 아픔을 이기기를 마음속으로나마 기원해본다. 그래서 그 힘이 우리 사회의 힘으로 모아지고, 민족의 힘으로 모아지고, 인류의 힘으로 모아지기를 기대해본다. 가족의 대동단결만세. 양심의 대동단결만세. 민족의 대동단결만세. 인류의 대동단결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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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한문 학습자를 위한 보충

‘和’는 본문에서 설명한대로 ‘서로 호응한다’는 의미의 ‘相應’을 의미하고, 이것은 주로 음악에서 하모니를 의미하는 것이다. 구조적으로는 노래가 나오는 기관인 입을 표현한 形部의 ‘口’와 이 글자의 발음을 표현한 聲部의 ‘禾’가 결합한 形聲字로 이해한다. 다만 많은 형성자가 동시에 會意를 겸하는 예와 같이, 이 글자도 會意字로 이해할 수 있고, 이 경우에 의미가 더욱 다양해진다.
‘벼화’로 읽는 ‘禾’는 본래 지금의 쌀[米]을 생산하는 벼를 표현하던 글자가 아니라, 벼가 있기 이전에 초기 곡식인 ‘기장[粱]’을 표현하던 글자였다. 곡식의 줄기와 뿌리 그리고 이삭을 그린 이 글자는 뒤에 모든 알곡을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의미로 쓰여, 곡식을 표현하는 글자들의 部首가 되었다. 본래 지금의 벼는 시기적으로 다른 곡식들보다 늦게 경작하였는데, 이를 표현하는 글자는 ‘稻’이다. 다만 후기에 와서는 벼를 의미하는 글자로 이 두 글자가 혼용되었다.
‘和’를 벼와 입의 회의로 이해할 때, 그 의미는 우선 ‘잘 맞는다.’ 또는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니, 모든 음식 가운데 벼가 사람에 입에 가장 잘 맞는다는 의미이다. 결코 새삼스럽게 쌀 소비를 부축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쌀밥이 최고이다. 그것은 쌀의 기름짐과 부드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甘味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감미가 있기에 쌀밥은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으며, 더욱이 어떤 반찬과도 잘 어울린다. 그래서 또 어울림이 화이다. 음식의 단맛은 모든 맛을 내는 바탕이다. 그것은 마치 흰 바탕의 종이가 어떤 색깔이건 잘 받아들여 드러내주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옛 분들이 ‘단맛의 바탕 위에서 어떤 맛이건 내는 요리를 할 수가 있고, 흰색의 바탕 위에서 채색이 가능하다(甘受和 白受采)’ 한 것이니, 여기에서 和는 다시 요리하고 간맞춘다는 의미가 생긴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 것이지만, 이것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平和가 있는 것이 아닐까? 옛말에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君 以民爲天 民 以食爲天)’ 하여, 먹거리를 ‘하늘의 하늘(天之天)’이라 하였으니,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평화 그 자체가 아니었겠는가?
‘齊’는 본래 곡식의 이삭들이 가지런하게 피어나는 것을 표현한 글자이다. 본문의 제가는 바로 이 가지런한 평등과 균형의 의미를 쓰고 있는 것이다. 농사를 짓지 않는 나도 가을의 황금벌판을 바라보면, 공연히 가슴이 뿌듯하고 여유가 생긴다. 그러니 직접 농사를 지은 분들이야 잘 자라준 자식들을 보는 것만큼 흐뭇하지 않겠는가? 애써 지은 작물을 갈아엎는 아픔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내 어머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에 의하면, 농사짓는 사람이 가장 기쁠 때는 추수철이 아니라 이삭이 피어날 때라고 하셨다. 무더운 여름 햇살이 조금씩 걷혀가면서 온 벌판의 벼줄기마다 다함께 이삭을 피워 올릴 때를 ‘대동맞이 철’이라 한다고 하셨다. ‘가지런할 齊’자는 바로 그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었을까? 이 글자를 만든 사람의 희열과 감동이 어렴풋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