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풀린 글보다 왜 날려버리고 고통스레 다시 쓴 글이 호평받을까
성공은 좌절의 산물임을 알므로 남들의 ‘비보’에 엽기적으로 환호한다네
▣ 이윤기/ 소설가·번역가
오후 6시, 내가 책상 앞에서 일어서는 시각이다. 이 시각부터 나는 사람을 만나거나 술을 한잔 하거나 한다. 하지만 10월13일 오후 6시에는 책상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두 신문사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10월13일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이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나는 고은 시인이 수상자가 될 경우 그분과의 개인적 친분과 문학세계에 관련된 글을 두 신문사에 써보내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6시부터 잔뜩 긴장한 채 서재와 안방을 오가면서 신문 원고를 메모하거나 TV 화면을 힐끔거리거나 했다.
노무현 탄핵에 “월척이다”
8시 뉴스에 수상자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8시부터는 꼼짝도 하지 않고 TV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 한국인의 문학적 업적에, 우리의 모국어에 노벨문학상이 얹힌다는 것을 확인하는, 필경 무지하게 짜릿할 터인 그 감동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거나 마실 수도 없었다. 고은 시인이 수상할 경우, 밤늦게까지 써야 할 원고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8시30분쯤 되었을까? TV 화면 속의 아나운서가 약간 풀 죽은 표정을 하고는,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고은 시인이 아닌, 영국의 극작가 해럴드 핀터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쉬웠다. 허탈했다. 섭섭했다.
솔직하게 쓰자. 아쉽고, 허탈하고, 섭섭하기만 했던가? 엉뚱한 사람이 수상한 덕분에 나는 두 꼭지 신문원고를 써야 하는 엄청난 부담에서 놓여났는데?
고백하거니와, TV 앞에서 일어서면서 내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아이고, 살았구나.”
그로부터 한 주일 뒤, 세계 도서 축제가 열린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고은 시인을 만났다. 마음고생 많이 하셨지요? 이런 의례적인 인사 끝에, 발표 당일 내가 했던 마음고생과, 발표를 듣는 순간 내가 보였던 이기적인 반응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긴장했다. 그가 이런 말로 나를 야단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뭐라고? 내가 수상에 실패했는데, 모국의 문학에, 모국어에 돌아올 수도 있는 영광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는데도 자네가 보인 반응이, 뭐? 아이고 살았구나? 신문 원고 쓰는 부담에서 놓여났다고, 뭐, 아이고 살았구나? 자네가 그러고도 한국의 작가야? 한국인이야?”

△ 살아 있는 것들에게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다. 풀은 말라야 하고 나무는 자라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봄이 오거든 보라. 자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살아난다. (사진/ 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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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니었다. 고은 시인은 나의 고백을 듣고는 한동안 탁자를 치면서 박장대소하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 안 섭섭해. 이 사람아, 그게 인간이야.”
노벨문학상 악몽(?)이 끝난 지 겨우 일주일, 고은 시인은 그 악몽을 거뜬하게 소화하고는 늙은 악동(?)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고은 시인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차례 일진광풍을 맞은 거목 같은 분 이야기를 앞세워서 노 시인께는 퍽 송구하지만, 나는 지금 다음 세대 사람들이 경험할 실패에 대해서, 좌절에 대해서 쓰려고 한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써서, 복사하는 과정에서, 혹은 송고하는 과정에서 날려버리는 경험을 나는 여러 차례 했다. 원고가 짧을 경우에는 별로 큰 일이 아니지만 긴 원고일 경우에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그래서 철통 같은 방어망을 구축해놓고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이 ‘원고 날려먹기’와 ‘원고 다시 쓰기’의 끔찍한 경험으로부터 해방된, 완벽한 무풍지대에는 있지 못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지? 나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날려먹기’와 ‘다시 쓰기’의 아픈 경험과 관련이 있다. 글이 술술 풀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술술 풀린 글, 글쓰기의 고된 노동을 거의 면제받은 듯한 글로써 나는 호평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아프다.
나 자신의 실패를 위로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에서 유래한 것이기가 쉽다. 나에게는 남의 비보에 환호하는 매우 엽기적인 버릇이 있다. 나는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을 때, 드디어 입질 왔다, 이런 반응을 보임으로써 아내를 당황하게 한 사람이다. 나는 탄핵안이 통과되었을 때, 월척이다, 하고 소리침으로써 울먹이던 아내를 당혹케 한 일도 있다.
문명국들이 온대지방에 있는 이유
야구선수 박찬호가 연승하면 나는 불안해진다. 박찬호가 승리투수가 되는 데 실패하면 나는 마음 편해진다. 나는 박찬호의 성공은, 박찬호의 실패와 좌절의 산물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실패하고 좌절하지 않았더라면 저 나이의, 저토록 듬직한 선수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골프 선수 박세리의 공이 호수에 빠졌어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박세리의 빛나는 승리는 바로 그 실패와 좌절의 순간이 피워낸 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골프선수 미셸 위가 사소한 반칙 때문에 화려하게 데뷔하는 데 실패했을 때도 내가 보인 반응은 이것이었다. 미셸 위, 축하해요.
겨울이 오고 있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겨울은 매우 혹독한 계절이다. 풀은 말라야 하고 나무는 자라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계절이다. 새들은 배를 곯아야 하고 산 짐승은 먹을 것이 없어서 동면에 들어가야 하는 계절이다. 하지만 봄이 오거든 보라. 자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되살아난다.
겨울이 오고 있는데도 나는 화분 중 몇 개는 집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있다. 겨울을 경험하지 않으면 다음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도 있다. 대부분의 알뿌리 식물은 겨울을 경험해야 다음해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래서 식물원은 매장으로 나갈 알뿌리를 냉장고에다 보관하는 것이다.
세계의 선진 문명국들이 온대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것은, 온대지방이 겨울이 있는 땅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