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수많은 학교의 교훈으로, 수많은 가정의 가훈으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와 있다. 너무 흔한 '진리'라는 이 두 글자에 대한 예찬은 플라톤 이후에 수없이 있어왔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여정은 쉽지 않다. 진리는 거추장스럽고 때로 우리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다.

우리가 쉽게 환상에 빠지는 것은 환상이 우리 마음을 달래 주고, 근심스러운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며, 우리의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가 그런 달콤한 환상 속에 편하게 있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의 틀과 상식을 깨고, 지적 안일에서 벗어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플라톤『국가』에서 동굴 우화의 형식을 빌어 진리가 얼마만큼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동굴에 갇힌 죄수는 동굴 벽에 그려진 거짓 환영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 동굴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그가 용기를 내고 동국 밖을 나왔을 때 태양빛에 넋을 잃게 된다. 동굴 속으로 돌아가 동굴 바깥 세계의 일들을 동료 죄수들에게 들려주자 믿질 않는다. 여전히 벽에 비친 자기 그림자의 환영에 빠져 있으며, 그것에 대한 검토조차 거부한다.

진리를 발견하는 여정자체도 힘들지만, 그렇게 발견한 진리가 우리의 마음과 육체에 안정을 가져다주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진리의 발견은 거부감과 일종의 불안감을 몰고 온다. 진리는 전설과 신화, 거짓 믿음과 충돌함으로써 세계에 대해 더 이상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를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간다.







짧다면 짧은 생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불편한 진리대신 환상이 더 좋은 것일 수 있다. 환상은 세상에 대한 해석을 쉽게 해주며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어쩜 환상 자체가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는 기본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말했듯이 환상에는 끝이 있다.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에게 요구한 것도 부르주아 계급이 제공하는 환상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자기가 아무리 환상 속에 머물러 있으려고 해도 벌거벗은 알몸은 결국 그러날 수밖에 없다.

진리가 불편하여 환상 속에 위안을 받을 수는 있지만 환상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가진 환상에 대해 검토해보자. 환상의 위로에 빠져 난 잠시 편한 건 아닌지? 그 환상의 위로가 나를 지속적인 노예상태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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