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말 ‘대략’난감 엄마 아빠, ‘열공’하삼
한겨레
요즘 프랑스에서는 청소년들의 말을 어른들 눈높이에 맞춰 해설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다. 일본 엔에치케이(NHK) 방송에도 청소년들의 말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있다. 미연방수사국(FBI)에서는 청소년들을 강사로 초빙해 수사관들을 대상으로 십대들의 말을 해설하는 특강을 열기도 했다. 한국 땅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방송에서 방영하는 <상상 플러스> ‘세대 공감 올드 앤 뉴’는 현재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세대 간 소통 불능의 현실을 한 눈에 보여주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유사 이래 세대 간 언어 격차가 가장 큰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상상플러스> 이세희 피디는 제작 현장에서 어른들의 말과 청소년의 말을 두루 접하면서 느낀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물론 부모 세대도 청소년기 그들만의 은어나 비어, 속어를 즐겨썼던 경험이 있고, 시대를 대표하는 ‘추억의 언어’ 한 두 개쯤은 간직하고 있다. 3~40대라면 ‘따봉’이니, ‘웬일이니’ 같은 유행어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청소년들은 신조어를 끊임없이 복제·재생산해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기존 단어를 전복하거나 문법 체계까지 뒤집어, 어른들이 근접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언어 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어른들에게는 ‘외계어’로 들릴 법한 청소년말의 탄생은, 물론 인터넷과 휴대전화 보급률이 높아진 덕분이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대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기분을 상대방이 ‘눈’으로 볼 수 있게 표현해야 한다. 이세희 피디는 이런 상황이 “구어와 문어의 경계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간추린다. 입과 손이 동시에 움직이고 말과 글이 하나가 되는, 언어사적으로 의미있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주목받고 싶은 10대 감정이나 느낌 실은 신조어 쉼없이 복제
외면만 하지 말고 그들의 언어에 관심을…

말은 줄고, 문장부호는 늘고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면 일단 말이 짧아야 한다. 줄임말이 생기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 청소년들은 ‘열공(열심히 공부하다)’같은 줄임말을 일제히 쏟아내기 시작했다. ‘금따’(금세기 최고의 왕따)도 부족해 ‘왕영은따’(완전히, 영원히, 은근히 따돌림)가 나온다. 제일 친한 친구는 베프(베스트 프렌드), 남자친구는 볼펜(보이 프렌드와 발음이 비슷)이다. 그냥은 ‘걍’으로, 많이는 ‘마니’로, 말도 줄었지만 복잡한 맞춤법도 생략된다.

간단한 단어에 감정을 실어 전달하려다 보니 각종 부호(이모티콘)의 쓰임이 크게 늘었다. ∧∧ (웃는 표정), ㅠ ㅠ(우는 표정)은 기본이고, OTL(좌절금지; 글자 모양이 무릎 꿇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같은 독특한 문양까지, 한정된 글자판을 활용해 ‘시각물’을 만들어내는 청소년들의 능력은 한계를 모른다. 여기까지는 미국을 비롯한 서양권과 일본, 중국 등 동양권에서도 광범하게 벌어진 일이니,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라 하겠다. 그러나 한국 청소년들은 우리말의 특색을 아낌없이 살려 더욱 독특한 말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청소년들, 한자에 매료되다

얼마전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궁>(문화방송)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황태후 : 그래, 어찌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느냐?
신채경 : 그게요. 제가 물론 ‘열공’해야할 학생이라 ‘대략난감’이지만요, 저희 집이 ‘당최 압박’을 당해서요, ‘좌우당간’!
황태후 : 열공이라? 이는 무슨 시호인듯도 들리고, 대략난감, 좌우당간…이건 어떤 뜻의 고사성어인고?

한자에 익숙치 않은 요즘 청소년들이 한자어를 ‘내 맘대로’ 조각해 활용하는 현실을 엿볼 수 잇는 장면이다. 한국어에는 한자가 상당부분 포함돼 있고, 좀더 ‘경제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려는 청소년들에게 뜻글자인 한자는 좋은 재료가 되어 주었다. 대략난감, 위기모면처럼 사자성어를 연상시키는 말들이 있는가 하면, 단어 앞에 급(急)자를 붙여 사태의 긴박함이나 간절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네티즌들의 현재 심리상태, 여론의 향방을 뜻하는 ‘넷심’은 인터넷 혹은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넷(NET)에 마음 심(心)이 결합된 영한문혼용어다. ‘지름신’은 ‘물건을 마구 사다’라는 뜻의 속어 ‘지르다’와 한자 ‘신(神)’이 만난 경우다. 친구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사면서 기분을 풀거나 값비싼 물건을 충동 구매할 때, 청소년들은 “지름신이 내리셨다”고 놀린다. 지름신은 ‘쇼핑중독’과 그 맥락이 닿아있지만, 병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심각함 대신 청소년 특유의 유쾌발랄함이 느껴지는 단어다.

감정 듬뿍 싣는 ‘신조어’폭증

한글학회 김한빛나리 연구원은 “청소년들의 말 중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상황을 ‘강조’하는 단어가 특히 많다”고 분석한다. 당최(도데체), 대략(꽤 많이, 아주, 너무), 열라(무척, 너무) 같은 ‘강조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얘기다. 이세희 피디는 “예전에는 셤(시험)이나 담탱이(담임선생님)같은, 청소년들의 일상을 반영한 신조어가 많았으나 요즘은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신조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라고 전했다.

‘무흣하다’는 요즘 청소년들이 자주 쓰는 신조어다. 감정을 표현한 말이지만, 어른들은 그 단어가 갖는 어감(뉘앙스)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청소년들이 ‘무흣’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1)(성인 대상 영상물 등을 보고)야릇한 느낌이 들 때, 2)생뚱맞은 기분이 들 때 3)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등 무척 다양하다. 상대에 말에 깊은 공감을 표현하는 ‘당근이지(당연하지)’는, 좀더 센 느낌이 드는 ‘당돌하지’로, 다시 ‘말밥이지’(당근을 말이 잘 먹는다는 의미에서)로 복제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셩’혹은 ‘~하셔’로 끝내면서 상대에게 ‘친밀한 느낌’을 전달하던 유행은 최근 ‘~삼’ 또는 ‘~셈’으로 바뀌었다. 김한빛나리 연구원은 “청소년들이 만들어낸 하삼체나 하셈체는, 우리 국어의 ‘활용’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현상”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즐겨쓰는 단어들 중에는 소통이 어렵거나 남들의 공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한 단어들이 유독 많다. 얼굴을 보며 대화하기 보다는 문자를 주고받고, 혼자 두 세 명 역할을 하면서 게시판에 댓글을 올리는 ‘자기복제 놀이’를 즐기지만, 누군가의 관심을 끌고, 주목 받고, 소통하고 싶은 마음도 그만큼 간절한 것이 아닐까. “악플(악성 댓글)보다 무플(댓글이 아예 없는 것)이 더 무섭다”고 말하는 청소년들과 진정으로 소통하려면, 그들의 ‘심각한 국어 오염 행위’를 지적하기에 앞서 그들만의 언어에 관심을 가져야 할 듯 싶다. 무슨 말인지 알아야 말이라도 붙여볼 것이 아닌가.

10대 말 따라잡기

① ‘∼셈’체, ‘∼삼‘체: 기존 어미 체계를 과감히 흔드는 새로운 문장 끝맺음 방법. 셈과 삼은 그 뜻에 있어 별 차이가 없다. 평서문, 의문문, 명령문 등 어떤 문장 유형에도 사용 가능하나, 상황과 쓰임, 말투로 그 때 그 때 해석을 달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밥 먹었삼? (밥 먹었니?)
열공하셈! (열심히 공부해!)

② 즐 : 대화를 끝낼 때 상대방에게 건네는 덕담 혹은 빈정거림. 1) 즐겨라, 즐겁고 재미있게 놀아라 2) 어디한번 잘해 봐라 3) 꺼져라 등 상황에 따라 단어의 느낌이 달라진다. “나 짐 놀이공원 가삼(나 지금 놀이공원 간다)”이라는 친구의 문자 메시지에 “즐!”이라고 답했다면 1)의 의미, 인터넷 게시판에서 “비회원은 즐!”이라고 했다면 3)의 의미다. 비슷한 단어로 ‘킨’이 있다.

③ 뷁 : 특별한 뜻 없이 짜증날 때 내는 의성어. 화가 나거나 어이가 없을 때, 난감할 때도 두루 쓰이며 대화 상대 혹은 불특정 다수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④ 급∼ : 기존 단어 앞에 붙여 ‘빨리~ 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급전달(빨리 전달하다)
급박수(급히 박수를 쳐라, 다같이 환호를 보내자)

⑤ 대략 : 원래 ‘어림잡아서’라는 뜻이지만, 문장 안에서 부적절한 호응을 통해 청소년들의 말로 바뀐 경우다.

대략 오만원쯤 돼(어른들의 말)
대략 감동이야(청소년의 말/‘아주 감동적이야’라는 뜻)

⑥ 지대 : ‘제대로’의 줄임말. 원래 뜻이 조금 변형되어 ‘제대로’와 ‘열라’(아래 ⑦번 참조)를 합친 어감을 갖게 되었다.

너 지대 웃긴다(너 제대로 웃긴다, 사람 웃길 줄 안다, 무척 웃긴다)
우리 담탱이 지대여(우리 담임선생님 제대로야. 이때 ‘지대여’는 ‘좋은 사람이야, 멋져’ 혹은 ‘(선생님이니 만큼) 답답하고 엄격해’라는 상반된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⑦ 열라 : 많이, 무척, 꽤, 너무

감기 열라 심해
여기 사람 열라 많아
울 아빠 열라 무서워

⑧ ‘폭탄’시리즈 : 폭탄=(미팅이나 소개팅에서)못생긴 상대, 콩알탄=그런대로 견딜만한 상대, 수류탄=(인명을 살상할만큼) 끔찍한 상대, 핵폭탄=전체 분위기까지 다 망치는 상대.

참고) 융단폭격 :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온 사람이 모두 폭탄이 경우 쓰이는 말. 비슷한 말로 ‘무기고’가 있음.

이미경 기자 friend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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