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름대로 시원한 여름을 나고 있었나보다. 지난 금요일 공주 한낮의 최고 기온이 36도까지 올라갔다고 뉴스에서 본 그날도 동학사 앞 민박집에서 시원하게 잠들었고 토요일은 또 에어컨 있는 모텔에서 잤기 때문에 그리 더운 줄 몰랐는데 어젯밤에 정말 더웠다. 비전하우스 내 방은 해질녁 빛을 받는다. 밤엔... 덥다. 피곤했는지 11시쯤에 잠이 들었는데.. 여느 때 같으면 7시까지는 문제 없이 잠들 수 있는데 세상에 5시 반에 눈이 떠졌다. 그리곤.. 잠이 안 온다. 일어나 씻었다. 시원한 도서실로 피서라도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수업도 10시 50분에 시작이니!

온통 안개 자욱하다. 금강 때문인지 공주엔 의외로 안개 짙은 아침이 잦다. 비전하우스 뒷길, 작은 산책로를 따라 중앙도서실 6층에 도착! 그/러/나 피서를 즐길 수는 없었다. 에어컨 고장. 그냥 묵묵히 앉아 책을 봤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시험도 시작될 것이고 과제도 몇몇 나왔는데 도통 교재는 손에 잡히지 않고 한비야씨의 [중국견문록]에만 맘이 간다. 3/4를 읽고. 흠... 교재도 한 번 봐줘야겠지. 이리 저리 책장만 설렁설렁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잠이 온다.

오늘 수업은 김진두샘의 '한문소설-萬福寺樗蒲記'이다. 남원에 양생이라는 서생이 살았는데.... 어쩌구 저쩌구.. 점심 먹고 오후 백원철샘 시간엔 탁본을 했다. 8명 한 조로 나누어 박물관에서 빌려온 백제벽돌 모조품으로. 순서는 대략 이렇다.

1. 닦나무로 만든 화선지를 매끈한 쪽을 위로해서 벽돌 위에 깔고 테이프로 잘 고정시킨 후 분무기로 골고루 흠뻑 물을 뿌린다.

2. 적당히 젖은 수건으로, 처음엔 + 방향으로, 다음엔 *방향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마른 수건으로 한 번 더 꼼꼼 닦는다.

3. 엠보씽 없는 화장지를 젖은 화선지 위에 깔고 그 위에 마른 화선지를 깐 다음 옷 솔, 구두솔 같은 물건으로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부드럽지만 강하게 두드린다. 이때 솔과 화선지는 직각을 유지해야 종이가 찢어지지 않는다. 간간히 확인하여 탁본할 종이가 전체적으로 골고루 말라 흰색이 돌면 화선지와 휴지를 걷어낸다.

4. 먹봉은 두 개가 필요하다. 큰 먹봉에 먹물을 흠뻑 묻힌 후 오른 손에 든 작은 먹봉으로 큰 먹봉의 먹물을 찍는다. 작은 먹봉으로 탁본을 해야하지만 작품에 먹봉을 두드리기 전에 연습용 화선지에 몇차례 두드려 농담을 조절해야한다. 처음부터 너무 진하게 두르리는 것은 좋지않다. 차라리 연하게 처리하면 몇 번 더 두드려 짙게 할 수 있으므로 실패 확률이 줄어든다. 가운데에서 가생이로 톡톡톡 골고루 정성스럽게 처리한다.

5. 먹봉은 예전에는 좁쌀 등을 넣어 만들었지만 허드렛 양말이나 솜, 잔잔한 톱밥 등으로 안을 처리하고 먹을 많이 먹는 먹봉엔 비닐처리를 해주면 적당한 먹의 양을 유지할 수 있단다. 다 쓴 먹봉은 먹이 말라 딱딱해지기 전에 물에 불려낸 후 안에 남은 먹까지 쳐내서 볕에 말리면 반 영구적으로 사용가능하단다.

우리 조는 처음 두 번까지는 너무 진하게 작업해서 실패, 세번 째 작품을 제출했다. 다른 조 샘들이 다들 '너무 잘했다'고 칭찬해서 다들 기분 좋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작은 전각 작품도 두 개 해서 책에 끼워두었다. 코팅해서 책갈피로 써야지.

아이들에게 이런 수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먹봉을 직접 만들어야하고, 무엇보다도 탁본할 작품이 없다. 작은 전각작품 같은 것이 열 개 정도는 있어야할 것 같은데... 중국 가면 구할 수 있을텐데... 아쉽다.

저녁 먹고 도서실. 여전히 비야언니 책만 눈에 들어온다. 쉽고 재미나게, 솔직하고 맛깔스럽게 참 잘 쓴 책이다. 요즘 월드비젼 긴급구호활동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빨리 나으시라 기도하는 맘으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를 담번 독서목록에 올렸다.

도서실 6층을 고집하는 이유는 전망이 좋아서다. 다른 층의 책상은 좌우가 막혀있어 창밖의 풍경을 볼 수 없다. 이곳에선 저 멀리 계룡산자락, 금강, 공주 시내가 서로서로 들락날락 눈에 들어온다.

7시15분!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더니 벌건 해가 산 머리에 걸렸다. 얼른 일어나 맞은 편 빈 자리로 옮겨앉았다. 소행성 612호의 어린 왕자는 마음이 외롭고 슬플 때 의자를 옮겨가며 하루에 수십 번 지는 해를 바라봤다고 한다. 마음이 외롭고 슬플 때, 해를 바라보는 건 도움이 된다. 아니, 도움이 안 된다. 더 맘이 짠해지기도 한다. 레바논, 민주노총, 성과급투쟁... 태양은 매일 저렇게 화려하고 이쁘게 져도 되는 걸까? 나는 저 태양을 바라보며 싸구려 감상에 젖어도 되는 걸까? 아니 그런 '큰 일'보다... 이제껏 살아오며 남에게 상처주고 또 그러면서 상처받고... 좁아터진 내 심보가 더 돌아봐진다. 타고난 맘그릇 좁아터졌지만 하루하루 다듬어 조금씩 키울 수 있을까? 그래, 어쩌면 저 태양.. 내일, 내달, 내년엔 못 볼 지도 모르는데.. 유한한 삶과 예정된 죽음을 늘 염두에 둘 일이다. 늘 감사할 일이다.

순식간에 태양 떨어지자, 세상 농담이 벌써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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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8-07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비야 언니 왈" 세상에 무엇인가를 매일 하는 것처럼 무섭고 힘센 것은 없다" 이 글을 읽는 순간, 그래 수업 열심히 듣자.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그저 현재를 충실히 살자. 그리곤 아이들이 생각나서 문자를 넣었다. 비야언니의 말과 함께 "샘도오늘부턴 열공할테니느들도홧팅" 생각해보니 방학 한 가운데 서있다. 노는 것도 열심, 주어진 시간 안에 공부도 열심. 해야겠다. 이거 내가 버리려 했던 '범생기질로의 복귀' 아닌가?

해콩 2006-08-07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후배 이태ㅎ가 왔다. 동기 배부ㄱ를 위해서겠지만 간만에 만나니 반갑고 좋다. 너무 빨리 일어난 게 맘에 걸리지만 '과' 활동을 대충대충한 나로서는 별로 나눌 이야기도 없고... 암튼 살아 있으니 다 만나네. 주위 사람들을 귀하게 생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