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풍! 욕먹어 마땅하다.

그러니까 지난 주 토요일, '12일, 소풍계획이 잡혔으니 월요일까지 계획서를 제출해야 결재가 가능하다'는 임무가 긴급하게 각 반 담임들에게 '하달'되었다. 여러 가지 학교 행사로 시간이 없어 화요일 일괄 결재를 받아야 한다니 아이들과 의논할 시간은 토욜 4교시 학급회의 시간밖에는 없을 듯했다. 그런데 11일 목요일은 또 체육대회가 잡혀있어서 그 시간에 아이들은 출전 선수 뽑고, 반티 디자인을 의논해야한다고 시간을 달란다.

체육대회에 관한 의논을 그럭저럭 마치니 2분 정도 남았다. '앗! 어쩌지?' 사실 이번만큼은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자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동안 담임하면서 내 고집대로 하느라 늘 무리수를 두었고 따라서 불만있고 싫으면서도 억지로 끌려오는 녀석들도 많았기 때문에... 게다가 진지하게 의논할 시간도 없어서 그냥 바로 아이들 의사를 물었다. "소풍, 어디 가고 싶노?" 광안리 미월드(뭔 뜻인지도 모르겠는 놀이공원 이름이다.), 해운대, 화명동 DMC극장 등등.. 내 의견을 내 놓지도 않았다.  표결에 붙였더니.. 광안리 미월드 23표. 과반수 넘었다. "좋아! 광안리 가자"

그리고 어제 종례하면서 10시 30분에 모일 것과, 도시락 꼭 싸올 것, 그리고 쓰레기 줏을 비닐봉지 하나씩 들고 올 것 등을 강/조/했/다. 학생부에선 교복을 입어야한다고 공고?했지만 담임재량으로 선심 쓰 듯 '느그가 알아서 하라'하고. (사실 몇일 전부터 우리 반 아이들이 소풍 때 입을 옷 산다고 야자 빼달라는 것도 다 빼주었다. 새 옷 사줄 뻔히 아는데 교복 입으라곤 못하지..아무렴...)

그리곤 집에 돌아와서 밤에 잠을 설쳤다. 살짝 악몽도 꾼 듯하다. 왜? 도대체 내일 아이들과 무얼하며 시간을 보낼까? 에잇 몰라 될대로 되라지.

아침! 날씨? 좋다! 꾸물거리다 살짝 늦을 듯 했지만 가는 길에 김밥 3인분을 샀다. 담임샘, 그리고 같이 광안리로 소풍 오는 12반 담임샘 점심까지.

겨우겨우 시간 맞춰 약속 장소 도착.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출석점검을 반장에게 부탁한 뒤 생각해둔대로 관할 '경찰서'를 찾았다. 소풍 다녀온 뒤엔 의례적으로 봉사시간을 2시간씩 인정해주는데 사실 봉사도 전혀 하지 않고 시간만 인정해주는 것이 늘 찜찜했던 터라 오늘은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해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 경찰서장님은 이제껏 단체로 봉사활동을 신청받은 일도, 시간을 인정해준 적도 없기 때문에 곤란하단다. 에잉... 어쩌지?

돌아와서 둘러봤더니 부담임샘도 오셨고 아이들도 그럭저럭 다 모인 것 같은데 반장인 ㄷ원이 녀석이 안 보인다. 아이들에게 물어봤더니..."저기요"하며 길 건너편 31아이스크림가게를 가리킨다. 아, 열 받는다!  전화를 걸어 냉큼 나오라 하고 능글한 그 놈 얼굴에 대고 틀에 박힌 잔소리 한 판 늘어놓고.

아이들을 모아놓고 봉사시간 인정 운운하며 "모래사장에서 쓰레기 10개씩 줏어오면 봉사시간 두시간씩 인정해주겠다"며 내가 인정해주는 것 마냥 생색냈다. 그런데.. 어라? 귀찮아 할 줄 알았는데 좋아하며 고분고분 백사장으로 내려가는 아이들... 20개씩 줏어오라할껄... --; 

녀석들을 기다릴 곳이 마땅찮다. 부담임샘왈 "샘, 바람도 많이 부는데 우리 저기 가게라도 들어가서 기다리죠"  다른 부담임들은 소풍날을 휴일로 생각하는데 여기까지 와주신 예쁜 우리 부담임샘께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아까 반장이 갔던 그 31가게로 들어섰는데... 아~ 실수다. 밖에서 쓰레기를 들고 녀석들이 우리를 보고있다. 마 같이 백사장 내려가서 같이 쓰레기나 줏을껄... 자꾸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해서 죽을 지경이다. 아이들은 쓰레기를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즈들끼리 알아서 사진 찍고 뛰어다니고 잘 논다!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하나??

녀석들이 줏어온 쓰레기가 화단 가에 소복히 쌓여있다. 그러면 그렇지.. 도시락도 한 놈도 안 싸왔는데 쓰레기 봉지를 챙겨왔을 리가 없지. --+ "이젠 뭐 할래? 광안리 오자며? 뭔 계획이 있을 거 아니가?" "집에 언제 가요? 12반은 벌써 갔는데요.." "미월드 갈래?" "거기 다 같이 가야되요?" "돈 없어요." "지금 마치고 가고싶은 사람만 가지요" "밥 먹으러 가지요" 으이그 내가 못살아.. 이럴 줄 알았으면서 왜 광안리로 왔을꼬.. 내 잘못이다 내 잘못!!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 사실 엊저녁부터 쥐어박았다.

"그럼, 우리 일단 단체사진이나 찍자! 이걸로 출석 체크할 거다. 사진에 얼굴 안 나온 녀석은 결과 처리할끼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하자마자... 우루루~ 녀석들이스탠드에 앉는다. 그 와중에도 무능한 담임은 사진 찍는 것 싫다는 녀석 없는 것이 살짝 흐뭇하다. ㅋㅋ "자 양껏 이쁜 척 함 해봐라" 어라, 몇 녀석이 안 보이네. 가보니 화단에서 열심히 아이들이 줏어온 쓰레기를 봉투에 담고 있다. 이쁜 놈들... ㅠㅠ 같이 쓸어 담고 같이 사진 찍었다. "자, 이번엔 바다를 배경으로 해서!" 다시 바닷가로 우루루...  그리곤 '결정'을 해야할 시점. "우짜꼬? 오늘 점심 쏘까? 아니면 학교 가서 아이스크림 사주까?" "학교 가서 사주지요오~" 다행이다. 이까지 와서 아이들 김밥 한줄씩만 우째 먹이노 싶었는데... ^^; "야~ 느그가 광안리 오자고 해서 왔더니.. 봐라, 재미 한 개도 없다 아이가. 2학기 때 소풍은 샘이 결정한다. 알긋제? 그럼, 각자 가고 싶은 길로 가라!! " 12시도 안 된 시간에 그렇게 우리는 째/졌/다. 남아서 우왕좌왕하는 몇 녀석과 사진 몇 장 더 찍은 게 다다.

뭐야 이거, 누가 알까 무섭고 쪽팔린다 쪽팔려. 그동안 내가 '욕'해오던, '좋은 게 좋은 것'인, '자본에 아이들의 영혼을 빼앗기'는, 전형적인 '그런' 소풍이잖아. 다음부터는 아이들의 불만을 감수하더라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고집부려야겠다.

* 사실 이번 봄 소풍,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ㅇ주네 할머니가 딸기 농사를 지으시는데 부모님께 양해를 얻도 "딸기 따기"를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는데... 몇 주 전에 ㅇ주랑 싸운 것이 사단이었다. 녀석이 교무실에서 너무 조심성 없게 막말하는 버릇을 정색하고 야단쳤더니 녀석이 완전히 내게 삐져있었다. 3주나 그렇게 대치하고 있던 터라 말도 못 꺼내봤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소풍지를 결정하고 결재를 받던 바로 그날, 녀석이 내 말에 대꾸를 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은 사진까지 여러 장 같이 박았다. 에잉... 일이 꼬일려니... 다음부터는 아이들과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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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05-12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년에 애들 원하는 대로 하자하고, 학급회의 결과 과반수라기 보다는 목소리 큰 애들이 내놓았을 거 같은 '롯데월드'안을 받아들였다가 엄청 후회했습니다. 근처 시골에서 사슴농장하는 *원이네 집에 가자는 안이 있었는데, 그걸 그냥 밀어붙일걸하구요. 올해는 농사짓는 집 아이도 없지만, 절대 작년처럼 안할겁니다.

해콩 2006-05-12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만 그런 거 아니구나아~" 위로가 됩니다. ㅋㅋ
우리 다음부터는 확실히 독단적인 담임이 되어보아요~ ㅋㅋ
목소리 큰 놈들... 참~ 해마다, 반마다 늘 있는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