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폭력적 태도로 으시대는 승리자의 축구
월드컵 1차전에서 토고에게 2:1로 이긴 후 한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통쾌’한 승리라고 열광한다. 하루 종일 어젯밤의 축구 승전보로 텔레비전 화면이 정지되어 있다. 어느 스포츠 종목이든지 승리의 기쁨은 다 같다. 게임에 이기기 위하여 경기장에 나서는 것이지 지기 위하여 입술 꽉 다물고 경기장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어차피 치러야할 게임이라면 이기는 것이 좋다. 그동안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준비한 시간과 노력의 땀방울의 대가로 주어지는 쾌감은 고대 원시의 사냥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존을 위한 먹이 사냥. 직립보행을 시작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로부터 사냥은 가열차게 속도감을 높였다. 그 후 인간은 악전고투 끝에 싸움에서 ‘이긴 자’가 차지하게 되는 권력과 명예의 질량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했다. 인간이 단순히 먹이 사냥에만 머물지 않고 육체적 운동 경기로 시합을 벌이게 된 것은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권력과 부와 명예의 영역이 얼마나 깊고 넓게 존재하는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속 98km로 달리는 아프리카 가지뿔 영양을 잡는 대신에 축구공을 차며 달린다.
요즘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있어 일반서적을 전혀 읽지 못한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공부에 ‘요령’이 없다보니 머리가 아프다. 그럴 때마다 국악방송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놓고 듣는다. 오늘 오전 11시경의 일이다. 방송에서 어젯밤의 승전보를 재탕하는 여자 진행자의 부드러운 말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애국가가 두 번 울려 나올 때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 때 이길 것이라고 예감했다. 운동복도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모른다. 토고 선수들이 자꾸 불쌍하게 보였다. 운동복도 조잡하고 선수들도 이상하게 생겼다. 우리 선수들 모두 너무 잘 생기고 스폰도 최고였다고 본다.” 나는 서둘러 발작적으로 마우스를 끌어와 라디오 방송을 닫았다.
여자 진행자의 맨트는 작가가 써 준 대본에 의한 낭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폭력적 우월감을 마음껏 드러낸 승리자의 거만함을 으스대는 철없는 방송작가의 모습이 종일 안방에서 왕왕대는 공중파 방송의 진행자들과 다르지 않다. 투견장에서 이긴 개의 모습으로 오만가지 다 끌고 나와 승자의 쾌감을 즐기는 저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10분에 11.2km나 냅다 달리는 아프리카 가지뿔 영양을 사냥하는데 성공한 사냥꾼은 마을로 돌아와 무용담을 계속한다. 사실은 몸무게가 100kg이나 나가는 수컷 마운틴고릴라가 나를 노려 보길래 총을 겨눴다가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봐줬다로 시작한다. 이야기는 여차저차 가지뿔 영양을 잡았지만 무리에서 떨어진 사자를 잡으려다가 고기가 맛없어 보여 포기했다는 진도까지 나아간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구에서 가장 빠른 영양 한 마리를 잡았다는 명예를 무슨 수로 상승시킬 것인가.
월드컵이 열리기 얼마 전 토고의 한 선수가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게 6:0으로 이겨서 수치심을 안겨 주겠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한국인들은 다시 들끓어 왕왕댔다. 그런데 토고선수의 이런 발언이 나오기 직전에 나는 한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었다. “아프리카 축구는 다 거기서 거기”덧붙여서 토고의 1인당 GNP와 경제수준, 토고 축구협회의 엉성한 내분(대통령 동생이 축구협회장)이라는 기사를 쓰면서 3일에 한 번씩 대통령이 바뀌는 아프리카의 열악한 정치상황까지 비하했다. 한마디로 토고라는 한 국가의 국가통계 지수를 월드컵의 목전에까지 바짝 끌고 나와 까발리면서 ‘하위적 열등’의 존재로 토고를 비웃었다. 경제적 수준을 기준으로 삼고 불안한 정치적 상황을 축구공에 질긴 끈다발로 연결짓는다.
오늘 내가 들은 방송의 진행자 맨트 또한 그 기자와 다르지 않다. 애국가가 두 번 울리는 것에 긍지를 갖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것이 상대방의 비통함을 동반하는 일에 기뻐하는 일이라면 불타는 로마시내를 내려다보며 ‘황홀하게’ 여기는 눈물을 흘린 폭군 네로의 심장과 너무 닮아 있다고 본다. 운동복이 한국선수보다 품질 면에서 뒤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잘 싸워준 토고 선수들이 더 대단하지 않을까.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발언 앞에서는 신이 인간에게 말하는 주둥아리를 만들어준 일이 실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누런색의 한국인의 피부도 이상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오늘 내가 만난 이런저런 글과 말 중에서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는 온갖 억지와 편협한 자유분방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승리자의 축배를 드는 일에 패배자의 굴욕감을 재차 확인하는 일도 모자라서 인종적, 국가적, 경제적, 나아가서는 인권적인 모욕감까지 양념으로 삼는 일. 한국인의 폭력성에 갑자기 씁쓸해진다.
말이 여기까지 나왔으니 한 마디 하자. 한국축구는 토고를 만나 결. 코! 잘 하지 못했다. 토고의 아데바요르나 쿠바자같은 포지션이 FW인 선수들의 돌진은 무서웠다. 한국선수들이 좌우로 공을 돌리는 편에 반해 토고선수들은 공을 잡으면 무조건 전진이었다. 나아가는 것, 공을 차면서 앞으로 뛰어 달려가는 것이 축구라면 한국 선수들이 어설픈 패스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안정적인 빈틈만 찾으려는 것에 반해 모험과 도전의 무모함으로 달리는 토고선수들의 축구가 나는 더 재미있었다. 그들에게선 탄력적인 ‘야생 축구’가 분출되고 한국선수들은 계산된 ‘기술 축구’가 주 특기다. 더구나 후반 27분 터진 안정환의 중거리 슛으로 2:1로 역전한 상황이 벌어진고 나서 그 후부터 한국 축구는 실망 그 자체였다. 승리를 굳히려는 작전이었는지 선수들은 백패스로 시간을 끌었다. 얼마나 백패스를 즐겼는지 세 번이나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지구상에서 축구장에서 백패스를 기꺼이 즐기는 국가는 한국 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욕까지 했다. 응원을 하면서 목이 쉰 사람이 있는 판국에 자국의 축구 선수를 욕하면서 목이 쉬는 경우도 흔치 않다. 세상에 열성분자인 내가 이렇게 변절하다니!
1인당 GNP가 2만 불 수준인 국가의 축구가 더 나은지, 330달러의 국민 소득 수준의 축구가 더 나은지 모르지만 토고 선수들의 빠른 스피드와 돌파력은 한국을 압도했다. 토고 선수들이 끝까지 축구공을 놓지 않은 이유가 패자의 위치였겠지만 승리를 굳히기 위하여 시간 지연작전으로 일관한 듯한 후반 20여분은 한국 축구 팬으로서 내가 계속 남아야 하는 것인가 회의를 갖게 한다. 축구는 세계를 지배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언어의 폭력으로 축구를 지배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된 어제 오늘, 승리는 했지만 기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