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은 저절로 생기지도 않지만 억지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길은 길이 아닌 곳을 오래오래 다님으로써 길게 이어진다. 길은 인간이 지상에 남긴 자취들 중에서 가장 강인하고 가장 겸손하다. 길은 마침내 산하를 건너가지만 산하와 대결하지 않는다. 산맥을 넘어갈 때, 길은 산맥의 사나움을 건드리지 않는다. 길은 땅의 가장 여리고 순한 곳을 찾아서 구불구불 돌아나간다. 지금은 폐도가 되어버린 대관령의 아흔아홉 굽이나 문경새재의 옛길, 그리고 김정호(金正浩)가 대동여지도 목판에 칼끝으로 새겨넣은 전국의 역참로는 모두 그렇게 강인하고도 겸손한 길이었다.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은 [도로고(道路考)]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은 사람의 집안을 편안케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깊은 그 중요성이 같은 것이다. 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신경준의 길은 아직 상징성을 걷어내지 않은 길이었는데, 그 길은 자연과 인륜, 밀실과 광장, 존재와 존재 사이를 소통시키는 공적 개방성 속으로 겨우겨우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길은 산맥과 강을 이리저리 비켜서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고가는 일의 지엄함을 가르쳐주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자가 그 길의 주인이고, 여행자는 소통의 주체로서 그 길을 가고 또 돌아온다. 그러므로 길은 구조물이 아니고, 인간과 외계 사이의 교섭의 자취다. 길은 그 위를 가는 자에게는 통로이지만, 길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풍경이다. 그 풍경은 인간과 자연의 사이를 비집어가면서 가늘게 이어진다. 정동진의 바다가 풍경으로서 아름다운 까닭은 산과 바다 사이로 한 줄기 길이 뻗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이 산과 바다를 사람의 마을 쪽으로 끌어당겨 준다. 그 길은 갈 수 있는 땅의 맨 가장자리에서 갈 수 없는 곳의 아름다움을 알게 한다.
고속도록는 길이라고 할 만한 굴곡이나 표정을 거느리지 않는다. 고속도록에서는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여정이 축적되지 않는다. 서울과 부산의 사이가 증발해 버린다, 서울이 있고, 그 다음이 부산이다. 고속도로는 길이라기보다는 벽과 벽 사이에 뚫린 편리한 구멍과도 같다. 고속도로는 산을 돌아가지도 않고 산을 넘어가지도 않는다. 고속도로는 산밑을 뚫고 간다. .....
김훈, [김훈세설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생각의 나무, 2002, 149쪽~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