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힌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 비평사. 197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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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3-11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에 막 올라갔을 때, 성균관 앞의 어느 찻집에서 화선지에 적힌 이 시를 보고 그저 무작정 좋아서 샀던 시집이다. '눈사람'이라는 시를 찾기위해 거의 십년만에 펼쳤는데...그렇게 '어렸던' 시절에도 이런 시를 좋아하다니.. 스스로 놀랍다. 교사가 된 후로 서서히 그리고 갑자기 내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이 시집을 손에 넣은 그때 이미 징조를 조금씩 보였던 것은 아닐까...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가난, 결핍, 아픔.. 그런 '슬픔'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