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지 뭐. 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멋진 건데. 아주 간단해. 우선 몸이 없으면 머리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인간은 머리만으로 존재하지 않아. 몸을 자랑할 수 있는 너는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 거야. 응, 바보같이 당연한 말만 하고 말았네."  47쪽

 

사람들은 나를 불행한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혼자서 자기 아버지와 아들을 돌보고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사람들은 나를 불쌍히 여겼던 거다. 초등학교에서는 모자 가정의 모임이라는 곳에 들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임의 아이들이 그리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부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완벽한 가족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제삼자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그리고 그것만 한탄하면서 평생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집착하지 않는다. 사실 부모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언젠가는 이 세상과 이별하고 떠나야 한다. 부모 없는 아이는 불행하게 되어 있다는 고정관념은 사람의 생각을 묶어버리는 인습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와이드 쇼처럼 무책임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일을 하면 아버지도 없이 자랐는데 대단하다고 하고, 나쁜 일을 하면 역시 어버지가 없으니까 그렇지라고 한다.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사실이지 정의가 아니다. 하나의 사실에 지나지 않는 것이 모든 판단의 기초가 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사실에 ㅇ표를 하거나 x표를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옳고 그름을 정하는 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건 단지 하나의 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08~109쪽

 

"도키다, 세상에는 너 말고도 쓸데없는 간섭 때문에 나쁜 놈이나 좋은 놈이 되는 사람이 많아. 선생도 그럴지 모를지. 인간 전부가 그런 사고방식의 피해자일지도 몰라. 그걸 어떻게 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흑백논리에 빠지지 않을 거예요."

"그건 몰라. 그때가 돼보지 않으면.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 인간이 인간을 무책임한 입장에서 재단하는 건 안 돼. 그것만 알고 있어도 훨씬 나은 셈이지."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또 무엇이 나의 앞길을 가로 막을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사토 선생의 생활지도 때문에 기가 죽어 있을 수는 없은 것이다. 나는 내 나름대로 가치 기준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기준에 세상의 정의를 끌어들이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거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모든 것에 ㅇ표를 치자.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그런 다음 천천히 x표를 선택해가는 거다.' 122~1234쪽

 

 떠들썩하던 교실은 오쿠무라가 들어서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고 이야기에 빠져있던 히데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 사실을 눈치 챈 히데미가 어색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으려는데 오쿠무라가 불러세웠다. "뭐가 그리 재미잇어, 엉! 너 요즘 교실 분위기에도 익숙해져서 제법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히데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시 머뭇머뭇 했지만, 이윽고 고개를 들어 또박또박 대답했다.

"아카마와 나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게 아주 잘된 일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 그게 자랑거리라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니?"

오쿠무라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자랑하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없는 것은 아주 좋지 않아요. 조금이라도 뭘 잘못하면 금방 그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아른 곳을 건드리니까. 미야다와 삼각자로 결투를 벌이다가 뾰족한 끄트머리에 손이 찔렸습니다. 아주 아팠습니다. 바로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또 개똥 같은 논리로군. 넌더리나는 놈. 오쿠무라는 그 다음 말을 재촉했다.

"같은 겁니다.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픈 것아고 말이에요. 선생님, 삼각형의 세 각을 합하면 180도가 되잖아요. 일직선이 되는 거지요. 고통의 각을 세개 모으면 그것도 일직선이 됩니다. 여섯 개를 모으면 360도가 되는 겁니다. 동그랗게요. 더이상 아프게 하는 뾰족한 각을 없습니다. 나와 아카마는 이미 한개의 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는 빨리 일직선이나 동그라미가 될 수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구도 둘글잖아요."

오쿠무라는 히데미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이제 됐어. 네가 말하려는 게 뭔지 알겠어.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두고 자리에 앉아."

"쓸데없는 말이 아니라구요! 내게는 큰 문제예요."

"알았다. 알았어.

히데미는얼굴을 붉히면서 외쳤다.

"선생님! 내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그 순간 아카마 히로코가 책상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오쿠무라는 당황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누가 아카마와 도키다가 아버지가 없다고 놀리기라도 했어?"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뽀족한 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걸 각도기로 잴 수는 없지만, 언젠가 일직선이나 동그라미가 되어 없어진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히데미는 콧물을 훌쩍였다. 교실은 조용히 가라앉았고, 히로코의 울음소리만 울려퍼지고 있었다. 오쿠무라는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단 말인가. 정작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 ... 이래서는 공부가 안 된다. 너희들, 뭘 하고 싶어? 이번 국어 시간을 여러분에게 줄 테니, 뭘 할래?"

 순간,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아카마 히로코도 눈물로 젖은 얼굴을 훔쳤다.

모두 이 한 시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익숙해 있지 않은 아이들은 구체적으로 뭘 할지 결정하는 데 무척 애를 먹고 있었다.

"다마가와 강변에 가서 놀까? 날씨도 좋은데."

초조해진 오쿠무라의 입에서 나온 제안에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물론 히데미도 너무 기뻤다.

"길을 걸을 때 두 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 우측통행. 열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알았으면 준비해."

264쪽~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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