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통신] 교양교육 홀대하는 일본의 대학

 

현대인에 필요한 교양은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다
폭격을 당하는 쪽의 아픔을 상상하는 힘은 평화를 쌓는 기초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결여한 채 취직 · 실용 위주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가는 젊은이들이 나로선 불안하기 짝이 없다

[한겨레]2005-07-15 06판 M07면 2740자 특집 기획,연재

여름밤의 꿈(1)


마침내 여름다워진 6월 하순 어느날 밤, 학생들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의 연극을 보러 갔다. 공연 제목은 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작, 하이너 뮐러 연출의 〈아르투로 우이의 흥륭〉이다. 아주 잘 된 공연이어서 학생들도 매우 좋아했다. 몇몇 학생 은 다른 날 또 한번 싸지 않은 표를 사서 보러 갔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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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하는 대학에서 내가 맡고 있는 것은 전문적 연구 분야가 아니라 교양교육 분야다. 한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돼 있는지 모르겠으나 일본의 대학교육에서는 지난 20여년간 교양교육이 경시되는 추세였다. 어학교육은 예외지만 다른 교양교육은 대체로 ‘도움이 되지 않는 취미’처럼 간주돼 왔다. 거기서 가치기준이 되는 것은 ‘취직에 유리한가, 아닌가’, ‘실용적인가,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실용주의 일변도의 교육이 여러가지 폐해를 낳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수준 높은 문학작품 하나 읽지 않은 채, 미술관에도 극장에도 발길 한번 돌려보지 않은 채 대학을 나가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가토 슈이치는 교양의 필요성을 흔히 자동차에 비유한다. 전문가나 기술자들이 영지를 모으면 더 빠르고 성능 좋은 자동차를 제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동차를 손에 넣은 다음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을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전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교양이다. 여기서 ‘자동차’를 ‘무기’로 바꿔 놓고 보면 이 비유의 중요성이 절실하게 다가올 것이다.

교양이란 영어로 말하면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다. 그 본래의 의미는 ‘노예적 또는 기계적 기술’과 대치되는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학예(Arts)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인’은 예전에는 특권적 신분의 남성에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그렇지 않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교양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폭탄공격을 당하는 쪽의 고뇌와 아픔을 상상하는 힘은 전쟁에 저항하고 평화를 쌓기 위한 기초적 능력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초적 능력을 결여한 채 젊은이들이 사회로 나가는 것이 나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나는 대학에서 두 과목의 세미나 진행을 맡고 있다. 하나는 ‘타자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인데, 지난해까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증인의 작품을 숙독했다. 올해는 하라 다미키라는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있다. 하라 다미키는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에서 원자폭탄 피해를 당했다. 그 참상을 직접 지켜보고 평화를 위한 증언을 자신의 사명이라 믿게 된 그는 〈여름 꽃〉 등의 뛰어난 기록문학을 남겼으나 1951년 3월13일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조선전쟁(한국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전황을 뒤집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보도가 그의 섬세한 신경을 찢어놓은 것이다. 하라 다미키와 트루먼, 어느 쪽이 교양이 풍부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름이 올 때마다 일본에서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관련 기념행사가 열린다. 그러나 하라 다미키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작품을 깊이 읽으려는 사람은 적다. 내 학생들 중에도 누구 하나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없었다.

많은 학생들에게는 일본이 침략전쟁에서 여러 민족들에게 가해자였다는 기억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인 자신의 피해 기억조차도 모두 실감하기 어려운 ‘옛날의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1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500년 전이나 ‘지금’이 아니면 모두 ‘옛날’이다. 그들의 시야에는 ‘옛날’과는 다른 ‘지금’이 있을 뿐이다. ‘옛날’이 어떠했든, 또 ‘내일’이 암흑이 되든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진정한 교양,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함양하도록 하는 일이 쉬운 노릇은 아니다. 가르치는 쪽도 곤란한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또 하나의 세미나는 ‘예술을 통해 사람의 죽음과 삶을 생각한다’는 좀 색다른 것이다. 미술, 음악, 영화, 연극 등 뛰어난 예술작품을 접할 기회를 학생들에게 줌으로써 잠자는 감성을 깨우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학생들과 미술관에 가서 자유롭게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던 학생들이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도 즐거워지지만 갈 길이 멀다. 이번에도 이 강의를 듣는 학생들과 베를리너 앙상블을 보러 간 것이다. 내 나름의 시행착오 과정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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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너 앙상블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주재자로 해서 전후 동베를린에서 창설됐다. 오랜 기간 동독만이 아니라 사회주의권을 대표하는 일류 극단이었으나 독일 통일 뒤 극단은 큰 변화에 휩쓸렸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2002년에도 일본에 와 〈리처드 2세〉를 공연했는데 그걸 본 나는 베를리너 앙상블이 건재하다는 걸 확신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극을 공연하면서 그 조준은 명백히 현재의 ‘테러와의 전쟁’ 비판에 맞추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연출가·배우들과 관객의 대화 시간이 마련됐다. 동독 출신의 배우와 서독 출신의 배우가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면서 양쪽의 장점을 살려 새로운 앙상블을 만들어가겠다고 한 말이 내 인상에 남아 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대망의 〈아르투로 우이의 흥륭〉을 가지고 그들이 다시 온 것이다. 이 작품은 브레히트가 망명지인 미국에서 1941년에 쓴 것이다. 히틀러의 권력탈취 과정을 시카고의 똘마니가 보스 자리까지 올라가는 과정으로 바꿔놓은 풍자극이다. 이번 공연은 1995년의 하이너 뮐러 연출작이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에. ■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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