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새롭게 읽기


      ‘배움이 기쁘다’는 거짓말, 아니면 참말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論語 學而篇 1장)

공자가 말하기를, “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역시 기쁘지 않겠는가?” 하였다.


 孔子나 論語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대부분 이 구절에 대해서는 한번쯤 들어본 기억이 있고, 그 의미도 대충 알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신라 향가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양주동 선생이 말한 대로, 이 구절은 ‘그처럼 유명한 책의 첫머리의 그처럼 유명한 사람의 말로는 오히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무미건조하게 들린다.

 이 글이 무미건조해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배우고 익히는 것, 즉 간단하게 말해서 학습은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겉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을 도덕적 설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이런 무미건조한 도덕적인 설교에 진저리를 낸다.

 우리가 일상의 대화 속에서 누군가가 ‘입바른 말’을 하면 얼마간의 냉소적인 의도를 담아 ‘공자님 말씀하고 있네’ 하듯이, 공자의 말은 우리에게 당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대인처럼 당위를 거의 실천하지 못하여 속으로 주눅들어온 사람들에게 그런 당위적은 말씀은 짜증나는 것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찔리는 것이다. 

 이런 심정에서야 누군들 ‘공자님 말씀에’ 대해 야유를 하고 싶지 않겠는가? 더욱이 그런 말씀을 묵묵히 실천하는 사회적 ‘범생이’에 대해서는 야유를 넘어서 증오심이 생기기도 할 것이다. 전국의 수백만의 아이들에게 이런 당위적인 내용을, 그것도 천편일률적으로 강요해온 교육이 서태지로부터 ‘됐어, 됐어’ 하는 야유를 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학습이 기쁘다니, 모든 시대에 모든 학습자들에게 물어 보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에 있는가? 언어는 인류가 찾아낸 위대한 자기표현의 방식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공감을 얻기를 추구하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 유명한 논어 첫머리에 위대한 성인이라는 공자의 말은 아무도 머리를 끄덕여 공감하지 않는 독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공자는 ‘배우기를 좋아했다’ 하고, 그 제자 가운데서는 顔回라는 제자가 배우기를 좋아하여 공자의 칭찬과 총애를 독점했다고 하지만, 삼천 명이라고 전해지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그것도 ‘즐거운 것’이 아니라 ‘좋아한 것’ 뿐이니, 이 말은 애초부터 공감 따위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이 말이 그렇게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회자된 것은 누군가는 이 말에 나름의 공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보다 더 도덕적이고 거기에다가 이론적이기까지 해서, 요즈음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조롱을 당하는 朱子가 이 말에 공감하여 해석한 내용을 따라가 보자.

 우선 이 말의 첫 글자로 우리가 배움이라고 해석하는 ‘學’자를 주자는 ‘效’, 즉 본받기 또는 흉내내기로 풀이하였다. 배움은 무엇인가를 흉내내는 모방일까? 인간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모방이란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고, 본받기는 그 말 자체가 더욱 속이 뒤집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 흉내내기를 하는 것은 이 흉내내기의 배움이 스스로를 성장시켜주기 때문이다.  

 다만 이것은 배움이 흉내내기나 본받기에 그친다는 의미는 아니고, 거기에서 시작한다는 의미이다. 中庸에 의하면, 배움은 적어도 다섯 단계를 거쳐야 참다운 배움이 된다. 그것은 흉내내기(學) - 질문하기(問) - 생각하기(思) - 판단하기(辨) - 실천하기(行)이다. 흉내내기는 널리 본받아 흉내내야 하기에 博學이 중요하고, 질문하기는 치밀하게 물음을 내야 하기에 審問이 중요하고, 생각하기는 독단과 맹신을 피해 신중해야 하기에 愼思가 중요하고, 판단하기는 실천의 근거로 사실과 가치에 대한 명백한 결론을 내려야 하기에 明辨이 중요하고, 실천하기는 굳센 의지를 수반하여 지속적이어야 하기에 篤行이 중요하니, 이 다섯 가지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제대로 배운 것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學問이라고 말하는 용어는 바로 이 가운데 처음의 두 가지, 즉 박학과 심문에서 학과 문을 따다가 그 전체를 대표하는 말로 쓴 것이다.

 다만 널리 흉내내기의 박학은 ‘널리’라는 영역적인 다양성을 중시한 것이지만, 그것이 팔방미인 식으로 이것 저것 대충 대충 배우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한 가지를 흉내내서 배움에는 그것이 완전히 내 것으로 체득될 때까지 반복적인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익히기를 의미하는 ‘習’이다. 그래서 이 글의 첫 구절은 ‘무엇인가 자기의 성장을 이룰 수 있는 학습의 내용을 우선 흉내내보고 그것을 때때로 반복하여 훈련하면’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 ‘習’이라는 글자는 본래 새의 날개를 의미하는 깃우[羽] 자와 하루하루를 의미하는 날일[日] 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옛날 이 글자를 처음 만든 사람들이 어린 새끼 새가 어미 새가 나르는 모습을 보고 흉내를 내서[學] 매일 연습[習]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연습을 통해서 익힘’의 의미를 표현하는 글자로 만든 것이다. 결국 ‘학습’이란 흉내내기와 그 반복적인 연습의 결합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자의 해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습은 기쁜가?’를 물으면, 아무래도 그 답은 ‘아니다’일 것이다. 흉내내기는 자존심이 상하고 반복적인 연습은 지루한데, 누가 그것을 좋아할까? 혹시 성적의 결과가 좋아서 그 뒤의 공부가 즐거울 수도 있고, 배우는 내용이 적성에 맞아서 수업 시간이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 자체가 즐겁고 기쁜 것은 매우 드문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공자는 태연히 강조법을 써서 ‘역시 기쁘지 않겠는가?’ 하고 시치미를 뗀다. 이것을 이해하는 비밀은 역시 그 드러난 말밖에 있다.

 새끼 새의 이야기를 더 해 보자. 새끼 새가 어미 새가 나는 모습을 흉내내어 어느날 드디어 어미 새처럼은 아니라도 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우선 그것은 본능의 힘일까, 아니면 학습의 결과일까를 생각해보자. 그 답은 아마 본능의 가능성이 학습을 통해 드러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본능을 가진 새끼 새도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날지 못하고, 나는 본능이 없는 인간은 연습해도 날지 못한다. 그래서 오랜 세월 그 비상을 선망해 온 인간은 새를 흉내낸 비행기를 만들었다.) 사족이지만,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아마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해석 과정에서 숨겨져 있는 중요한 것은 새끼 새가 난 능력 즉 힘을 학습을 통해 얻었다는 것이다. 이 힘은 새끼 새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그에게 닫혀 있던 세계인 창공이 그의 세계로 열렸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그가 자유롭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공자의 ‘학습이 즐겁다’는 두 구절 사이에 숨어있는 비밀은 바로 이 힘과 그것이 주는 자유가 그 학습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것은 학습과정 자체가 아니라, 이 학습을 통해서 체득한 힘과 그 힘이 주는 자유가 즐겁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는 그 속상하고 지루한 학습의 과정조차도 역시 즐거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공자의 말을 다시 읽어보자. 우선 그것을 짜증나는 당위의 설교로 받아들이지 말자. 그것은 공자가 공자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고 그 만큼의 자유를 얻었던 역사적인 체험들을 확인했고, 이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그 자신도 역시 학습을 통해서 힘을 획득했으며, 그 힘만큼 그가 자유로웠던 희열의 체험을 표현한 것이다.

 아마 그 마음속에 이 말에 대한 공감과 공명을 기대하면서 속삭인 것이다. 우리 함께 진정한 희열을 느껴보지 않겠니? 우리 함께 진정한 자유를 누려보지 않겠니? 그리고 이 체험을 공감하고 공유한 사람들은 짜증내지도 않고 야유하지도 않으며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다.

 이미 눈치를 챈 분도 계시겠지만, 이 짧은 한 구절을 누군가가 소설로 썼다. ‘갈매기의 꿈’이라는.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갈매기 리빙스턴은 그 공감을 널리 찾는 것을 너무 쉽게 포기하고 너무 좁게 제한했지만(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공자는 우리가 보통 느끼듯이 당위로 강권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이 희열과 자유를 누리기를 믿고 기다려준다는 것이다.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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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10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문 학습자를 위한 보충

‘亦’ 자는 원래 가운데 부분은 사람을 그린 것이고, 양쪽의 점은 겨드랑이 부위를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본래의 의미는 겨드랑이이다. 그런데 겨드랑이는 한 쪽에 있고 ‘또’ 한 쪽에 있어서, ‘또’라는 의미가 생긴 것이다. 이것을 본래의 의미에서 부연한 의미라는 뜻의 引伸義라고 한다. 그것은 ‘又’ 자도 같다. 이 글자는 사람의 손을 그린 글자이다. 본래 손을 그린 ‘手’ 자는 다섯 손가락을 모두 그린 것인데, 이를 줄여서 세 가락만 그린 것이 又이다. 이는 손 수 자의 부수의 약자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손도 역시 왼 손과 오른 손 둘이 있어 ‘또’ 하나가 있기 때문에 ‘또 우’ 자가 된 것이다.

다만 이 구절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듯이 亦을 ‘또한’이라고 해석하면, 그 문장의 의미에서 약간 어긋난다. 그것은 또한 보다는 ‘역시’로 하는 것이 옳다. 물론 ‘또한’과 ‘역시’는 같은 의미를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역시’를 한자로는 ‘亦是’로 쓰는데, 이 경우 ‘亦’ 자에는 ‘是’의 의미 즉 ‘당연하다’ 또는 ‘옳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역시 기쁘지 않은가?’ 하는 말은 ‘기쁜 것이 당연하다’는 의미의 강조적인 표현이다.

說은 크게 ‘말할 설’, ‘기쁠 열’, ‘달랠 세’의 세 가지 음과 의미를 표현하는 글자이다. 이렇게 한 글자에 여러 의미와 발음이 생긴 것은 초기에 문자가 부족하여 한 글자에 여러 음과 의미를 담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많이 쓰이는 음과 의미에 대해서는 후세에 다른 글자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위의 글에서 쓰인 ‘기쁠 열’의 경우 후세에서 ‘悅’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져 쓰인다. 다만 경전을 예전 분들이 신성시했기 때문에 함부로 고치려고 하지 않아 이 글에는 여전히 說자를 쓰는 것이다. 이 때 說을 古字라하고 悅을 今字라고 한다. 주자는 이 說을 인간 내면에서 솟구치는 희열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