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지 않는 시험이 어디 있나요?
늦깎이 방송고 학생들의 첫 중간고사가 끝났습니다
    이기원(jgsu98) 기자   
방송고등학교 중간고사를 치르던 전날 우리 반 39명의 학생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첫 시험을 보는 날이니 결석하지 말고 꼭 와서 시험을 보라는 내용입니다. 방송고의 특성상 결석을 하는 학생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한 달에 두 번 출석 수업을 받지만, 그마저도 출석이 어려운 상황도 꽤나 많습니다.

24시간 편의점에서 밤새 물건을 팔다보면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해 결석하기도 하고, 산불조심 기간동안에는 일요일에도 주요 산을 돌아다니며 감시하다보면 출석은 하고 싶어도 못한다는 사정을 얘기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방송고 학생들의 다수가 주말을 꼭꼭 찾아먹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 일요일에도 일이 있으면 나올 수 없는 경우가 흔합니다.

ⓒ 이기원
그래도 시험은 꼭 보길 바란다는 담임의 마음을 문자에 담아 보냈습니다. 문자 전송이 이루어진 뒤 얼마 되지 않아 답장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시험이 다가오니 떨리지만 선생님 문자 보니 기운이 나네요."
"공부 하나도 못했어요. 도끼 준비해서 팍팍 찍어야겠어요."
"무서워서 결석하려고 했는데 선생님 문자 보니 가야겠네요. 고맙습니다."


학생들은 나이도 많고 세상의 험한 풍파를 다 겪으며 살아왔지만, 시험 앞에서 떨리고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나봅니다.

5월 21일 일요일, 시험 날이 되었습니다. 문자까지 보냈지만 39명 중에 12명이나 결석을 했습니다. 시험을 보러 온 학생들도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책상을 시험 보는 대형으로 정렬을 하고 긴장을 풀고 시험을 잘 보라며 아침 조회를 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면 됩니다. 감독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최선을 다해 시험 잘 보세요."

학생들은 "알았다"고 대답은 했지만 평소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소리였습니다. 다 큰 어른들이지만 시험 앞에서 긴장되는 건 아이들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느라고 공부는 해도 돌아서면 금방 까먹는다"며 걱정하는 아줌마 학생에게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 학생이 우스개 소리를 던집니다.

"그럼 돌아서지 말아요."
"뭐라구요?"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니 안 돌아서면 백점이지요."


"맞는 소리"라며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덕분에 긴장이 좀 풀려 시험시간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아침 조회를 끝내고 시험지를 챙겨들고 3학년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방송고에서 3년째를 맞은 분들입니다. 이젠 졸업도 먼 이야기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3년이 순탄한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책을 들고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늦깎이 방송고 학생이라고 교재가 일반 고교생들보다 쉬운 내용은 아닙니다. 거의 엇비슷한 수준에 한 달에 두 번 출석수업과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공부해 이해해야 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재를 구석구석까지 들추어 가르쳐주는 일반 고등학교학생들보다 어렵고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지를 나누어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가는 학생도 있습니다. 객관식 답안지에 특정 번호로만 답안을 표시한 채 나가는 것입니다. 시험지와 감독 교사를 번갈아 바라보는 나이 지긋한 학생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주변 답안이라도 훔쳐보고 싶어 감독 교사의 눈치를 보는 것이지요. 모르는 체 눈감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시험을 보는 데 휴대폰이 울려 쩔쩔매다 휴대폰을 꺼내 배터리를 빼버리는 학생도 있습니다. 일반 고등학교 시험에서는 있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수능 시험장에서 부정이 적발된 후 시험기간에는 철저하게 휴대폰을 단속합니다. 방송고 시험장에서는 그런 살벌한 분위기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렵게 공부하지만 마음만은 순수합니다. 같은 반 학생을 누르고 올라서야 하는 치열한 경쟁 판은 아닙니다. 늦은 나이에 힘들게 공부하는 동료들이 모두들 좋은 성적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7교시 시험이 끝나고 우리 반 교실에 들어가 간단히 종례를 했습니다. 종례 후 집에 가셔도 된다고 해도 그냥 앉아 있습니다. 시험도 끝났으니 조촐하게 회식을 하고 가자는 겁니다. 선생님도 함께 가자는 권유가 있었지만 선약 때문에 함께 하지는 못했습니다.

떨리고 긴장되는 방송고의 첫 시험을 끝낸 늦깎이 학생들의 홀가분한 표정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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