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성적, 30년 지난 뒤에 보니 -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대학교 은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에게는 고등학교 동창생의 아버님이기도 하신 분이다. 은사님의 아들이자 고등학교 동창생인 친구를 어언 30년 만에 빈소에서 만났다.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보기 좋게 기른 동창생은 ‘벽오동 심은 뜻은…`… 와뜨뜨뜨뜨…`…’를 목청껏 부르던 가수 김도향처럼 넉넉하고 보기 좋은 풍채와 인상으로 문상객들을 맞았다. 검은색 상복조차 썩 어울리게 차려입은 옷처럼 느껴지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나하고는 ‘노는 물’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무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일주일에 몇 건씩이나 받을 만큼 이제 나이를 먹은 동창생들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병원 영안실에 왁자지껄 모여 밤새 술잔을 기울이기 마련인데 그런 동창생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대학교 동기들한테 받기 전에 고등학교 동창생들이 먼저 했어야 마땅한데 그런 연락도 없었다. 이른바 일류, 이류, 삼류를 따지던 시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우리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 동안 같이 다녀서 흔히 말하는 ‘아삼육’이기 마련인데 그 동창생 친구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야, 왜 고등학교 동창 놈들이 한 명도 안 보이냐? 벌써 다들 왔다가 갔냐?” 내가 물었을 때 그 친구는 손바닥으로 자기 무릎을 치며 서슴없이 답했다. “내가 그때 낙제했잖냐.”

맞다.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대학교에 백 명을 넘겨 보내야 한다고 조회시간마다 교장 선생이 교단에 올라서서 “올해에는 반드시 백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하고 목소리를 높이던 시대. 반 편성이 아예 ‘서울대반’, ‘연고대반’, ‘기타대반’ 이렇게 돼 있어서 교련 시간에 열병분열을 연습하다가 줄이 좀 틀리면 교련 교사가 마이크에 대고 “거기 기타대반! 줄 틀렸잖아. 너희들이 인마, 그러니까 기타대반이지!”하고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야단을 치던 시대. 그 살벌한 시대에 명문대 진학률을 높이겠다고 우리 학년이 고3으로 올라갈 때 학교에서 여든 명 가량을 낙제시킨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낙제생이었던 거다. 그 낙제생에게는 중·고등학교 5년을 같이 다닌 친구들도 ‘동창생’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고 잠깐 같이 공부한 1년 후배들과 동창생이라고 어울릴 수도 없었던 거다. 시험 점수 좀 못 받았다는 이유로, 5년 동안 쌓인 학창 생활의 인연을 몽땅 빼앗아가는 게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으로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낙제를 했지만 지금 한결 넉넉하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친구나, 힘들게 공부해 명문대를 나왔지만 부모님이 물려주신 부동산 불리는 일에만 열심인 친구나, 내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그 살벌한 노력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들인가.‘입시지옥’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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