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유배지의 수선화



 

 

 

 

 



一點冬心朶朶圓 일점동심타타원
品於幽澹冷儁邊 품어유담냉준변

梅高猶未離庭砌 매고유미이정체
淸水眞看解脫仙 청수진간해탈선

한 점의 겨울마음 송이송이 둥글다

성품은 그윽하고 담박하여 차갑고 우뚝 솟았네

매화가 높다지만 뜨락을 못 떠났는데

맑은 물 해탈한 신선을 진실로 보노라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1661-1번지에 추사 적거지가 있다. 제주시 95번 도로를 타고 마라도 방면으로 가다가 멀리 산방산이 덩어리째 보이면 오른쪽 안내표지를 따라 작은 마을 입구에 추사의 수선화가 피어있다. 금석학자, 서예가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조선 헌종 6년(1840년)에 윤상도의 옥사와 관련하여 제주도에 유배되어 헌종 14년(1848년)에 풀려나기까지 9년간 거주했던 곳이다.


추사적거지에 도착하니 비바람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 악명 높은 제주도의 바람 속에 유배지의 수선화를 보러 달려 온 길. 집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먼 거리다. 비바람 속에 수선화는 피었을까. 유배지의 수선화.

 



 

 

 

 

 

 

 

 

 

 

 

 

 

 

 

 



수선화는 현무암 돌담아래 일렬로 피었다. 흰꽃 잎 사이에 노란 꽃술이 도톰하게 돋을새김모양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 한점을 일컬어 <겨울마음>이라 표현한 추사의 마음은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는 <세한도>의 뜻과 맞닿아 있다. 전날 롯데호텔 정원의 잘 다듬어진 매화나무 군락지에서 이제 막 꽃잎을 열기 시작하는 그것을 보고 적잖은 실망을 했다. 매화가 꽃의 으뜸이라면 그 나머지는 꽃도 아니라는 매화사상을 품고 있던 나에게 특급호텔의 반듯한 구획지처럼 사람의 손으로 줄 맞추어 피어나는 매화꽃을 보자니 자꾸만 플라스틱 인조꽃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사람의 손길이 닿으면 물질이 지닌 본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인가. 타의에 의해 꽃잎을 피우는 매화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만 거기에는 매화의 고품(高品)은 온데간데 없고 껍데기만 남긴 절체곤충의 조각난 박피같은 뻣뻣한 인위만 남아 있었다.


이제 수선화는 소박한 것으로부터 고품을 보여주고 있다. 유담(幽澹)이란 요란하고 화려한 것을 멀리하고 은은하고 그윽한 성품을 말한다. 나로부터 외면당한 롯데호텔 정원의 매화꽃은 덧없고 교언영색으로 치장한 무식한 정원 구석에서 졸렬한 자태를 쓸쓸히 보여 줄뿐이다. 꽃으로부터 상처를 입은 마음은 꽃으로 치유한다. 수선화를 보러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먼 거리를 찾아온 마음이란 무엇인가? 추사는 말한다. 그것은 ‘해탈선(解脫仙)’이라고.

 

해탈한 신선이라.... 추사의 굽힐 줄 모르는 콧대높은 자존심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자신의 학문과 총명함을 부정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추사의 자신감은 그를 오만방자함으로 이끌었다. 지나친 자신감의 이면에 있는 당당함의 경계를 넘는 교만이다. 그에게 겸양의 미덕을 요구하는 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완고하고 거만했던 추사에게 9년간의 유배는 ‘인간으로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준다. 학문적 성취를 지적 능력으로만 삼았던 그에게 수선화는 말한다.


品於幽澹冷儁邊 품어유담냉준변.


홀연히 추위를 견디며 그윽한 성품을 잃지 않는 수선화. 유배지의 수선화가 추사에게 가르쳐 준 것은 홀연히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었을까. 여행객은 자꾸만 수선화 여린 꽃망울을 손으로 만져본다. 손가락에 묻어나는 수선화 향기는 있을 듯 없을 듯하다.


천재의 안테나에 주파수가 잡힌 수선화는 그에게 <세한도>의 진리를 깨우쳐주는 길로 안내했다. 날이 추워도 잣나무, 소나무처럼 푸르리라. 사실, 세한도처럼 사는 삶은 고단하다. 누군들 안락한 호텔방의 달콤한 꿈을 원하지 않던가. 하지만 인생이란 얄궂어서 종종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춥다. 으스스한 몸을 추스르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세상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툰드라기후대가 넓게 분포되어 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까지 사랑을 나누었던 연인과 오늘 헤어진다. 삶이란 매양 변덕꾸러기다.

 
그러니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먹지 않으면 누가 나를 지켜줄 것인가.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사랑'이다. 험난하고 궂은 세상. 누가 나만큼 나를 사랑해주겠는가. 나는 스스로 일어나야하고 스스로 꽃을 피워야 한다. 100% 자의에 올인한 삶. 타자적인 것으로부터 자아로 돌아오는 것. 유배지의 수선화는 그러므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세한도>의 쓸쓸함은 거기에 사람의 자취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으니 사람을 배제한 것일까. 유배지에서 의문은 비안개처럼 계속 일어선다. 그래서 그 후 추사는 대정읍의 신선이 되었을까. 수선화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까. 한 시대를 뛰어넘어 한 획을 긋고 사라져간 사람들. 그들의 숨결을 비바람 속에 수선화는 담고 있는지 자꾸만 바람결에 몸을 눕히지 않으려 서로 기댄다. 

 

유배지의 수선화를 보러 먼 길을 달려갔다.

제주도를 찾아간 이유가 순전히 추사의 수선화를 보러가기 위함이었다면 추사 선생은 후대의 철없는 여행객을 귀여워해주실까. 우산을 쓰고 쪼그려 앉아 수선화를 만지며 주책맞게 눈물이 흐른다. 애꿎은 바람 탓이라고 돌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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