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여행 셋째날 (2005. 8. 20. 토)

요가로 열심히 다리와 발을 풀어준 덕분인지 쥐도 없이 깊이 잘 잤다. 어젯밤 1시쯤 머리를 베개에 박은 이후로 기억 없다. 7시 40분쯤 일어나 씻고 아직 조금 어두운 방에서 깨작깨작 낙서를 하고 있는데 ㅇㅈ샘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거의 9시에 가까운 시간.. 흠 ..이제 일어나시려나들? 더 강한 잠꾸러기 ㅈㅎ샘이 남아있긴하지만.. 창을 열어 의도적으로 ㅈㅎ샘을 깨우고... 아침거리를 준비하러 함께 여관을 나선 시간이 9시 반쯤 되었었나? 너무너무 비싸지만 또 너무너무 맛있는, 제 철 만나 물오른, 섹쉬한 복숭아(요즘 알라디너들의 화두가 섹쉬함이던가? 요즘 나오는 복숭아, 진짜 섹쉬하다.. 철 지나기 전에 하나씩 꼭 맛보시기를. 꼭! 최상품으로 맛보시기를..) 3개 오천원. 그리고 뚜레쥬르에서 방금 구운 따끈따끈한 빵도 사고.. 어제 밤 의논한 대로 pc방 들러 태안마애삼존불과 서산마애삼존불에 대해 검색해보고.. 수퍼 들러 우유 사면서 태안마애삼존불 가는 길을 물어보고..  다시 반도모텔 301호로 돌아왔다.

백제의 태안마애삼존불은 2004년도에 국보로 지정된,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이란다. 태안읍? 요것이 바로 이 동네 뒷산, 백화산에 꼭대기 조금 못 가면 있단다.. 어제 ㅈㅎ샘이 "등산이나 합시다" 했던 말이 씨가 되었는지 오늘.. 등산할 일이 생겨버렸다. 아침을 맛나게 먹고 모텔을 나선 시간이 11시.

태안초등학교 뒷문으로 산을 오르면 빠르다는 제보를 들었기에 우선 초등학교를 찾았다. 길목에 아주아주 쾌적한 읍사무소(면사무소였나?.. 아! 오늘 아침 일도 제대로 기억 못 한다... ㅜㅜ) 가 나왔다. 2층짜리, 환경친화적으로 지어진 목조건물... 근무하시는 분도 환경친화적으로 참 친절도 하시다. 토요일인데도 미원실 문을 열고 도움 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캬~ 그곳에 배낭을 맡겨버리고 산에 올랐다. 도보여행 중에 등산이라... 헐~ ㅈㅎ샘 말대로 버라이어티 여행이다.

산!! 참 이뻤다. 별로 높지도 않아 해발 280m정도.. 정상에서 조금 떨어진 태을사 근처에 삼존불이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만 자원봉사로 삼존불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다는 할아버님께 30분 정도 길고긴 설명을 들으며 착한 학생들처럼 고개를 끄덕끄덕... 아이들이 우리처럼만 수업 들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자원봉사 할아버지처럼 존재가치를 팍팍 느끼며 행복해할텐데... 슬픈 꿈이다.. 접자!! --

정상으로 향했다. 꼬불꼬불한 길을 100m 정도 올라가니 백화산 정상이 나왔는데 작년 한라산 올랐을 때의 쾌청한 날씨가 생각날만큼 좋았다. 어제 비가 내린 덕분에 가시거리가 장난 아니다. 저쪽 끝.. 바다까지 가물가물 다 보였다. 사방 360도, 어느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두 동행은 360도 파노라마 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했는데 ㅇㅈ샘은 빳데리가, ㅈㅎ샘은 메모리가.... --; 부처님을 능욕한 댓가가 오늘까지 따라붙나보다. 대충 찍고 내려왔다.

2시경 하산.. 계속 면사무소에서 삐대기로 했다. 친절한 직원님께 자장면을 시켜먹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는데 왠 아이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 우리끼리 "00샘~"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내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쓸말큼 눈치가 빠른 이 아이는 별 기리낌 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김해에서 전학을 왔고 그래서 지금은 이곳에 친구가 없고..개학하면 태안초등학교 5학년이 될거란다. 놀라운 이야기는 그 후에 계속되었다. 어제밤.. 학습지를 한바닥 못해서 "어머니"에게 집에서 쫒겨났단다. 어젯밤 디게 추웠는데.. 한데서 밤을 지샌 아름이는 오늘 아침, 그리고 점심을 아직 못 먹었다 했다. 너무너무나 친절한 자장면 아저씨의 요구로 너무너무나 친절한 면사무소 직원님이 열어주신 사무실에서 아름이와 우리는 점심을 나눠먹었다. 좀 무섭겠지만 어차피 들어가야하는데 빨리 집에 들어가서 씻고 밥도 먹고 하라니까  이모와 이모부가 때린다면서 멍든 팔을 보여주었다. 엄마도 때리느냐고는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갑갑한 건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할지 방법이 막막하다는 거였다. 어디에,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맡겨야하나... 나도 어릴 때 부모님게 야단 안 맞아 본 것도 아니고 수차례 매도 맞아봤듯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만 직업병이 발동하는지 나이에 비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이 아이가 계속 걱정되고 안쓰러웠다. 음료수 하나 뽑아주고 우리도 7시면 여관 찾아들어갈거니까 너도 꼭 집에 들어가라고... 씩씩해야한다고 말해주고 떠나왔다. 지금쯤 아름이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어머니"가 집 근처에도 얼쩡거리지 말라고 했다면서 애써 눈물 참던 그 아이.. 지금처럼 순한 눈빛으로 계속 잘 자라야할텐데.. 세상의 어른들은 무책임하다.

18km만 걸으면 서산이다. 바람도 살랑살랑.. 적당한 구름에 해도 가리워져 걸어다니기에 정말 좋은 날씨. 10km정도 떨어진 지점부터 가늘고 가벼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까이꺼.. 맞아주지뭐.. 중간에 쉬며 강냉이도 먹고 복숭아도 사먹고.. 오늘 배운 노래는 '철의 노동자' !!  카수 ㅇㅈ샘이 음정 틀리는 거 처음 본다. (아니 듣는다 ㅋㅋ) 어제보다 쉬엄쉬엄... 서산에 들어와 모텔을 잡은 시간은 어제와 비슷하다. 내일이면 돌아가니 빨래를 할 필요도 없다. 나와서 아주 맛난 곱창 전골로 저녁을 먹었다. 닭 한 마리 잡고 맥주 한 병 나누면서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마무리할 생각이다...

걷는 동안 잊고 있었는데 아름이를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어두워진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일본 영화를 봤을 때 왠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 부딪히면 하소연할 곳이 없다. 아름이는 우리들에게 애원의 눈빛을 보낸 듯 한데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점심 먹이고 어른스러운, 그래서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충고 몇마디 해주고.. 대한민국은 어른들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줄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파출소.. 경찰서.. 정부 산하 지역 단체들..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회의만 들 뿐이었다. 학교? 지금이 방학이고 아름이가 전학을 준비하는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학기 중이라 하더라도, 또 아름이에게 담임교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가슴이 갑갑하다... 부모가 된다는 거.. 모든 일에 좀 더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뜻이지 싶다. 교사가 된다는 거.. 역시..  가끔 부모가 되는 일도 교사노릇을 하는 일도 피해버리고 싶다.

오늘 걸은 길은 어제보다 짧은 거리이기도 했지만 피곤도 덜하고 시간도 잘가고 가깝게 느껴졌다. ㅇㅈ샘이 한 말처럼(실은 김재동이 모 쇼프로에서 한 말이라지만..) 가장 빠른 길은 차를 타는 것도,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아닌 "친구와 함께 걷는 길"임을 실감했다. 친구들.. 세월과 함께 무르익어갈 그런 '관계'였으면 좋겠다.

아! 서산에 도착했을 때, 무지개가 떴다. 것도 두번씩이나... ㅇㅈ샘이 찍었는데.. 올려주시려나? 대신 ㅇㅈ샘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무지개.. ^^ 이것도 아주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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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8-2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이 벌써 제 서재 다녀가신 것, 알아요.. 조회수를 보면 알지요!! ㅋ 여행하면서..고맙고 든든하다는 말 꼭 전하고 싶은데 얼굴보면서 직접 한다는 건 불가능이예요. 샘들 덕분에 너무너무 행복한 사흘, 아니 내일까지 그럴거니까 나흘이네요. 감사해요. 그리고 담번에 또 걸어다닐 일 있으시면 끼워주세요. 그땐 뭐든 제 몫의 책임을 하려고 노력할께요.. 나이 많은 노처녀라고 구박하지 마시고.. 꼭이예요!! 오늘 보셨다시피 저 디게 씩씩하게 잘 걷잖아요. 흠이 있다면... 너무 먹는 걸밝힌다는 것 정도? 이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죠?

whtim 2005-08-20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아직 안 다녀갔었는데...
음정이 틀리는 이유는 굳이 변명을 하자면 편곡이라고 이해하시오.

2005-08-20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상이최고야 2005-08-21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너무 좋았겠어요^^ 지금쯤 기차타고 내려오고 계시겠지요? 집에 가서 푸욱 쉬세요~~

해콩 2005-08-22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도 무지개의 저편엔 닿을 수 없다고 한다. 그저 바라보면서 걸을 뿐.. 인간의 삶이 그러게 아닌가 싶다. 아름이.. 지금쯤 집에서 편안한 잠을 자고 있을까? 그 아이에게도 저런 무지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잡을 수는 없더라도 바라보고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