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예종을 지켜라
창비주간논평. 2009-06-10 오전 11:08:02
조광희 / 영화제작자
이 정부에는 매뉴얼이 있다. 이 매뉴얼이 문서 형태의 '외장형'인지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내장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경과로 보았을 때 누구나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1. 이 정부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은 제거해야 한다.
2. 스스로 사라지지 않으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사라지기를 권유하거나 협박한다.
3. 그래도 버티면 검찰을 움직여 수사를 하거나, 국세청을 움직여 세무조사를 하거나, 감사원 또는 정부부처가 감사를 한다.
4. 유감스럽게도 비리 수준에서도 코드가 달라 먼지밖에 나오지 않으면 "깨끗한 척하더니 어떻게 먼지가 나올 수 있느냐"고 언론을 통해 모욕을 준다.
5. 모욕을 받고도 상대방이 물러서지 않으면 먼지를 바위라고 우겨서 기소하거나 제거한다.
6. 상대방이 소송을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그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7. 빈자리는 실업난으로 고통받아온 동지들로 채운다.
8. 상황 끝.
이 매뉴얼에 따라 제거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저항하다 제거되어 재판을 하고 있는 인사로는 KBS 정연주 사장, 문화예술위원회 김정헌 위원장 등이 있고, 더럽고 치사해서 조용히 스스로 물러나는 바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은 훨씬 많다. 중요한 자리에 있지 않았거나, 유명인사가 아니어서 저항할 힘도 없이 제거된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이 매뉴얼에 따라 진행한 사례 중 실제로 정부가 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비록 야비하기는 해도 참아줄 수 있다. 문제는 그토록 법질서 수호를 외치는 정부의 행동이 불법인 경우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동지가 아무리 안쓰러워도 법에 맞지 않으면 참아야 한다. 하지만 이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정부의 마인드로는 참는 게 이해가 안된다. CEO가 사원에 대한 전적인 인사권을 가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기업이 아니라 공동체다.
문화부의 해괴한 '역작' 한예종 사건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 사건은 이 매뉴얼을 특별히 충실하게 실행해온 문화부의 회심의 역작이다. 듣도 보도 못한 인터넷 매체가 앞서고, 자기 대학의 발전을 꾀해야 할 귀한 시간을 한예종 개혁에 바치겠다는 이상한 정열에 사로잡힌 일부 다른 대학 교수들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문화부는 한예종 사상 유례가 없는 집요한 감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통섭교육(학제 융합교육) 중단, 관련 교수 중징계, 이론 관련학과 축소, 서사창작과 폐지 등을 요구하고 황지우 총장을 중징계 처분하겠다는 방침도 전달했다. 황지우 총장은 이에 항의하며 총장직을 자진 사임했는데, 문화부는 총장직을 중도에 사임하면 교수직도 유지가 안된다는 해괴한 논리를 펴고 있다. 문화부의 뜻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교과과정을 정부의 뜻에 따라 바꾸고, 맘에 안 드는 교수들을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매뉴얼에 따라 진행된 결과의 어처구니없음에 대해 세세하게 다투는 것은 이 정부 들어 호황(?)을 맞은 민변 변호사들의 변론에 맡기고, 본질에 대해 바로 이야기하자. 다행히 이야기의 단서는 문화부 차관이 제공했다. 그는 며칠 전 한예종을 방문해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우파 총장이 임명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발언을 했다고 보도되었다. 이것은 일련의 과정의 본질을 자백한 셈인데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우파 정권이 들어서서 정무직인 장관을 우파 인사로 임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총장의 임기가 만료되고, 정부가 총장을 임명할 권한이 있어 입맛에 맞는 인물을 기용하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해진 임기를 무시하는 게 당연한가. 국민의 공복인 공무원을 동원해 이례적인 감사를 하면서 사퇴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교수직조차 빼앗으려 하는 것이 그렇게 당연한가. 정부가 교과과정을 함부로 뜯어고치고자 하는 것이 어떻게 당연한가. 이것은 헌법이 보장한 학문과 예술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국가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할 대학과 시민사회에 대한 테러일 뿐이다.
좌파·우파·파시스트의 본뜻
현정부나 그 지지자들이 사용하는 '좌파'니 '우파'니 하는 표현은 그들의 머릿속에서만 작동하고, 그에 동조하는 매체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된 허구적인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좌파'란 자본주의의 폐해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 자본주의체제에서 사회경제적 약자인 사람들에게 깊은 연대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정상적인 지식인이라면 자본주의의 폐해에 관해 어떻게 우려가 없을 수 있는가.
그러한 우려를 제도에 반영한 '제대로 된 자본주의'는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복지국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적어도 온정적 보수주의를 지향한다. 정부부처 내에 있는 공정거래위원회나 보건복지부조차 그러한 우려가 제도화한 것이다. 이를 넘어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가지고 있어 실제로 '좌파'로 불릴 만한 사람들은 기껏해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지지자들이며 10%가 채 안된다. 이들조차 선거와 민주주의와 인권과 법치주의의 틀 내에서 고민의 해결방법을 찾고 있을 뿐이며, 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그러한 신념을 가질 당연한 헌법상 권리가 있다.
이른바 '우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스딸린'과 '북한'과 '문화혁명'을 연상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좌파'란 용어는 교활하게 과장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그 범주에는 사실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군사독재시대의 암울한 상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갈구하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고 노래했던 황지우 시인이 어떻게 '좌파'인가. 그가 '좌파'라서 그대들의 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대들은 자신들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대개 파시스트라고 부른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삶의 지표로 삼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좌파'라 칭한 것과는 달리 허황된 레토릭이 아니다.
건전한 '우파'가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는 단어인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합성어다. 자유주의는 국가의 권력과 기능이 제한적이라고 보며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신념이고, 민주주의는 권력이 다수의 사람들의 수중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민주주의만이 자유주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고, 자유주의 국가에 의해서만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는 통찰의 표현일 것이다.
그다음은 우리 차례일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누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인가. 광장을 폐쇄해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유린하고, 정부와 다른 의견을 표현했다고 '미네르바'를 구속하고, 인터넷에서 말할 자유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인가.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인 수사권, 감사권, 인사권을 자의적으로 휘두르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인가. 마음에 안 든다고 절차를 무시한 채 쫓아내고, 교과과정에 간섭해 학문의 자유를 훼손하려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인가. 그대들이 '좌파'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자유민주주의자이고 그대들은 오히려 파시스트에 가깝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가. 게다가 그대들은 사실을 왜곡하고, 사람을 모욕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예의도 저버린다.
한예종 사건은 좌파 우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유사 파시즘의 싸움이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파렴치의 다툼이다. 시민에게서 광장을 빼앗고, 네티즌을 인터넷에서 옥죄고, 방송국을 접수하고, 나아가 캠퍼스마저 유린하려는 세력으로부터 한예종을 수호하자. 시민사회의 학문과 예술의 자유마저 위협한다면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역사가 무수히 교훈을 준 것처럼, 그 다음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차례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2009.6.10 ⓒ 조광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