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사람들이 잠든 새벽거리에
가슴에 칼을 품은 눈사람 하나
그친 눈을 맞으며 서 있습니다.
품은 칼을 꺼내어 눈에 대고 갈면서
먼 별빛 하나 불러와 칼날에다 새기고
다시 칼을 품으며 울었습니다.
용기 읽은 사람들의 길을 위하여
모든 인간의 추억을 흔들며 울었습니다.

눈사람이 흘린 눈물을 보았습니까?
자신의 눈물로 온몸을 녹이며
인간의 희망을 만드는 눈사람을 보았습니까?
그친 눈을 맞으며 사람들을 찾아가다
가장 먼저 일어난 새벽 어느 인간에게
강간당한 눈사람을 보았습니까?

사람들이 오가는 눈부신 아침거리
웬일인지 눈사람 하나 쓰러져 있습니다.
햇살에 드러난 눈사람의 칼을
사람들은 모두 다 피해서 가고
새벽 별빛 찾아나선 어느 한 소년만이
칼을 집어 품에 넣고 걸어갑니다.
어디선가 눈사람의 봄은 오는데
쓰러진 눈사람의 길 떠납니다.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 비평사.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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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3-11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여년 전에나 읽었을 이 시의 제목과 시인이 왜 갑자기 생각난 걸까? 지금 읽어도 이 시는 약간 섬뜩하다. 희망을 너무 처연하게 읊고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이 시를 왜 갑자기 기억하게 된 걸까? 그리고 이 시는 왜 나의 머리 속에서 십여년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