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꼬마리씨 하나

                          -  임영조

멀고 긴 산행길
어느덧 해도 저물어
이제 그만 돌아와 하루를 턴다
아찔한 벼랑을 지나
덤불 속 같은 세월에 할퀸
쓰라린 상흔과 기억을 턴다
그런데 가만! 이게 누구지?
아무리 털어도 떨어지지 않는
억센 가시손 하나
나의 남루한 바짓가랑이
한 자락 단단히 움켜쥐고 따라온
도꼬마리씨 하나
왜 하필 내게 붙어 왔을까?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예까지 따라온 여자 같은
어디에 그만 안녕 떼어놓지 못하고
이러구러 함께 온 도꼬마리씨 같은
아내여, 내친 김에 그냥
갈 데까지 가보는 거다
서로가 서로에게 빚이 있다면
할부금 갚듯 정주고 사는 거지 뭐
그리고 깨끗하게 늙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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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4-10-1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엠토피아 시 메일>

―운명과 자유, 그리고 우연

아하, 그렇군요. 사람의 인연, 특히 부부 사이를 이렇게 재미있게 노래한 시도 있군요. 어느날 산행길에서 문득 바지가랭이에 묻어온 도꼬마리씨 하나, 그것은 우연같지만 어쩌면 필연이고 숙명적인 것인지도 모르지요. 부부란 그렇게 우연인 듯 또는 필연처럼 이러구러 한 평생 서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가는, 살아갈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대체로 운명과 자유, 그리고 우연이라는 세가지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몇째 아들 또는 딸로 태어난다는 것은 운명에 속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살아가면서 학교를, 사람을, 직업을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그 선택이란 바로 자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로서 우연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지요. 운명과 자유, 그리고 우연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한 평생이 이어져 가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바로 운명과 자유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우연의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이 시는 바로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쳐 온 삶과 인연의 문제들을 기발한 착상으로 형상화하여 삶의 본질의 한 측면을 깊이있게 투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김재홍: 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