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6월 24일 목요일. 맑음

  호근이가 오랜만에 두 시간 동안 우리 교실에 있었다. 듣고 생각하고 말하는 게 나무랄 데 없건만 자란 환경은 이 애를 제 또래들한테서 떼어놓았다. 평범하게 자라던 나도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식구들의 구속이 거의 없이 큰 데다 여린 맘을 지녔던 나에게 '학교'라는 틀과, 틀만으로 빈틈없이 짜인 '우리'는 늘 나를 주눅들게 했다. 교사들의 말 한 마디 한마디는 그대로 내 영혼을 고문하는 거였으며(돌이켜보건대 선생님들과 나 사이에는 왜 그다지도 먼 거리가 놓여 있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능력이 없는 우리에게 선생님들은 말끝마다 '큰사람'만 되라고 했다. 오직 공부를 잘 해야만 닿을 수가 있었던.) 가난은 그나마 붙어 있어야 할 자존심마저 팽개쳐 버리도록 했다. 거기에 모자란 힘과 용기는 자나깨나 주위 눈치만을 살피도록 했으니, 어찌 자신과 앞날에 대해 드넓은 시간과 우주에 대해 눈을 돌려볼 수 있었겠는가?

 

1993년 6월 29일 화요일, 흐리고 가끔 비.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리한 것을 두고 맞서기보다는 먼저 비켜라려고 한다, 정옥이와 영남이에게 몇 번째 받아쓰기를 못한다고 손바닥을 때려주면서 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더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맞으면 세상에 때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시간을 내 취미를 위해 쓰면서 (주로 책을 읽는데, 그럼으로써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정작 아이들을 위해 시간 내는 것에는 인색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또 이 생각을 적으면서도, 언제까지 이 버릇을 버리지 못할지 나는 모른다. 돈이야 가진 게 없으니 남에게 인색하게 굴고 자시고 할 게 없지만 시간에 대해서만은 우리 아이들에게 너그럽지 못한 채 혼자서만 줄곧 움켜쥐고 있었다. 내가 교단에 서서 가장 괴로움을 받는게 있다면 이뿐이다. 농사짓는 일을 뺀 첫째 직업에다 교직을 놓는 걸 나는 주저하지 않겠다. 아이들을 잘 가르쳐 보고 싶다.

 

임길택, [나는 우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보리, 2004, 196쪽,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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