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재를 하면서 - 김종영
지난 2월 한 일본 중년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96년 12월 「아리랑」표지에 실린분이 우리 아버지,라고 밝힌 그는 책을 받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중섭 가족이 일본 어딘가에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했지만 자신을 당당하게 밝히며 연락을 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동안 본지에서 수차례 유사한 처지의 사람에게 인터뷰를 청했지만 냉담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리라고 생각지 않았는데 책을 보낸 며칠 후 "고맙다"는 말을 전해 왔다. 이후 인터뷰청을 했을 때도 그는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해 주었고, 이중섭 부인 마사꼬 여사 역시 세타가야 자신의 집을 취재 장소로 개방해 주었다. 둘째 아들 태성씨는 역시 자신이 운영하는 표구점에서 취재진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친절함에 놀라울 정도였다. 마사꼬 여사는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지내 왔으며 관절염을 앓고 있지만 지금도 긴자에서 일을 하며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큰아들 태현씨는 아오야마에서 인테리어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인 태성씨는 집 근처에서 타이세라는 표구점을 운영하고 있다. 따뜻한 배려에 다시 한번 지면으로 감사드리며 독자들도 이중섭 화가의 가족들과의 만남을 반가워 하리라고 본다.
<이중섭의 부인>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야마모토 마사꼬와 이남덕으로 살아온 인생
야마모토 마사꼬(山本方子, 77)라는 칠순의 곱디고운 이 일본 여인은 한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이름의 한국 여인으로 살았던 적이 있다. 화가 이중섭의 아내로 한국에서 살던 몇 년간이었다. 이중섭의 아내가 되면서 마사꼬 여사는 한국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이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한 때임에도 마사꼬 여사는 역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지금 도쿄에서 살고 있는 마사꼬 여사에게서는 청년화가 이중섭을 만났을 때의 고왔던 옛 자태를 아직도 짐작하기에 충분했다. 1940년경 도쿄 문화학원 재학 시절 이중섭을 처음 만나 1953년 만남이 끝이었던 평탄치 않은 결혼 생활이었다. 게다가, 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동안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할 만큼 어려운 나날이 많았다. 그래도 마사꼬 여사는 이중섭과의 만남을 단 한 번 후회없이 살아온 이중섭의 영원한 연인이며 아내로 지금도 살고 있다.
평생 잊지 못하는 사과맛
마사꼬 여사가 이중섭의 고향 원산에 도착한 것은 1945년 5월. 2차대전의 패전 기운으로 도쿄는 거의 매일 공습 사이렌이 울려댔고 미군 비행기가 공중을 날아다녀 모두들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미 4년 전부터 만나 사랑을 키워 왔던 두 사람은 벌써 2년 째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전쟁이 심해지자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간 이중섭은 되돌아 오지 않았다. 편지로만 주고 받던 사랑도 일본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점점 어려워져 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중섭은 마사꼬를 한국에 오도록 불렀고 마사꼬는 한국행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중섭을 찾아 한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한 길이었다. "도쿄에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기차표도 간신히 구했지요. 기차도 공습이 있을 때마다 멈추어 서서 시모노세키까지도 며칠이 걸렸지요. 부산을 거쳐 서울 반도호텔까지 가니 완전히 거지꼴이 되어 있었어요. 조그만 육색 하나만 짊어지고 떠나온 길이어서 나중에는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어요." 서울 반도호텔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미리 연락을 해주어 이중섭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 반가움, 안도감과 함께 그때 마사꼬 여사는 이중섭이 잔뜩 사들고 들어온 사과맛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맛있는 사과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이중섭과 고향 원산으로 향했다. 원산에는 처음 가는 것이었지만 그곳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모두들 일본말도 잘했고, 불안감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사꼬의 어머니가 인천에서 산 적이 있어 한국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비교적 적었던 것이다. 마사꼬의 어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 밑에서 성장했는데 삼촌이 인천에서 운송회사를 운영하여 인천에서 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가 그 운송회사의 연결로 미쓰이의 사장까지 되었다. 당시 마사꼬의 집안은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식민지 청년과 부유한 일본인 여성의 결혼. 무언가 심상찮은 운명의 장난이 개입할 듯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중섭과의 결혼에 마사꼬 부모의 반대는 없었다. 다만 마사코의 어머니는 "화가란 원래 먹고 살기 어려운 직업이다"며 염려하는 정도였고 마사꼬 여사가 한국으로 떠날 때도 "어려우면 언제든지 일본으로 돌아오라"는 당부만을 했다고 한다.
제주에서의 생활 가장 행복
원산으로 간 후 처음에는 시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곧 근처에 집을 마련해 단 둘이 생활했는데 이중섭은 근처 학교에 그림을 가르치는 교사로 나갔다. 그러나 생활은 시댁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이중섭이 `학교에 월급을 안 받는 대신 자유롭게 가르치겠다'는 조건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 때는 시댁이 옆에 있어 먹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마사꼬 여사는 한국에서의 생활은 제주에서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피란을 간 제주에서는 약 10개월 정도 살았는데 4식구가 단란하게 산 것은 그 때뿐이었다. 그나마 이중섭은 그림을 그려 팔기도 하였고, 배급쌀을 팔아 반찬도 샀다. 지난해 마사꼬 여사는 제주에 이중섭 기념관이 세워져 참가하였는데 "그때의 감회가 새롭게 밀려 왔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피란 간 제주에도 마냥 있을 수가 없어서 아는 군인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나올 수 있는 자금을 도움 받았다. 그러나 마음이 여린 이중섭은 그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부산으로 나오는 데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부산에서 아주 작은 방을 얻어 생활해 나갔다. 이중섭은 항구에 나가 막일을 하면서 가족을 벌어먹이려 애썼지만 역시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그때 일본에서 마사꼬 여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중섭은 차마 그것을 마사꼬에게 보이지 못하고 주머니에 숨기고 다녔다. 그렇게 어렵게 생활하던 차에 일본의 어머니로부터 귀국서가 와 마사코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부산에 남았고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마사꼬와 두 아이 이렇게 셋뿐이었다.
"제가 남편을 억지로 보낸 건 아니지요."
이후 1년 반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만날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이중섭이 시모노세키를 통해 도쿄로 왔었다. 당시 이중섭은 밀항이었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동경까지만 오는 증명서를 써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사람으로부터 중섭은 "당신도 나중에 유명한 화가가 될지 모르는데 명예에 훼손될 일은 안하는 게 좋으니 반드시 기일 안에 돌아와 주십시오"라는 다짐을 받았다. 그런데 이 대목이 한국에서는 잘못알려졌다고 마사꼬 여사는 아쉬워했다. `법적인 문제에 의해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갔는데도 한국에서 나오는 책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는 마치 그녀가 남편을 억지로 돌려보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모노세키를 통해 들어온 그 한 번으로 이중섭과의 만남은 마지막이 되었다. 물론 그때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이중섭의 병세가 악화되어 돌아올 수 없게 되고 편지 정도로 간신히 연락되었다. 그녀가 이중섭을 따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국에 가면 온가족이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아이들과 일본에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 돌아온 마사꼬 여사는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친정집의 반을 외국인들에게 임대하여 주고 임대료로 생활을 했고, 마사꼬 여사가 양재와 수예를 해 생활비를 보탰다고 한다.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남편에 대한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한국의 조카딸(이중섭의 조카 이영진 누나의 딸들)들이 보고 와 몹시 울었다더군요. `우리 삼촌은 그런분이 아니었는데...외숙모는 차라리 안보는 게 낫다'고 하면서요. 한국에서는 제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드라마틱하게 하려고 그러는지 아주 특이한 사람으로 만들어요. 물론 남편에게는 보통사람들과 다른 부분도 있었고 예술가적인 기질이 있었던 사실이죠. 그러나 지금껏 이중섭을 인정해 주는 것은 그에게 인간적인 따뜻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죠."
마치 어린애 같아 아이들에 대한 사랑도 별로 몰랐던 것이 남편 이중섭이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자식에 대한 정이 깊어져 갔다. 편지와 엽서 그림 속에는 아이들의 그림이 많았고 그 그림 안에는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이 배어 나왔다. 도쿄 세타가야에는 타이세(タイセ)라는 한 표구점이 있다. 타이세는 태성(泰成)이라는 한국이름을 일본식으로 풀어쓴 것이다. 그의 일본에서의 풀네임은 어머니의 성을 딴 야마모토 야스나리. 한국의 천재화가 이중섭의 둘째 아들 태성씨가 운영하는 표구점이다. 1946년 한국에서 태어나 4살 되던 해 어머니 마사꼬, 형 태현(일본명 야스가타)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 관한 기억을 갖고 있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던가 보다. 그가 조국을 떠나올 때의 기억은 다만 부산에서 일본으로 올 때 타고 온 배의 밑바닥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아버지에 대한 한 토막 기억도 남아 있지 않은 그이다.
그러나 태성씨는 아버지를 잘 알고 있다.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했다. "어려서 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러브레터나 그림엽서를 보는 게 낙이었죠. 이노카시라에 살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보내 왔어요. 아버지의 편지나 엽서를 보면 나도 몰래 즐거워지고 아버지가 늘 우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려서 태성씨는 그림공부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유명한 화가의 아들이니 소질이 있지 않나 해서 어머니 친구가 운영하는 그림교실에 1년간 다닌적이 있지만 소질이 없어서 그만 두었지요." 앞으로 태현씨의 소망은 예술의 거리 도쿄 긴자(錦座)에서 아버지 작품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비교적 호수가 큰 작품들은 이미 공개되었고, 가족의 손을 떠나 버렸다. 그러나 은박지 그림 몇 점, 수채화 그림엽서 등 20-30여점의 소품이 있어 자그마한 전시회를 열만한데 이를 통해 일본에 아버지의 작품을 알리고 싶다는 것이다. 태성씨는 아버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꺼리지 않는 편이다. 반면 형인 태현씨는 일절 아버지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의 친구들을 비롯해 주변사람들은 태현씨가 없는 자리에서는 태현씨를 가리켜 이름 대신 '황소 어디 갔니'라고 하면서 '황소'라는 별명으로 부르곤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주위 사람들은 아버지 이중섭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태현씨가 황소의 이미지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태성씨도 한때는 아버지가 한국인임을 숨기고 산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친구들끼리 장난를 치다가 "조센징"이란 욕이 나올 때는 마치 자신을 가리키는 것같아 상처가 되었던 기억이 있었다. 태현씨는 슬하에 딸(23세) 아들(21세)을 두고, 태성씨는 고3인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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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사랑과 예술의 40년
그는 1916년 4월 10일 平原郡 朝雲面 松千里에서 상당히 부농이었던 이창희(李昌憙)의 막내로 태어났다.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나와, 평양 제2고보에 떨어지고 오산중학교에 입학, 이후 형이 원산으로 이사를 했다. 형은 원산제일백화점, 문방구, 악기점 등 무역을 하여 사업수완을 보여 가세를 확장해 갔다. 그는 1937년 유학길에 올랐다. 미술연구소에 1년을 다니다 1938년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 후 자유분방한 도쿄문화학원에 전학하였다. 졸업하던 해 일본 화단 추상화 그룹전에 「소」를 출품해 협회상을 수상했다. 도쿄 유학시절 이미 은지화를 시작했는데 이후 1952년부터 다시 은지화에 몰두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12월 원산을 출발 해군 후생성 소속 발동선 동방호를 타고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부산에 도착하여 범일동 적산창고에 마련된 피란민 수용소에 수용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으로 나온 중섭은 부두 노동이나 운수회사의 인부 노릇을 하며 가족 부양을 했지만 궁핍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아내 마사꼬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인 수용소의 제3차 귀환선 편으로 일본으로 그해 12월 돌아갔다. 부산에 남은 중섭은 극빈의 방랑생활로 일관했으며 매일 과음과 무절제한 생활로 황폐해 갔다. 정신병적 징후를 보인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1955년 벽두 미도파 화랑에서 중섭은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1백호 미만의 45점이었다. 미도파전이 끝나자 2월 중섭은 대구로 내려갔다. 대구 생활부터 중섭의 정신분열증 현상은 두드러져서 1956년 9월 6일 11시 40분 세상을 떠나 시신은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향년 40세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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