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과 SOFA


1951년 1월의 피난열차는 화물칸 지붕 위에까지 피난민들이 올라타고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열흘이 걸렸다. 열차 지붕 위에서 피난민의 어린 자식들은 얼어죽고 굶어죽고 졸다가 떨어져 죽고 바람에 불려가 죽고 터널을 지난 때 머리를 부딪혀 죽었다. 개실 안에는 피아노와 셰퍼드까지 싣고 가는 고위층들도 있었다. 그대 열차 지붕 위에 실려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세 살 먹은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 글을 쓴다. 피난지에서 자라난 유년은 하루 종일 배가 고팠고 1년 내내 배가 고팠다.


미군 보초병들은 이 배고픈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던졌다. 초콜릿 낱개가 백 개쯤 들어있는 박스를 들고 나와서 한 개씩 철조망 밖으로 던졌다. 한 번은 왼쪽으로 한번은 오른쪽으로. 오른쪽으로 계속 두 번 던지다가 갑자기 왼쪽으로. 한 개는 멀리, 한 개는 가까이, 계속 멀리 던지다가 갑자기 가까이 한 개……. 그의 초콜릿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배고픈 아이들은 먼지를 일으키며 우르르 몰렸다. 멀리 던지는 시늉만 하고 던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멀리 쫓아갔던 아이들은 미군 보초병을 향해 쌍욕을 해대며 다시 철조망 가까이 몰려들었다. 그러다가 교대시간이 되면 보초병은 아직도 수십 개가 들어 있는 박스를 통째 던졌다.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몸을 던져 박스의 착지점을 향해 슬라이딩했다. 박스를 움켜쥔 아이는 집을 향해 달렸다. 다른 아이들이 그 뒤를 쫓아갔다. 박스를 움켜쥔 아이는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박스 안 초콜릿 몇 개를 뒤로 던졌다. 한 개는 왼쪽으로, 한 개는 오른쪽으로 그리고 또 한 개는 도랑 속으로. 맨발의 아이들은 도랑 속에서 뒤엉키며 뒹굴었다. 학교에는 전쟁고아가 넘쳐났다. 미군들은 고아원에 구호물자를 나누어주었다. 미군들이 올 때면 고아원장은 학교 아이들을 빌려갔다. 머릿수가 많아야 구호물자를 많이 받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미군들이 고아원에 오는 날,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은 고아건 고아가 아니건 고아원 마당에서 놀았다.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이 자비로운 벽안의 무사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아이들은 “미군은 똥도 초콜릿이다”라고 말했다.


미군에게 얻어먹은 초콜릿의 맛은 황홀한 감격이었다. 아마도 초콜릿의 맛과 그 살포 방식이 주한미군에 대한 한국인들의 근원정서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하다. 주는 자의오만과 받는 자의 수치심이 겹치면서, 주한미군의 패악질은 50여 년 동안 거의 방치되어 왔다. 미군은 주는 자의 오만으로써 자국의 인종 말자 개망나니 병사들의 행패를 감싸왔고, 한국정부는 받는 자의 치욕 속에서 그 행패에 대한 사법적 대응을 포기해 왔다. 도와주었으니까 웬만한 행패는 모른 척해 달라는 이 기막힌 치욕이 이른바 주한미군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정서적 바탕인 것이다.


단언하건데, 배가 고파서 미군의 초콜릿을 얻어먹은 것은 치욕이 아니다. 그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다 버린 닭다리로 UN죽을 끓여 먹은 것도 치욕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을 때, 그것은 불가피한 생명현상이다. 초콜릿이 던져지는 방향으로 몰리던 배고픈 아이들의 민첩한 동작은 생명의 발랄한 힘인 것이다. 이만한 자의식을 회복하기에도 세월이 필요했다. 남을 돕는다는 일은 도움을 주는 편에 지극한 선의의 바탕이 있었다 하더라도 도움을 받는 쪽에는 상처가 될 수 있다. 하물며 도와주었으니까 행패를 묵인하라는 식의 도움은 도움이 아니다. 초콜릿을 얻어먹은 것이 치욕이 아니라, 초콜릿을 이쪽저쪽으로 마구 던지는 것은 그것을 던지는 자의 치욕인 것이다.


미군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전쟁억지력이라고 한다. 그 전략적 정당성을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에서 미군은 그 주둔지역 주민들에 대한 거듭된 패악질로 존재의 근거를 위협받고 있다. 병사들의 행패가 군대 전체의 전략적 존재 이유를 무의미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세상에 이런 군대가 다 있는가. 한․미간에 대등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만이 미군의 위상을 회복하는 길이다.


- 김훈, 『김훈세설-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생각의 나무, 2002. 18쪽~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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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5-03-02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이 글을 꼭 수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