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은 중국 등짝 후려친 ‘세계화’ 보았을까
베이징역 근처 세계공원을 찾았다 50개국 명소의 ‘짝퉁’ 100여개 모아둔 곳
‘먹가이버 칼’처럼 조악하지만 세계를 복제한다는 건 가히 중국적인 생각
‘가짜를 진짜로 여길 때 진짜 또한 가짜’ 홍루몽의 ‘태허환경’ 속에 빠지네
한겨레
» 세계 50개국 100여 곳 문화유적과 자연경관 ‘짝퉁’들을 모아 놓은 중국 베이징 세계공원. 2001년 9.11 자폭공격으로 무너져 지금은 없어진 뉴욕 맨해턴의 세계무역기구 쌍둥이 빌딩이 여기에선 건재하다. 물론 축소판이지만, 그 뒤에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도 보인다.
  기획연재 :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①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에 이어 황희경 영산대 교수의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이 ‘와다 하루키 회고록’과 함께 격주로 번갈아 연재됩니다. 중국의 현대사상사와 지식인 담론에 각별히 주목하면서 고대중국을 포함한 중국문화 전반에 대해 호기심을 번뜩이고 있는 황 교수의 글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중국의 실체에 깊숙이 접근해갈 것입니다.

베이징 역 근방에서 744번 버스를 타고 찾아 나선 곳은 제왕의 기운이 충만한 고궁이나 천안문 광장도 아니고 소박한 기풍이 넘쳐나는 후퉁(골목)도 아닌 세계공원이었다. 아침부터 여행 안내책자에도 잘 나오지 않는 곳을 굳이 찾아갈 생각을 한 것은 그 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얼마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의 제목도 ‘세계’였다. 그것은 이른바 ‘지하 영화’(underground film)를 대표하는 지아장커의 작품으로, 세계공원에서 경비원과 댄서로 일하는 두 남녀의 음울한 애정 이야기를 통해 급속한 현대화의 길을 걷고 있는 현대 중국이 맞닥뜨린 곤경을 우화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아주 인상 깊게 보았는데 듣자하니 이번에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아장커는 지난해 해금되어 처음으로 ‘지상’의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개봉할 수 있었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고 한다. 아무튼 나에게 무한경쟁과 휴식을 연상시키는, 그래서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세계와 공원이 만난 세계공원을 찾게 만든 것은 그의 ‘세계’였다. 또한 언제부터인지 세계화니 글로벌 스탠더드니 세계무역기구니 온통 세계가 문제되고 있으니 이 ‘세계’를 알긴 알아야 했다.

초행길인지라 한 시간 넘는 시간이지만 지루한 줄 모르고 차창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베이징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다. 와호장룡의 도시답게 베이징은 ‘세계’를 자신의 서남쪽 구석에 숨겨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예전에 이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관원에 와본 기억이 떠올랐다. 대관원은 중국 고전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홍루몽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살던 곳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가짜(미니어처)라고는 하지만 ‘세계’를 복제해놓다니 그 발상이 가히 중국적이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일찍이 천하를 자임했던 청 왕조 때에 원명원 안에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서 서양루(西洋樓)라는 건축물을 만들어 놓은 적도 있었다. 아편전쟁 때 영불연합군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잔해만 뒹굴고 있는 폐허가 되었지만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있다고 한다.

천하 개념 바꿔서라도 천하 유지

» 베이징 천안문 광장.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 양쪽에는 ‘세계인민 대단결 만세’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라는 구호판이 걸려 있다.
세계공원은 46만7천㎡에 달하는 면적에 거의 50개 국가의 100여 곳의 유명한 문화유적과 자연경관의 ‘짝퉁’을 모아놓은 곳인 데 1993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에펠탑과 개선문, 영국의 빅벤, 런던 브리지, 오스트리아의 슈테판 대성당,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러시아의 붉은 광장, 그리고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등 누구나 가서 한번쯤 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있었다. 심지어 9.11로 사라진 뉴욕 맨해턴의 쌍둥이빌딩도 있었고 이라크의 바빌론문(이슈타르 여신의 문)도 있었다.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누는 아이 동상 같은 것은 작기 때문에 실물 크기 그대로 복제해놓았지만, 에펠탑은 10분의 1로, 이집트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은 25분의 1로 축소해놓는 등 축소의 비율은 일정하지 않았다. 에펠탑이나 노트르담 사원과 같은 것들은 꽤 근사했지만 대체로 조악하기가 ‘먹가이버’ 칼 수준이 많았다. 하지만 조악하나마 이렇게 ‘세계’를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대면할 생각을 하는 것이 중국이 아닐까, 아니 중국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아닐까 생각하노라니 도리어 흥미롭게 여겨졌다. 전통중국은 늘상 천하를 자임하다가 새롭게 강력한 타자가 나타나면 천하 개념의 조정을 통해 그 천하를 유지해오지 않았던가. 어떤 이는 중국을 “민족국가의 자칭한 하나의 문명”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짝퉁이라지만 언제 다시 이렇게 ‘세계’를 한 눈에 볼 기회가 있으랴 싶어 하나 하나 살펴보니 모르는 것들도 많았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모두 유명한 것들이었다. 역시 세계는 넓었다. 나 자신 지구 촌놈임을 새삼 깨달았다. 이른 봄의 주말이었기에 유람객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아주 적지도 않았다. 외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가짜 오대양 육대주이긴 하지만 이곳을 거닐자니 도리어 “가짜를 진짜로 여길 때 진짜 또한 가짜이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여길 때 있는 것 역시 없는 것이니라”의 홍루몽의 ‘태허환경(太虛幻境)’에 빠져 진짜세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그리고 세계가 온통 주목하고 있는 중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의 끝은 어디일까.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런 저런 상념을 하면서 저 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그리스 로마를 거쳐 유럽을 돌아보고 다시 북미대륙으로 갔다가 아시아로 돌아오는데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만 나에게 세계공원은 식전경이었다. 이제 점심을 해야 했다. 아무리 대충이지만 반나절 만에 세계를 훑자니 배가 고팠다.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공원을 나와 근처 식당에 들어갔다. 대충 지저분하고 왁자지껄한 아주 전형적인 중국의 보통 식당이었다. 물만두를 시켜놓고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변했고 또 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중국이라고. “유감스럽게도 중국에서는 변화가 대단히 쉽지 않습니다. 책상을 하나 옮긴다든지 난로를 하나 바꾸는 일조차도 피를 흘리다시피 해야 합니다. 더구나 피를 보고 나서도 옮기거나 바꾸는 일을 꼭 성사시킨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은 아주 커다란 채찍이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 한 자기 스스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채찍은 언젠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건 별 문제이지만 틀림없이 오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라고 루쉰은 말한 적이 있다. 베이징 역에서 마주친 피곤에 쩐 민꽁(民工: 대도시로 유입되어 각종 노무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변두리로 접어들면서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 옛 모습들 때문인지 모르지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쉰은 다시 살아 돌아와서 격변하는 중국을 목도한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세계화의 채찍이 중국의 등짝을 후려쳤기 때문에 이제 변하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변치 않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과연 변하는 것은 무엇이며 변치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편전쟁 패한 뒤 열국 자각

천하를 자임해 왔던 중국. 그 중심에 문화적인 중국이 있고 주변에 번국(藩國)이나 교화 대상인 이른바 네 오랑캐 즉 남만(南蠻)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융(西戎)이 있다는 천하관을 견지해온 나라. 어느 나라건 자기중심적으로 세계를 묘사하기 마련이지만 중국의 이러한 천하관 혹은 화이관념(華夷觀念)은 단순한 허장성세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지리적 실체감을 동반한 것이었기에 상당히 강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은 서양이라는 강력한 타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아편전쟁에서의 참담한 패배는 중국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전통적인 천하관에 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천하는커녕 열국 중에 하나의 나라, 그것도 강한 나라가 아님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이제 근대적 민족국가로 거듭나야 했다. 하지만 중국의 현대화란 루시앙 파이(Lucien Pye)의 말처럼 거대한 하나의 문명체계를 민족국가인 것처럼 만드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중국은 20세기에 신해혁명, 국민혁명, 공산혁명, 문화대혁명 등 많은 혁명을 겪어야 했으며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을 치러야 했다.

»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보통국가’였다면 감내할 수 없을 이러한 엄청난 격동을 수용해냈다는 점에서 중국은 크고 넓은 나라다. 이것은 단순히 땅덩어리가 넓고 큰 문제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저력이 있었기에 개혁 개방 20여년만에 세계가 주목하는 급부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편 경제 개혁의 와중에서 세계로 진입한(2001년에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것을 중국에서는 ‘입세=入世’라고 부른다) 중국은 만리장성도 날려버릴 세계화의 거센 바람 앞에서 사회적 분화와 갖가지 모순으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돌아오는 길에 천안문 앞을 지나면서 차창에서 마주친 마오쩌둥 초상화는 ‘중화인민공화국만세’와 ‘세계인민대단결’이라는 편액 사이에서 말없이 중국과 세계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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