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연민의 연애학적 고찰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한겨레  
 

Q 스스로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 여기는 애인한테 지쳤어요


1) 남친은 섬세하고 취향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시니컬한 태도와 예술적 심미안, 그리고 뭔가 비극적인 분위기에 많이 끌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우울한 태도에 저도 같이 지쳐가는데다 특히 그의 생활력이 문젭니다. 서른이 넘었는데 저한테 용돈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곧 일자리 구하겠지, 괴로울 텐데 아무 말 말아야지 했습니다. 하지만 벌써 1년 넘었네요. 이젠 저한테 용돈 받는다는 사실을 괴로워하긴 하는 건지조차 의심이 갑니다. 이 사람, 과연 바뀔 수 있을까요.


2) 제 애인은 너무 비관적입니다. 제가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게 얼마나 자신에게 상처를 준 줄 아느냐며 북받쳐하는데, 환장합니다. 처음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빌었습니다. 여린 그녀를 제가 상처 입혔단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했죠.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처참한지 설명하는 걸 들으면 들을수록, 더 이해가 안 갑니다. 가정 형편이 나쁜 것도 아니고 외모, 학벌이 빠지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항상 슬퍼합니다. 제가 진이 다 빠져버립니다. 대체 그녀는 왜 그러는 걸까요.



A 0. 오, 재밌다. 첫 사연만 왔더라면, 그냥 몇 대 쥐어박고 헤어져, 했을 게다. 근데 두 번째 사연의 답지로, 남녀가 그 감정을 어떻게 연애 전략으로 삼는가,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할 좋은 쾌다 싶어, 오늘은 이걸루다가 가 보련다.



1. 누구나 갖는 근원적 연애 공포가 있다. 수컷은 거절 공포, 암컷은 유기 공포가 그것이다. 수컷에게 거절은, 자신의 생물학적 남성성 자체가 거부당하는 경험이다. 수컷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거다. 이거, 자존심이 상하는 게 아니라, 무서운 거라고. 여자들, 이해 못한다. 반면, 암컷에게 있어 버림받을지도 모른단 공포는, 흡사 아무 증빙도 없이 전 재산을 치른 후 오로지 상인의 양심에만 맡겨진 소비자의 불안과 그 속성이 유사하달까. 더구나 경제적 불안보다 근본적인 존재론 차원의 공포. 하여 이거, 남자들, 이해 못한다. 암컷의 절대화폐인 섹스와 애정을 완불하고도 정서적 쪽박은 물론 아무런 부양 없이 임신한 채, 유기될지 모른다는 기저 공포는, 수컷의 거절 공포만큼이나 생물학적이기도 하다. 하여 그 공포, 양자 모두 진화적으로 축적된 공포라 보는 게 옳을 게다.

2. 이제 사례 보자. 두 사례 공히 키워드는 자기 연민. 지가 지를 긍휼히 여기는 거지. 이거 심리적 치유와 방어 기능, 분명 있다. 비루하느니 차라리 비극적이면, 조소나 힐난 대신 동정과 연민, 얻으니까. 게다가 희생자는 자신이기에 비난할 권리, 오로지 자신에게만 귀속된다. 얼마나 안전한가. 그렇게 지가 주인공인 비극 한 편 쓰는 거다. 하여 자기 연민은 필연적으로 무대와 관객을 필요로 한다. 저도 사실은 저 혼자 만든 감정이라는 걸 의식, 무의식으로 인지하기에. 그거 실제라는 거, 입증해야 한다. 하여 그들은, 그들이 선정한 관객 앞에서, 스스로 장치한 무대에 올라, 세상으로부터 고통 받는 가련한 주연이 됨으로써, 모든 잘못과 책임의 면책권을, 마침내 획득해낸다. 고로 본인, 그거 나르시시즘으로 친다. 지 혼자 생쑈니까. 본인 언어로는, 비련의 딸딸이, 되시겠다. 여기까진 남녀, 같다.

3. 차이는 그로 해결코자 하는 공포의 속성이 다른 데서 기인한다. 남자들의 자기 연민, 통상 능력과 유관하다. 다른 수컷들과의 경쟁 우회하며 거절 공포 타개하는, 하나의 생존기법인 게라. 하여 그들의 비탄은 스타일이요, 고독은 패션. 수컷 공작의 슬픈, 꼬리라. 남자들의 자기 연민, 그렇게 섬세하게 찌질한, 일부 수컷들의 필살기.

반면 여자들, 능력과 무관하다. 정도 차이 있을 뿐, 대다수 여자들, 본능적으로 구사한다. 예를 들어 그들, 혼자 울며 거울 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에게조차 스스로 관객이 된다. 어떻게 비칠 것인가. 그렇게 남자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하여 예쁘게 슬플수록, 만족스럽다. 때로 울며 웃는 건, 그래서. 모든 연애하는 여자들, 그렇게, 배우다. 마치 탑에 갇혀 구출 기다리는 공주처럼, 스스로를 연약하고 가련한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도저히 버림받아선 안 되는 희생자이자 보호받아 마땅한 소녀가 되어, 그들의 근원적 불안-유기 공포에 대처하는 거라.



 

»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4. 결론이다. 수컷들 자기 연민이 모성 본능에 기대는 기만적 구애 행위라면, 암컷들 자기 연민은 버림받지 않으려는 방어적 자구 행위다. 그런 전차로 본인은 전자를 사기로, 후자를 연기로 친다. 대처, 다를밖에. 먼저 우울한 남자. 그가 바뀔 것이냐. 안 바뀐다. 왜냐. 통하니까. 그건 그가 나름대로 개발해 온 생존술. 그걸 바꾸라는 건, 건축노동자에게 근육을 포기하라는 거다. 둘 중 하나다. 부양하거나, 떠나거나.

슬픈 여자. 왜 그런지는 말했다. 여자들 모두, 일정 정도, 그러하단 것도. 그녀 케이스는 과잉일 뿐. 그럼 남는 건 하나. 어디까지 받아줄 거냐. 그 기준, 자신밖에 못 세운다. 그렇게 선 그어 상대에게 인지시키는 수밖에. 참고로 그 수용의 한계선 이어붙이면, 자신이 타고난 본연의 남성성이, 제 크기를 드러낸다. 참으로, 재밌게도. 하여, 선은 제 그릇대로, 긋는 거다. 그건 죄가 아닌 거다. 그 이상 하단, 말라 죽으니까. 인샬라.


PS - 자기 연민 없는 자들, 사이코패스거나, 자기객관화 됐거나 혹은 돼지거나.

김어준 딴지 종신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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