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우의 최후진술



오늘 결심공판에 참석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후진술문을 올립니다.


이시우 최후진술문




인사
한 선생님께서는 다른 판사가 입정할 때는 일부러 일어나지 않는데 유일하게 한양석판사님이 들어오실 때는 일어나서 예를 갖춘다고 하셨습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컸던 분이 그럴 정도로 누가 봐도 공정한 재판을 진행해 주셨습니다. 변호사님에게나 검사님에게나 피고인인 저에게나 증인들에게까지도 치우침 없는 공평한 배려로 경청으로 재판을 이끌어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방대한 분량의 수사기록이란 말을 번번이 되뇌이실 정도로 과중한 재판준비를 해오시느라 수고하신 검사님께 또한 수고의 인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법에도 양심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시고, 예의 변호사나 법조인이라면 가질 권위주의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인권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념으로, 성심과 성의를 다해 무료 변론을 해주신 이정희변호사님을 비롯한 민변변호사님과 대인지뢰피해자들에 대한 애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배려로 혼신을 다해주신 김다섭 변호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정중히 드립니다. 문정현신부님을 비롯 거의 빠지지 않고 재판에 참석해주시며 무언의 기둥이 되어주시고 역사를 엄숙히 기억할 사관이 되어 주신 방청객여러분들께도 성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보수단체의 어르신들이 열심히 참석해주시다가 저의 보석출소이후에는 단한명도 참석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분들은 복도에서 돈을 받고 동원된다 어쩐다 소리가 들렸지만 설령 돈을 받고 오셨어도 나름의 경험과 신념에 기초하여 이 자리를 하나의 역사의 장으로 생각하고 오셨던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신념을 돈으로 동원한 사람들이 잘못일 것입니다. 여러 어르신들과 서서히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혀가며 대화하고 경청할 기회를 갖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소외
겨울의 언땅과 찬바람은 그저 피해다녀야 할 대상이었지만 저는 오랜동안 집을 나와 길 위에 서고서야 겨울의 언땅을, 허공의 찬바람을, 그들의 고독했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빛과 볕만을 추구하는 사람의 관심과 무관하게 그늘진 땅 찬바람이 존재하듯 세상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버려진 채 제 스스로 버티며 살아남고 있는가 다시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길위에서 삼보일배 명상을 하는 중에 무엇인가 번쩍이는게 있어 눈떠보니 라이터쪼가리였습니다. 문득 그것은 쓸모 없어져서 버려진 것인가? 아니면 버려져서 쓸모 없어진 것인가? 를 생각해봅니다. 한번 버려진 것이 본래의 것과 재결합하여 제구실을 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현실에서의 진정한 몰락과 실패는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파괴보다는 관용적인 것으로 생각되어졌습니다. 그러나 파괴보다 더 가혹한 것은 버려지는 것입니다. 버리는 자는 고의로 버릴 수도 있고 실수로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쓸모없어서 버려질수도 있지만 버려졌기 때문에 쓸모없어진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 무엇인가를 고의로나 실수로나 버린 적이 없는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사회에서 국가보안법사범이 된다는 것은 버려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국가보안법으로 갇혀있는 이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많은 분들이 있는 한편, 당사자가 체포, 구속되고 언론으로, 입소문으로 알려지는 순간 세상의 대부분은 우리를 외면했습니다. 차가운 감옥방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 외면과 고립입니다. 술먹을 때는 형제를 자처하는 사람이 천명이나 되었는데 급한일을 당하고 나니 함께하는 벗이 단한명 없더라는 명심보감의 첫 문구가 감옥에 갇히는 순간 느끼게 되는 우리들의 공통된 심정입니다.
국가보안법을 코웃음치며 아직도 그런법이 남아 있었는가 하고 화답하던 이들에게도 국가보
안법은 여전히 공포였습니다. 출소 후 재판을 위해 증인과 증거자료를 부탁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가 무관심이 아니라 사실은 두려움임을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부탁한 것조차 부담스러워 할 때 저는 더이상 부탁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증거자료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저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1년전 일심회조작사건이 터지자 저 또한 그들에게서 점쟎게 눈을 돌렸습니다. 시골에 산다는 것은 그런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NK조선에 실린 선군정치선전화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최화섭,김맹규선생님을 잡아넣었을 때는 아직도 이런 짓을 하는 공안기관의 한심한 작태에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상대할 가치를 못느껴 역시 외면했습니다. 만약 그때 그분들이 저와 연관이 있어서 증거자료를 부탁해왔다면 저는 흔쾌히 응할 수 있었을까? 저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무관심이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의 위장된 표현입니다. 연이어 터지는 국가보안법사건들에 무심한 사이 얼마지나지 않아 뜻밖에도 그 다음 순서는 저였습니다.

강화도로 이사하여 사람들과 정붙이고 살아온 지 여러 해가 되었고 국정원직원과도 식사를 하는 사이가 될 정도였지만 이번 사건으로 저는 간단히 간첩이시우가 되었습니다. 어떤분들에게 국가보안법구속은 곧 간첩으로 쉽게 단순화되었습니다. 설령 무죄 판결이 난다해도 이미 한번 간첩은 영원한 간첩으로 낙인찍히고 말 무서운 구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그 복잡한 과정을 설명할 기회가 인생에 과연 얼마나 될지 그런 순간이 찾아올 수나 있을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이빨이 빠진지 오래여도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란 것을 제 자신과 우리의 태도는 입증해 주었습니다. 일심회조작사건과 저의 사건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저는 결론 내렸습니다. 그들이 감옥에 있어야 한다면 저 또한 감옥에 있어야 하며 제가 석방되어 있다면 그들 또한 석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감옥보다 더한 것이 출소 후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무관심과 외면이 확인될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어야할 사람들이 함께 있지 않다고 생각될 때 고립을 실감합니다. 고립과 그에 따르는 외로움은 공동체에 대한 갈망 때문인 것입니다. 출소 후 먼지 쌓인 작업실을 청소하다 오래된 화집하나를 꺼내들게 되었습니다. 그 화집 속의 그림하나가 바로 저의 그런 처지를 착잡할 정도로 정확히 담고 있었습니다.


그림:  일리야레핀의 아무도기다리지 않았다.

1884년부터 5년에 걸쳐 개작을 거듭한 일리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제 막 유형지에서 돌아온 한 젊은 혁명가를 가족들이 놀란 눈으로 맞이하는 장면의 그림입니다.
혁명가와 마주한 검은 옷의 어머니인 듯한 여인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그의 손을 잡을 듯
하지만 엉거주춤한 자세로서 보이지 않는 얼굴 표정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가 방금까지 앉아 있었을 오래된 비로드천 쇼파의 질감은 낡은 전통과 안정감을 상징합니다. 책상에서 공부를 하다가 몸을 틀어 그를 본 남자아이에겐 기쁨으로 위장했으나 두려움과 불길함을 결국 숨기지 못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막내로 보이는 하얀 옷의 어린 소녀는 기억을 되살려 눈 앞의 '낯선 이'를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그 불안함은 책상밑으로 모아진 발끝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피아노 앞의 여성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당황스러움으로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의 충돌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들보다 먼저 그를 보았고, 거실문을 열어 아직 문고리에서 손을 내리는 것조차 잊고 있는 문간의 여인은 이제 그를 정면이 아닌 뒷면에서 볼 수 있다는 심리적인 거리 때문에 기쁜 척 해야 할 의무적인 표정대신 가장 여실히 그가 몰고올 불길한 예감을 직감하고 있는 먹먹한 표정으로 목석처럼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긴장된 순간을 초래한 주인공인 혁명가는 기쁨과 반가움, 두려움과 공포가 뒤섞인 감당하기 힘든 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반가움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그들의 시선에 섞인 두려움을 이내 직감하고 더이상은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균형을 잡지 못한 모습이, 영영 그렇게 멈춰 버렸을 것 같이 서 있습니다. 그의 모자를 든 한손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러하듯 가슴 근처로 가 있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어 내려뜨린 채 몸에 붙이고 있는 다른 한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간의 교착된 감정 상태를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과 내딛은 한발은 반가운 감정을 동력으로 하고 있지만 손의 표정과 내딛지 못하고 있는 한발은 가족들의 시선에서 확인한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을 불행과 불길함의 화신으로 만든 가장 잔인한 장치는 햇빛입니다. 모든 가족들의 얼굴과 마루바닥과 심지어 벽지에까지 은은하게 깃들어 있는 안정과 행복, 질서와 조화의 빛은 17세기 네덜란드화가인 페르메르가 이룩한 전통의 완벽한 소화입니다. 그러나 그는 페르메르를 넘어 빛과 어둠의 사상적 의미를 정확히 간파하는 경지를 보여줍니다. 페르메르가 추구했던 이성의 빛이 주인공에게만은 역광의 그늘과 극한 긴장으로 내몰아 세우는 어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 모든 불안과 긴장의 근원이 안이 아닌 밖으로 부터 연유한 것임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10여년전 원작을 마주했을 때 맘대로 울지도 못하게하고 맘대로 감동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던 그 비극미가 출소 후 작업실의 화집을 정리하며 다시 밀려와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130년 전 그림의 장면이 제가 출소 후에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 것은 왜일까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란 멍에를 안고 귀가해야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와 다르지 않은 것은 우리의 시대와 130년 전의 시대가 근본에서 바뀌지 않은 그 무엇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된 계몽과 혁명을 거쳐 보지고 못했고, 식민잔재를 청산하지도 못했으며, 진정한 해방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으며, 전쟁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평화의 가치에 대해서도 사색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활기찬 성장과 그에 따르는 배려를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외양은 선진국과 비슷해졌지만 내면에서 그같은 파란과 역정의 과정이 생략되었을 때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도 누군가는 이 그림 앞에서 자기의 상황과 동일시하는 이가 생겨날 지도 모릅니다.

재판이 끝나기 전이나,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공안기관은 이미 충분히 성공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을 안보의 이름으로 사회에서 배제시키고, 또 그 배제와 소외를 사회가 수용하도록 함으로써 사회를 통제하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질은 다른사람에게 옮겨야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학질을 옮기 전까지 사람들은 학질을 피하지만 막상 옮은 다음에는 다른사람에게 옮기려 드는 것처럼 무서워서 피하든 귀챦아서 피하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국가보안법의 전파자가 되고 전파되는 것의 방관자가 됩니다. 시민사회 역시 이에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모두진술에서 우리몸의 중심은 아픈곳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출소후 저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아픔보다 더 가혹한 것은 소외입니다. 아픔은 그래도 소통되는 상태이며 이미 치유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소외는 아픔이면서도 아픔으로 표현되지도, 인식되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란 점에서 가장 가혹한 고통입니다.


소통
버려진 것이 소통한다는 것은 지극한 정성과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서야 가능합니다. 아무도 관심가져 주지 않는 들꽃이 소통하는 방법을 생각해봅니다. 1cm도 안되는 땅에 박혀 움직일 수도 없는 들꽃은 최대한 자기를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들어 벌과 나비를 유혹합니다. 벌과 나비는 그저 제 욕심을 위해 오는 것이지만 날개며 몸통에 꽃가루를 묻혀 날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다른 꽃에 가서 그 꽃가루들이 떨어져 번식이 이루어지고 들꽃은 들판을 뒤덮습니다. 사람은 들꽃보다 훨씬 진화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지만 소통에서 배제시키는 방식 또한 진화하여 그런 사람이 소통에 성공하기란 때로 들꽃보다도 어렵습니다.

버림받고도 버림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버림이란 구조적 폭력이나 구조적소외를 능히 극복하고 소통에 성공할 수 있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들꽃처럼 간절한 사람, 어느 누구의 주장도 진정성 없는 것이 없습니다. 진정성 있음을 전제로 그 다음은 소통입니다. 소통은 형식입니다. 속으면서도 통할 수 있는 형식입니다. 예술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현실보다 더 위력적으로 소통되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신파가 통하는 시대가 있고 통하지 않는 시대가 있듯이, 거짓과 위선이 통하고, 진실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있습니다. 소통은 사회제도의 한 부분입니다. 국가보안법은 정상적인 소통을 가로막는 제도로 굳어져 있습니다.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향해, 상대방을 위해, 상대방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역설적으로 나를 향해, 나를 위해, 나 스스로를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상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은 언어입니다.

저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삼보일배명상 중에 우연히 저학년으로 보이는 초등학교어린이와 조우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입에 꼬치를 베물어 먹으면서 제 곁에 바짝 다가와서는 제가 일어서기를 기다렸다가 “아저씨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하고 물었습니다. “응 국가보안법에 대한 명상을 하고 있단다.” “ 국가보안법이 뭐예요” 당장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당황되었지만 우선 이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북한 알지?” 라고 말을 시작하려하자 “예 북한 알아요. 북한은 우리의 적이에요.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저는 갑자기 친구들과 휩쓸려 길거리를 지나가던 이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단번에 설명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길을 돌렸습니다. "동무라는 말 있쟎아. 친구를 동무라고도 하쟎아. 그런데 그말은 북한에서 많이 쓰는 말이라 그 말을 쓰면 북한편을 드는 것이라고 해서 감옥에 잡아가둘 수도 있는 법이 국가보안법이란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영재검사가 제가 쓴 글 중에 '종자','해방구',원쑤'등의 단어에 대해 북한에서 쓰는 말이니 북한을 찬양한 것 아니냐는 신문을 받았던 것이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말을 해놓고 그것이 유도된 답을 원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도 안돼요 그런게 어딨어요' 이런 답 말입니다. 그러나 이 어린이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의외의 답을 하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그래요 음... 그럼 그런 말은 쓰지 말아야 겠네" 저는 친구들과 합류하여 사라져가는 그 어린이를 한참동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의 아이일수도 검사님이나 변호사님의 아이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을 적으로만 공부한 이 아이가 통일조국을 어떻게 고민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까지를 고민할 엄두는 나지도 않았습니다. 당장 이 아이가 동무, 인민, 사람중심, 주체 이런말들을 하나씩 지워가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했습니다. 북한을 향해, 북한을 위해, 북한을 상상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말들은 또한 우리의 말들이 아닙니까? 해방이후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쓰이던 ‘인민’이란 말을 언제부턴가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는 ‘국민’이란 말로 ‘인민’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역사는 인민의 자각을 거쳐 국민이 형성되어 왔음을 증명합니다. 개개인으로서의 민중이 국가에 대한 자각과 동일화과정을 거쳐 국민의식이 형성됩니다. 인민의식이 결여된 국민의식은 전체주의와 독재체제에서 등장하고, 강요된 국민의식에 대한 저항을 통해 인민과 민중으로서 존재를 자각하고 새로운 국민의식을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와 법은 상생과 불화의 관계에 있습니다. 자유의 신장을 위해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법이 제정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와 이해에 의해 강요되었을 때 개인은 그에 대한 저항을 통해 소통을 시도하고, 그러한 실천을 통해 주체로서의 개인을 재구성해갑니다. 근대를 연 시민세력이 소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항이었습니다. 
너를 향해, 너를 위해, 너를 상상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나를 향해, 나를 위해, 나 스스로를 상상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해 짐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앞서 선행하는 것이 소통의 자유입니다. 개인은 소외와 고립을 넘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 자신을 재구성해나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소통과 소통을 위한 표현은 개인을 긍정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전제입니다. 사상의 시장, 표현의 시장을 통해 소통여부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통의 주관적의지만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비약의 과정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시장이란 엄혹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국가권력이 이 과정에 개입하면 겉보기엔 통제가 이루어 질 수 있으나 사상과 표현은 지하로 숨어들고 시장외적 질서에 의해 주도됩니다. 사상은 상품보다 훨씬 비제도적이기에 지하화하는 것도 훨씬 쉽습니다. 인위적 조정인 폭력과 제도로 소통과 표현이 통제될 수 있을까요? 국가를 독점한 권력이 사상의 시장에 개입한 것이 국가보안법입니다. 오늘날 주사파를 키운 1등공신은 국가보안법인지도 모릅니다. 뉴라이트의 전향한 주사파라는 이동호증인의 사상이 진정으로 주사파를 이기려면 국가보안법폐지운동에 적극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사파의 손발을 묶고 심지어 입에 재갈을 물리고 토론에서 이겼다고 한다면 누가 그 승리를 공평한 승리로 인정하겠습니까. 서로 계급장을 떼고 나와도 자기검열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토론하다 구속될 각오를 해야하는 주체사상과 비주체사상이 겨룬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러한 토론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경쟁상태하에 있지 않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상대를 상상할 바탕인 내가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 상대와 소통될 리 만무합니다. 결국 나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실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픈 곳이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나 스스로의 소외를 고민하면서 관성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관성
중생이라도 오늘 깨달았다면 그는 부처요, 부처라도 오늘 닫혀 있다면 그는 중생이란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소통을 포기한 상태가 관성입니다. 구속이나 통제가 아니라 소통이 필요없다고 합리화하고 스스로 최면을 건 상태가 관성입니다. 그리하여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관성이란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국보법이 이전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법은 이미 아닙니다. 저처럼 간혹가다 한번씩 잡아들입니다. 이것은 어떤 효과를 발생시킬까요? 독일은 70년대 기차표 개찰구를 없앴습니다. 그러나 불시에 검표원이 표검사를 해서 표가 없으면 몇배의 돈을 물립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불시검열을 피하기 위해 대부분 표를 사서 승차합니다. 조삼모사입니다. 정부로서는 인력을 줄이고도 질서와 통제를 유지하는데 성공한 것이지만 복지가 향상된 것은 아닙니다. 타율대신 자기검열이란 형식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국보법도 이젠 막무가내로 사람을 잡아들이진 않지만 불시검열처럼 한둘을 잡아들임으로서 사람들을 자기검열하게 하고 효과적으로 국가보안법의 통제를 유지합니다. 사람들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챦아서라고 합리화해둡니다. 국가보안법은 건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애써 모른 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조삼모사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서 자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국가보안법은 자기기만을 초래합니다. 국가보안법이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라 귀챦아서 피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피해자입니다. 그들은 구속된 자보다 더 큰 통제하에 순응하고 있으며 아픔이 있는데도 아픔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도 관성의 체계는 남아 테러방지법 같은, 이름을 달리한 국가보안법의 출현을 허용할지도 모릅니다. 관성에 대한 자각과 소통이 절실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관성은 숨어있으며 드러나지 않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고통뿐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고통까지 성찰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
고통은 소외를 발견할 수 있는 통로이자 계기입니다. 아픈 부분만을 볼 것이 아니라 아픔을 통해 아픔을 소통시키고 있지도 못한 숨어있는 구조전체를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방에서 아픈부위가 아닌 다른 부위에 침을 놓는 것은 이같은 원리의 치료방법일 것입니다. 아픈곳에만 집중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전체구조를 간과할 수 있습니다. 또한 희망대신 절망에 낙관대신 비관에 집착하는 것으로 오해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점에 이르러 왜 인류의 스승들은 ‘고통’만이 아닌 ‘고통의 바다’를 언급했는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세상살이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지주의 방법, 장사꾼의 방법, 뱃사람의 방법입니다.
지주는 땅에 울타리를 치고 토지의 이름으로 나아가서는 영토의 이름으로 경계를 확정하는데 골몰합니다. 그는 그 울타리안에서 군림합니다. 비가오지 않으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합니다. 굿은 비를 내리게 하는데 아무런 물리적 도움이 안되지만 비가 안오는 것이 계기가 되어 불만을 품는 공동체안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유용합니다. 그는 울타리 밖의 세상에 대해 배타적이며, 강요든, 억지든, 설득이든 울타리안에서만 소통이 되면 그만입니다. 가장 공고한 관성과 제도를 선호합니다.

장사꾼은 울타리를 거부합니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아도 어떻게든 상대방과 소통하여 물건을 파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심지어 사기를 칠 때조차도 상대방과의 합의와 소통이 필요합니다. 장사꾼은 소통과 교환을 법이나 폭력으로 막지 않는 시장이 있으면 됩니다. 또 그런시장이 막히거나 없을 땐 만들어내야만 생존할 수 있습니다.

뱃사람은 아무런 경계도 없는 곳에서 자연의 거대하고 불안하며 끝없이 변화하는 구조에 민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장사꾼은 소통되는 곳만 찾으면 되지만 뱃사람은 소통되지 않는 숨겨진 구조까지 대비하지 않으면 방심하는 순간 목숨을 잃습니다. 고통의 땅이나 고통의 시장이 아닌 고통의 바다를 응시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고통은 이미 소통되고 치유되고 있는 것이지만, 소통조차 되고 있지 않은 숨어있는 고통, 관성의 이름으로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 고통의 구조 전체를 통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땅위에선 우공이산과 필사즉생의 신념과 힘만 있으면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선 내가 상대방의 배를 끌어당기는 만큼 나 또한 끌려가게 됩니다. 작용만이 아니라 반작용까지 생각해야하는 공간인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사수론자는 신념과 힘만 갖추고 있으면 불순분자를 타도하고 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는 맞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작용과 반작용이 모두 존재해온 바다와 같은 역사에선 전혀 맞지 않는 생각이었습니다. 재판중에 진술했듯 헌법3조 영토조항-수복지구론-반국가단체론-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지는 안보이데올로기체계는 1953년 혈맹인 미국이 국부인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에버레디계획을 세우게 했던 근본이유였습니다. 공산군의 위협이 아닌 미국의 위협은 영토조항-국가보안법체계가 존재하는 한 지속적으로 유지됩니다. 5029작전계획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것은 다시 확인 되었습니다. 1952년의 미국의 이승만제거계획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헌정질서를 파탄시킨데 대한 응징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보이데올로기체제가 자유와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와 전체주의로 변했을 때 미국은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이승만을 제거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한 미국의 미온적 대응과 이틀 뒤인 1월23일 푸에블로호 납치사건에 대한 미국의 과도한 반응으로 한미간의 갈등이 깊어졌을 때 미국조차 한국이 작전통제권환수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었지만 결국 박정희가 미국특사와의 면담에서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간 것은 이승만제거계획에 깊이 관여한 당사자로서 얻은 학습효과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맘먹으면 얼마든지 유엔사를 통해 대통령제거계획에 돌입 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이 독재정권을 인정해주었으면서도 국가보안법등을 통한 인권침해문제를 지속적으로 문제삼을 것이란 점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내차원에서는 그토록 서슬퍼런 안보이데올로기체계가 국제차원에선 얼마나 상반되게 정권과 국가위기를 불러올 위협적 소재인지를 최고권력자들은 오히려 실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은 나무에서 나왔지만 결국 나무를 태운다’는 직지심경의 문구는 국가보안법을 말단으로하는 안보이데올로기체계의 내심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비유일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을 바다와 같이 전체구조에서 놓고 보면 작용뿐아니라 반작용이 얼마나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저는 보수, 우익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인 박정희의 어록을 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주체사상에서 쓰는 것으로 알려진 용어와 개념이 여과 없이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몇 개의 보기를 듭니다.

“모든 일은 모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그결과 역시 사람에게로 귀결된다. 무슨일이거나 사람의 머리와 사람의 손으로 출발되어 흥하는 것도 망하는 것도 결국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 박정희대통령선집3:운명을 넘어, 신범식, 지문각, 1969, p102)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관계는 결국 인간이 인간을 다루는 관계입니다. 인간인 피지도자로 하여금 지도자에게 기꺼이 따르게 하는 가장 긴요한 요소는 지도자의 인간성 그것입니다... 솔선수범, 희생의 정신, 그리고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또 협조할 줄 알아야 하며, 아울러 성품이 고상하고 덕망이 뛰어나고, 언행이 일치하고 국가와 국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충성해야만 합니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지도자의 길, p58)

“민족이란 별것이 아니오, 하나의 커다란 가족...집안...인 것이다...혁명정부와 국민이 흉 허물없는 한 덩어리, 한 몸이 되어서 저마다 맡은 일을 다해 나가는 민족 단결이야말로 혁명과업을 보람있게 이룩하는데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p77-78)

“이렇다할만한 힘이 없는 우리민족에게는 무엇보다도 우리끼리 우리자신의 힘과 열성을 합해서 (자력)갱생의 길을 향하여 다 같은 뜻으로 뭉쳐야 한다.”
(혁명과업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p82)

위 글들은 1969년 지문각에서 출간된 박정희대통령선집3에 나온 박정희 대통령의 어록입니다. 가장 철저히 북한을 이기려고 한 지도자가 사용한 단어들만 보면 국가보안법상 찬양, 고무혐의를 받기 충분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말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법위에 선 절대권력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보안법이 전체주의와 독재의 미소에 유혹되어 형평을 잃고 스스로 모순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국가보안법은 북을 상대로 한 법이지만 북을 위협하기는커녕 북을 더욱 기세등등하게 했고 정작 수많은 무고한 국민과 인재들만을 처형하거나 구속시키고 소외시켰습니다. 피해자가 북한이 아니라 언제나 남한의 국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안보이데올로기체계의 하위구조인 지뢰가 북한의 인민군이나 간첩에게 피해를 주는 대신 남한의 서민들만을 피해자로 만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앞서 언급했듯 국가안보의 암적존재라고 칭하는 주사파를 키운 것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역설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는 감옥에 있는 구속자들만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사수하고 강화하며 구속자들을 감옥에 보낸 가해자, 집행자들임을 통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에선 작용과 반작용이 함께 적용된다는 사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을 더욱 강력하게 적용하고 유지시킬수록 한국의 자유주의체제는 위기에 빠진다는 역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바다에서 예술과 미학의 기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고통의 봉합이 아닌 통찰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었던 변방은 곧 중심이 되곤 했습니다. 중세유럽질서의 변방에 있었던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써 토마스아퀴나스의 중세를 넘어 르네상스를 열었으며, 3세기동안 이탈리아어를 유럽문명의 중심언어가 되게 하였습니다. 중세를 지탱해온 방대한 논리체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뛰어 넘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술로 상상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인도불교의 최변방에 있었던 신라에서 의상과 원효는 신라를 불교사상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게 하였고 궁예는 고대에서 중세로 나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역전의 단초를 마련한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미학적 도상이었습니다. 유교중화의 변방이었던 조선에서 송강 정철과 겸재정선은 율곡이이를 발전시켜 새로운 성리학의 세계를 미학으로 구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단테처럼 한글을 아시아의 중심언어로 하는데까지 이르진 못했지만 조선내부의 중심언어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는 분명 기여한 바가 컸습니다. 이들이 변방에서 중심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가로막을 중심의 질서가 느슨한 변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라시아, 세계 냉전체제의 시발이자 최후의 변방인 한국은 중심보다 더 강한 냉전의 질서가 남아 있어 상상력조차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고통의 바다를 보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안의 퇴락한 샤먼의 주술이며 율법입니다. 이러한 주술이 필요한 사람들이 우리사회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샤먼의 주술에 의존하는 순간 바다에 뜬 배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으며 더우기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소통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바다위에선 작용이 반작용이 되고마는 역설을 통찰해야 합니다.


간절함
여의도를 출발하여 삼보일배명상을 하며 서강대교를 건너던 첫날 조각도처럼 날라와서 체온을 깍아내는듯한 강바람을 만나야 했습니다. 한강이 얼마나 험악하고 거친 곳인가를 이전에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은 차를 타고 건넜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그 거칠고 험한 것을 알게 된 것은 한강이 변한 것이 아니라 제가 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느려지고 낮춰지니 세상의 숨어있던 구조와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그 세찬 북서풍의 와중에도 기적처럼 온화한 바람결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간절한 자만이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은 막막함입니다. 그 막막함 앞에서의 절박함입니다. 답 없는 질문이며 문 없는 출구입니다. 그리하여 시인 문익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사를 산다는 것은 벽을 문으로 알고 걷어차는 일이다.’

아무도 벽에서 문을 보지 못할 때 문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간절한 사람입니다. 그 간절함으로 역사에 제 몸을 던진 사람만이 작고 여리고 숨죽여 흐르는 숨어있는 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절하다는 것은 반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지루한 반복과 좌절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안의 결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거대한 고통의 바다를 통찰하고 결을 발견하며, 생존할 수 있는 자는, 그리하여 간절한 자입니다.
가래침도 껌자국도 담배공초도 조용히 머릴 대고 가까이 하면 다 제나름대로의 결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관성을 벗지 않고 스쳐지나가는 눈으로 보니 오물일 뿐입니다. 그것이 곧 차별심입니다. 국보법사수론자도 고요히 다가가 경청하면 그 나름의 결이 있으니 경청할 일입니다. 서로가 담벼락을 마주한 듯 막막할지라도 간절하게 다가가고 또 다가가면 결국 우리는 모두 국가보안법의 피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간절함은 드러난 아픔을 치유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아픔의 구조까지 통찰하기 위해 아픔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고통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입니다. 아픔을 치유할 뿐아니라 아픔자체를 긍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과 고행은 몸 전체에 고통을 주지만 아픔은 몸을 절박하게 하고 조절하게 하며 제 스스로 미세한 결조차 발견하게 합니다. 
예술가를 잠수함의 토끼에 비유한 것은 저돌적인 시대의 선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민감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민감함으로 새로운 결을 만들고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자가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영토
우리가 조금만 민감하다면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안보이데올로기체계의 최상위에 헌법3조 영토조항이 있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땅은 꿈을 꿉니다. 그 꿈을 통해 겨울이 오기도 전 미리 봄을 챙겨 준비합니다. 가을의 땅은 낙엽에게 이제 그 고단한 생을 내려놓으라고 유혹합니다. 땅은 바람에게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뭇잎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라고 명령합니다. 땅은 그렇게 수만년, 수천만년을 쌓고 또 쌓아 스스로 모든 생명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땅은 봄이 오기도 전 언 몸을 풀고, 제몸을 질게하여 생명이 뿌리내릴 바탕이 됩니다. 생명의 무덤이 생명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땅에 토지란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영토란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토지는 개인의 소유관계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며, 영토는 국가의 지배관계에 의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나 토지란 땅이 아니라 계약문서입니다. 영토란 피에 대한 기억이요, 전쟁에 대한 기억이며, 그 기억들에 대한 비석으로서의 법전입니다.
1948년 남에서는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일방적인 선포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토에 대한 일방적인 선포가 있었습니다. 헌법초안자인 유진오박사는 영토주권이 땅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땅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지배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관계가 땅에 투영되면서 마치 땅이 신성을 갖는 것처럼 물신화된 것입니다. 그는 또한 헌법에 영토조항을 두고 있는 나라는 주로 독일과 같은 연방국가로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는 일본헌법과 같이 굳이 영토조항을 둘 필요가 없으나 북한으로 인해 영토조항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영토는 단순한 사적소유권이 아닌 통치를 위한 지배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로써 단순히 영토가 한국의 주권의 영역을 명시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북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기 위한 것임을 명확히 했습니다.(유진오, 헌법해의 p60-62)
남과 북은 서로의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유보하고 공생하는 대신, 서로의 땅까지 영토로 배타적선언을 함으로서 땅을 신성의 영역에서 분쟁의 영역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분단체제가 상호간의 분단을 명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원한체제로 나아간 것은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전국적 지배권을 확인하려는 남과 북 헌법의 영토조항에서 비롯됩니다. 땅은 사람에 의해 신성해지기도 하고 추악해질 수도 있습니다. 남북의 영토는 배타와 지배욕과 일방성과 폭력적 선언을 통해, 엄숙을 강요함으로서 신성을 만들어냅니다. 지주가 울타리를 치고 샤먼의 제의를 통해 신성을 연출하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땅의 본성에 맞지 않는 제도를 발전시켜오기도 했지만, 땅의 본성에 맞는 제도도 또한 부단히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리하여 땅에 대한 정복의 기억을 담고 있는 유적이 있는가 하면, 땅에 대한 지원과 협력, 상생과 조화의 기억을 담고 있는 유적이 있습니다.
우리 영토관념의 마지막 바닥은 지배욕임을 유진오박사는 인정합니다. 지배하려는 자와 지배받지 않으려는 자 사이의 충돌은 명약관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토문제의 법적 본질을 배타성이라고 공공연히 규정합니다. 합리성, 합의성도 배타성 앞에선 속수무책입니다. 소통이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남북의 영토선언에 소통의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땅위에 사는 사람관계에 의해 땅은 규정되는 법. 사람관계가 폭력적이자 땅도 폭력적이 되었습니다. 차지한 땅과 빼앗긴 땅, 차지할 땅과 빼앗을 땅만이 있었습니다. 점령지도 아닌 수복지란 말이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점령지가 미래의 지배관계를 나타낸다면 수복지는 과거로부터 지속되어온 지배관계를, 지배의 역사성을 부여한 이름이었습니다. 지배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것에 반대했던 미국에 의해 수복지는 점령지로 바뀌었습니다. 북에 대해서는 한치도 밀리지 않던 수복지 개념은 미국에 대해서는 쉽게 점령지로 양보되었습니다. 수복지의 주민은 수복과 동시에 나의 국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나의 신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해석이 있었습니다. 힘만이 정답으로 통한다는 말발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전쟁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지배가 있었습니다. 땅위에 사는 사람들은 땅을 차지한 자에게 지배당할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안보가 있었습니다. 왜인지는 잘 몰라도 땅을 지키기 위한 안보개념이 탄생했습니다. 안보는 영토를 더욱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모든 가치가 형식적으로라도, 혹은 위선적으로라도 호혜평등과 소통과 교류를 표방하지만 영토는 대놓고 그 본질이 배타성이라고 규정합니다. 신성한 땅은 가장 전투적인 영토로 가치전환되고 만 것입니다. 땅은 어쩌다 그렇게 배타적이 된 것일까요?
땅이 꿈꿀 자유를 막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땅을 죽음의 제도로 규정해선 안되겠습니다.
땅의 꿈을 막는 것은 법과 함께 우리안의 관성입니다.
남의 자유주의 이념도 북의 혁명이념도 국가에 의해 영토를 선포하면 된다는 성급한 결론과 급박한 정세를 이유로 땅에 대한 이해를 갖기도 전에 땅을 소유도 아닌 지배문제에만 몰입하도록 만들고 말았습니다. 영토관념이 가리키는 화살표의 꼭지점에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영토를 지키려는 처음의 목적이 국민의 생활일텐데 그 생활이 과연 국보법에 의해 지켜진 것일까요? 국보법은 상상의 자유는 물론 상상력을 검증하며 발전시키는 사고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국민성의 본질이 국민들이 가진 사상이라면 국가보안법은 국민의 본성을 탄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검찰 측 안준석 증인은 자신의 감정서가 합참의 차장, 과장, 부장(투스타 소장)까지 결재를 받은 것이라고 힘주어 확인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아직 공개된 적 없는 기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방어망은 이미 크게 구멍이 뚫려 있고 북이 벌써 침투해 왔을 것입니다. 결국 그의 증언은 한국방위력이 현실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결함과 한계가 있음을 자인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국보법집행자들은 자기 세계에 갇혀 있다는 데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담을 쌓고, 주술에 의존하여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군내부에서는 일관성이 있어야 할텐데 한 부서에서는 부대에 시민들을 초청하는 행사와 축제 열어 내부에서 거의 제한 없이 사진을 촬영하게 하고 다른 부서에서는 2급비밀이라며 담장을 쳐놓고 밖에서 사진을 찍으면 기밀탐지, 누설이라고 구속합니다.
안준석 대령은 땅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투철한 사명감과 헌신성을 가진이였습니다. 그가 만일 군인생활을 못하게 되면 큰 병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을 대표해서 나온 그의 필사즉생류의 신념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 소통하기엔 단절된 신념으로 보였습니다. 땅에 대해 평화를 위협하고 파괴하고 침략한다는 것은 땅이 이미 사회체제, 국가체제, 세계체제의 중요요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떨어진 은행잎 하나에 신발문양이 강하게 눌려 찍혀있었습니다. 누군가 신발로 나뭇잎을 밟고 지나간 모양이었습니다. 도청감청만 은밀한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일들이 이처럼 은밀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인간 행동의 산물은 땅에 기록을 남기고 그것은 문명의 징표로, 사회적 관계의 징표로 남습니다.

땅에 세워진 경계선 표식은 땅에 대한 법적관계의 표현입니다. 1946년 영토란 말이 성립될 수 없는 시기였음에도 38선 표식 세우기 작업은 38선을 영토경계선으로 이해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경계선은 법 그 자체의 표현일 때도 있고 법에는 없지만 체제간의 충돌과 갈등의 표현일 때도 있습니다. 1946년 미소간의 38선표식 세우기 작업 하나가 그토록 예민하게 대립됐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철책선과 초소와 땅위에 세워진 경계물은 일관된 경계선체계입니다. 시설과 관리주체, 관리범위, 관리방법이 모두 경계선체계를 이룹니다. 따라서 경계선과 표식과 철책선에 덧씌워진 신화와, 완고한 편견과, 관성을 성찰하는 일은 땅에 대한 이성을 회복하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조차 군사기밀로 통제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기밀이라면 기밀로 보호되어야 할 합법성과 정당성에 대해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설치하니 북이 따라 설치했고 북이 먼저 위반하니 우리도 따라 위반했다는 것이 논리의 전부라면 그것은 왜 설치하고 위반했는지를 성찰할 일이지 설치되고 위반한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드리라고 강요할 것은 아닙니다. 설령 현실의 군사적 현실을 외면 할 수 없다 해도 그에 맞는 타당한 논리가 분명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술입니다. 제성호증인은 군사분계선이남에 대해 유엔사의 군사통제하에 있다는 정전협정의 내용에 대해 유엔사가 스스로 ‘점령’이란 단어로 사용하고 있음에도 왜곡된 해석이라고만 답했습니다. 정전협정의 서명자인 유엔사가 그렇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서로도 확인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제성호증인의 말은 그의 해석입니다. 우리가 애써 그렇지 않다고만 해석하면 우리 뜻대로 해결되는 것일까요? 학자는, 또한 학자가 아니라도 시대가 던지는 질문에 성실히 답할 의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곧 도래하게 될 평화체제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제가 될 것임이 분명하며 중요하게 고민해야만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북에 이롭다, 아니다란 기준만을 찾아 논의를 통제하려는 것은 오히려 북을 이롭게 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제성호씨는 2004년 국방정책연구 겨울호에 ‘북방한계선의 법적 고찰’이란 논문에서 NLL을 둘러싼 논쟁을 각각 고찰하고 결론에서 말하길 “NLL유지를 촉구하되 장기적으로 NLL을 새로운 해상경계선으로 대체하는 방안도 강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유엔사해체에 대한 걷기 명상’에 대한 감정서에서 “(이시우는) 북방한계선은 유엔사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것 운운하며, NLL의 적법성을 부정하고 있다. NLL은 남북한이 지난 50여년 동안 준수, 묵시적으로 합의한 경계선으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그 유효성과 존중의무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이를 부정하는 것은 NLL을 시비하며 북방한계선 철폐를 요구(새로운 서해해상군사분계선 설정을 주장)하는 북한의 주장을 수용, 지지, 동조하는 것이다”라고 감정했습니다. 
꽤 장문인 나의 ‘한강하구에 대한 연재글’의 핵심은 한강하구에 대한 유엔사의 관할권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으로 모아집니다. 또한 유엔사가 비무장지대 내 경의선과 동해선의 ‘남북관리구역’에 대해서 주장하는 관할권도 남북관리구역에 대한 유엔사와 인민군 간의 합의문에 비추어 일방적이고 무리한 것이므로 이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이었습니다.

이와 관련 제성호씨는 2000년 11월 17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유엔사의 관할권이 아닌 관리권 이양 주장을 접하고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습니다.

“관할권과 관리권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생각건대 유엔사가 말하는 관할권은 DMZ내에서의 입법, 행정, 사법의 권한, 즉 ‘대성동 민사협정’과 같은 법령제정의 권한, 법령을 행정적으로 집행하는 권한, 그리고 민형사 재판관할권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에 비해 관리권이라 함은 경의선 철도의 보수, 신호체계수립, 운용, 필요한 시설물의 설치, 유지, 사후관리 및 감독 등 행정적 관할권(administrative or executive jurisdiction) 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제성호, 경의선철도 연결에 따른 법적 문제와 대책-법정책론적 분석을 중심으로-, p22-23)

“DMZ의 평화적 이용 확대라는 관점에서 볼 경우, 특히 DMZ내에 평화구역(Peace Zone)에서부터 시작하여 통일평화시(Unified Peace City) 건설을 내다본다면 단지 유엔사로부터 관리권만 이양받는 구조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로서는 유엔사가 DMZ의 평화적 이용지원 차원에서 향후 북한군과의 합의하에 추가적으로 DMZ 일부 구역을 개방할 경우에는 단지 관리권이 아닌 관할권을 한국에 반환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한국에 대한 관할권 반환구역을 DMZ 내에서 점차 확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곧 DMZ 관할권의 한국화 실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같은 현상의 확대는 자주적인 남북교류의 지평과 공간을 넓히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가급적 빠른 시기에 우리 정부는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구간’에 대해서 관리권이 아닌 관할권 전반을 한국에 이양하도록 군사적 외교적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제성호, DMZ의 평화적 이용에 따른 법적문제, 법조, 2006.11, Vol 602, p155)

그가 유엔사의 관할권 주장 논리에 대한 유엔사의 1차 자료를 확인해 볼 위치에 있지 않았던 것은 저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일보 기사라는 2차 자료에 근거하여 관할권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가하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제성호씨가 해석하는 유엔사의 관할권에 대한 이해는 유엔사가 비무장지대를 점령한 점령군으로서 군정을 수립하고, 군사법원을 설치했을 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 같은 권한은 정전협정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며 만일 그 같은 관할권이 인정된다면 주권과의 충돌문제를 당연히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유엔사의 관할권 주장 자체를 문제삼는 데 비해 제씨는 유엔사의 주장을 일단 인정하고 외교적 노력으로 관할권을 이양받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약간의 입장 차이가 있지만 저 역시 제성호씨가 주장하듯 남북관리구역에 대해 관리권이든 관할권이든 실질적으로 남한이 온전한 권한을 이양받아야 한다는 생각에선 동일합니다.
그러나 유엔사의 주장이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주체적인 비판과 검토가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엔사의 주장이면 무조건 수긍하고 기정사실화 하거나, 의문을 품는 것조차 금기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주체적으로 재조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지 제씨가 말하는 외교적 노력도 구걸이 아닌 협상이 될 것이란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논문과는 달리 저에 대한 감정서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한강하구에 대해 유엔사는 항행규칙 제정 및 선박등록의 권한만을 가질 뿐이라면서, 민간이 평화운동 차원에서 열기구비행, 100톤 이상의 바지선 운항, 남북한을 연결하는 다리의 건설 등을 제안하는 한편 민통선 설정이 불법이라고 강변하면서 민통선해체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입장은 군사시설보호법의 목적과 정신을 무시 외면한 것으로, 안보적 관점, 특히 북한 핵무기개발 및 보유와 같은 현 단계의 남북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주장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유엔사의 관할권을 부정함으로써 주한미군주둔의 근거를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저는 그와 법정에서 그의 감정서에 대해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결국 그런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1972년 북은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북한지역만을 영토로 수정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영토문제에 소통의 여지를 먼저 열어준 것입니다. 이에 국제법학자들과 헌법학자들은 헌법3조의 개폐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 왔습니다. 현재는 4가지의 의견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사수론입니다. 둘째와 셋째는 모두 남한지역으로 영토를 수정하자는 안입니다. 대신 국호를 명시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의견이 달라집니다. 네 번째 안은 보수적법학계의 원로인 김명기교수의 안으로 3조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안입니다. 보수학계에서도 헌법3조는 국민여론이 비등할 것을 감안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성호씨는 2004년 발간된 서울국제법연구 11권 2호의 ‘헌법상 통일관련 조항의 주요 쟁점과 개정문제’란 논문에서 헌법3조의 영토조항과 통일조항이 충돌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논하고 결론에서 말하길 “앞으로 무게중심이 영토조항에서 더욱 통일조항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영토조항 개정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의 ‘유엔사문제에 대하여’에 대한 감정서에서 ‘영토조항의 효력(특히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과 북한지역에 대한 헌법의 장소적 효력을 주장하는 헌법적 타당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헌법규정과 정신을 부정 모독하는 반헌법적, 반국가적 태도의 시현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감정했습니다. 

헌법3조 영토조항은 학자들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헌법3조 사수만이 공식기준처럼 되어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예 관심의 영역 밖에 있습니다. 이는 북미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평화체제가 급물살을 탈 것이 예상되는 격변의 시대에 정작 당사자임을 강조하는 한국이 이에 대응할 준비가 매우 부족한 상태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헌법3조는 가장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조항이지만, 가장 바꾸기 힘든 문장이기도 한 것은 영토 때문입니다. 영토조항은 국가보안법과 더불어 원한체제를 유지해온 결정판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겐 신성한 골짜기이지만, 누구에겐 이성도 숨을 멈추어버리는 공포의 골짜기입니다. 땅에 묻힌 이들이 있어 영토는 원한의 개념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미래의 기준이 됩니다. 땅에 있었던 일의 기억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원한체계
저는 정전체제, 분단체제와 동시에 원한체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정전체제와 분단체제가 사회의 구조적 측면을 위주로 구분하는 개념이라면 원한체제는 구조와 사회구성원의 심리가 결합된 개념으로, 사회가 사람의 육체, 심리적 활동을 통해 맺는 관계란 점에서 구조와 심리의 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원한은 개인적 감정이나, 원한체제는 그 감정이 사회구조로부터 수렴되어 고착되고 다시 사회구조를 향해 발산되어 만들어진 체제입니다. 북에서 원쑤라고 하거나 남에서 웬수라고 하며 원수란 발음이 된소리, 겹소리로 강조됩니다.
오랜 식민지동안 친일과 반일이 착취자와 피착취자로 갈라지고 해방이 됐는데도 친일파가 척결되지 않음으로서 사회체제로서의 원한체제는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식민지시대에 형성된 사회적 원한관계는 해방전 후 미국과 소련등 외부의 체제를 유도, 흡수하고 결국 외세의 개입을 초래하는 과정에서 유라시아냉전체제와 함께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외세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체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확고한 관성이 되었습니다. 원한관계로 압축되는 온갖 가치체계가 그것의 법적 표현으로 나타났고, 1948년 남한의 국가보안법은 원한체계형성기의 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원한체제를 되돌릴 수 없는 체제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한체제는 국가에 의해 강요되었지만 민간인은 스스로 체화한 원한에 기초하여 체제생산의 행동자이면서 생산자가 되어 이웃을 학살하고, 학살을 전염시켰습니다. 원한이 정부의 이데올로기로서 뿐아니라 하부단위에 까지 이르는 국가전체의 이데올로기로서 체화된 것입니다. 국제차원와 국가차원에 의한 피해 뿐아니라 동네사람과 가족내에서까지 원한관계가 전사회구조화 된것입니다. 원한체제의 기본관계는 가해자와 피해자이며, 주목할 점은 이들이 서로 가해와 피해를 교환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원한의 교환이 공평한 원한의 해소나 소멸로 귀결되지 않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에 유의하게 됩니다. 정전 후 정전체제는 원한체제를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는 커녕 더욱 공고한 체제로 발전시켰습니다.
이런 체제는 전쟁 6개월간에 집중된 학살로 인한 것이며 국가보안법은 이같은 체제를 초래하는데 예비, 준비기능을 했습니다. 48년 제정 후 국보법에 의한 학살 처형과 그에 따른 좌익의 반격으로 전쟁에서의 피의 숙청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국가보안법이 피를 먹고 자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46년 반공체제형성기 이후, 48년 단정수립에서의 국가보안법의 제정, 50년 한국전쟁초기 6개월간에 집중된 살육의 원한체제에 대한 해소 없이 정전체제의 해체만으로는 우리사회의 불행을 치유하기에 역부족이란 생각입니다. 정전체제의 심저에 있는 원한체제의 해체를 위해서는 친일파 청산에 이어 국보법의 폐지를 심각히 고려하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전쟁에서 우리는 적을 전쟁법상 교전자와 다른 개념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교전자중 하나인 중국에 대해 갖는 감정과 북에 대해 갖는 감정이 너무 다른 것은 정전체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요소입니다. 또 북의 인민군보다 간첩에 대해 갖는 감정은 더욱 극단적입니다. 전쟁법상 간첩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며 전쟁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간첩은 군인보다 더 치명적인 감정을 원한체제에 부여했고 정전체제하에서 실제 간첩사건보다 조작간첩사건이 훨씬 많이 발생한 것은 원한체제의 확대재생산과정과 연관을 갖습니다. 적이란 말에는 법적 교전자라는 개념이외에 원한의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북의 원수라는 용어에선 이같은 개념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북이 내세우는 원한의 대상은 남한이 아니라 미국입니다. 서로 원한의 대상이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원한체제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은 역설입니다. 남북한의 원한의식의 눈높이로 본다면 북에 비해 남은 원한체제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원한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원한은 자신보다 대상이 중요한 체제입니다. 대상에의 의존도가 심한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비극에 모순과 부조리를 대표하는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신전의 여사제였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왕인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를 죽이고 그의 나라로 건너가 아이들을 낳고 헌신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하자 남편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합니다. 원수가 된 남편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죽입니다. 남편을 죽이는 대신 자신의 분신이기조차 한 아이들을 죽이는 메데이아의 심리에서 원한은 자기주체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파괴하는데 방점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주체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결핍으로 하여 원한은 자신마저 파괴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증오심은 북을 타도하는 대신 남한의 무고한 국민이나 인재들을 죽이거나 소외, 배제시키는 방법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도록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제거계획 같은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그리하여 국가보안법은 북이란 국가를 적대시 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의 원한체계가 해체되거나 느슨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와 위기의식에 초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하는 것입니다. 1972년 북은 사회주의헌법 개정에서 전국영토론, 서울수도론을 포기하고 통일조항으로의 통합을 했습니다. 북한체제의 남한에 대한 우월의식이 이를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날 남한이 경제, 군사, 외교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북한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기 시작한지 오래되었음에도 우리가 영토조항의 개폐나 국가보안법 개폐에 소극적인 것은 우리 스스로 보다 상대에 의존하는 원한체제에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우리가 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심과 공포는 가치의 문제라는 점을 인정해도 객관적으로는 북에 비해 과도한 것입니다.


예술
‘문명은 세권의 책을 쓴다. 자연의 책 역사의 책 예술의 책이다. 이중 가장 신뢰할 만한 책은 예술의 책’이라고 러스킨은 말했습니다. 예술이 한시대의 문명을 대표하는 거울이 될 수 있는 것은 간절함과 민감함으로 시대의 본질을 통찰하기 때문입니다. 법의 이름으로 예술의 팔다리를 잘라 심판하려는 생각은 베니스의 상인이 피한방울의 오차없이 살을 잘라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오만과 무지의 폭력에 다름아닙니다. 사진을 몰수하겠다며 증거목록을 제출한 검사의 심리상태에서 저는 문명을 위협하는 야만의 정신상태를 읽었고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옷을 벗고 나뭇잎으로 가리거나 익히지 않은 날고기를 먹는 것만이 야만이 아닙니다. 한 사회가 헌신과 희생으로 이룩한 문명의 탑을 어떤 가치관에 따라 허물 수도 있다는 생각과 같은 위험한 정신상태가 야만입니다. 르네상스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사제였던 사보나롤라와 그의 신도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불태워진 수많은 서적과 그림의 분서가 야만입니다. 다윗상을 만드는 미켈란젤로를 찾아온 교황이 다윗이 콧대가 너무 높으니 콧대를 낮추라고 교황의 권위를 내세워 명령하는 것이 야만입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젊은 날의 격정으로 저항하는 대신 돌가루를 집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다윗의 코를 정으로 쪼는 시늉을 하며 돌가루를 떨어지게 했더니 교황은 크게 만족하여 역시 콧대가 낮아지니 훨씬 조각이 좋아졌다고 만족하여 작업장을 떠났습니다. 교황의 야만에 대한 미캘란젤로의 신랄한 조롱이며 풍자였습니다. 문명에 대한 야만에 맞서 예술가는 적절히 조롱하거나 때론 거센 저항을 해왔습니다. 권력의 형태든, 법의 형태든, 관성의 형태든 예술에 대해 미학의 논리가 아닌 그 이외의 논리를 통해 개입하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탄압하고 몰살하려는 정신상태는 분명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야만입니다. 검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아마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설령 법의 이름으로 예술을 난도질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문명의 역사는 그 행위를 야만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며 규탄할 것입니다. 신학철화백의 ‘모내기’와 홍성담의 ‘민족해방도’와 가는패의 ‘노동자’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거쳐 이시우의 수많은 사진에 대해 자행된 국가보안법의 남용과 탄압은 예술과 문명에 대한 도발임을 다시한번 성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정신상태 앞에 제가 느낀 것은 울분과 분노가 아닌 슬픔입니다. 예술의 빛, 창조의 빛, 상상력의 빛이 공안기구가 드리운 법의 구름 뒤에 가려지지 않도록 성찰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술창작의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예술가라는 특정집단의 특혜를 요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때 상상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상상은 논리적이지 않고 형상적이란 점에서 미학적 사유형식입니다. 황당할 수도 있고 소박할 수도 있으나 논리도 감정도 그 속에서 잉태되고 성장합니다. 상상력의 수식어로 창조적이란 말이 항상 따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상상력은 숨어있는 고통의 구조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며 그로인해 불가능한 미래가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창조적이고 미학적인 상상력 그 자체를 자기실현의 토대로 하는 예술창작에 대한 탄압은 모든 사람들의 상상력에 대한 탄압과 통제로 귀결되고 만다는 사실이 성찰되어야겠습니다.
저의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경기도 DMZ’라는 홈페이지가 폐쇄되었습니다. 경기도는 오래전부터 비무장지대를 세계적인 관광상품으로 만들어오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정체가 제가 알기로는 이 홈페이지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의 비무장지대 초소와 철책사진이 군사시설보호법 위반이라는 군대의 의견을 반박하기 위해 이 홈페이지에 올라있는 사진들을 들어 반박하자 기무사의 조사가 들어갔고 그 뒤 얼마되지 않아 아예 폐쇄가 되었습니다. 기무사가 압력을 가해서 그런 것인지,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꺼린 경기도측에서 알아서 그런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을 세계화하기 위한 주제 하나를 잃은 셈입니다. 또한 저를 주인공으로 비무장지대 다큐멘타리를 제작한 모 방송국은 그런 사실이 있음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조차 부담스러워하며 거절했습니다. 그 방송국에서 비무장지대관련 프로를 다시 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건의 판결이전에도 이미 사회에는 많은 파장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공안기관은 이미 판결이전에도 승리했습니다. 사회는 알아서 통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
판단이란 진리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선택입니다. 맹자는 선택의 기준이 이로움이 아니라 의로움에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로움이 관성화된 개인의 기준이라면, 의로움은 낯선 역사 앞에 겸손하고 두려워하는 군자의 기준입니다. 논리는 새로운 것도 낯익지만 가치는 오래된 것도 낯선 법입니다.

가치란 흔들리는 나침반과 같이 명확하지 않고 방향만을 예측할 수 있는 모호한 영역이지만  판단은 논리가 아님에도 모호해야할 가치 흔들림을 넘어 극과 극을 정확히 못박는 일입니다. 그런점에서 어찌보면 판단은 반가치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치와 판단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판단이란 결국 어느 한편에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택이란 선택되지 않은 것을 버림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과거 국보법에 대한 고문이나 자백강요는 그 자체로 국보법의 부당성을 입증하는 명확한 표징이었습니다. 명확히 소통되는 아픔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숨어있는 고통까지는 드러나지도 드러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부당하고 드러난 행위자, 집행자로서의 검사의 모습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격은 사라지고 법과 구조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국보법 피해자들은 국보법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서, 설령 국보법이 사라진다해도 원한체제가 해소되지 않은 관성화된 사회에서 드러나지 않게 배제되고 소외됩니다. 이같은 처지를 설명할 언어를 가고 있지 못한 사람은 가족에게조차도 이를 알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가족으로부터도 배제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소통되고 드러나며 복구될 가능성은 오직 재판부의 판단이란 점에서 유일한 희망은 판결입니다. 아픈 것 이전에 버려진 것들에 대한 사색과 배려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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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소 2008-08-2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걸 여기서 보게 되는군요..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명단이 나왔고 아프님이 대체 불온서적 이벤트를 할때 이시우씨의 책이 가장먼저 생각나더군요 2006년 지역에서 주최하는 강의에 오셔서 강의도 했었는데 그대 일때문에 못듣고 무척이나 아쉬워 했던 기억이 있내요...이벤트에 참가 해볼까?? 갸웃거리며 이시우씨의 책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니 두 분께서 작성해 주신것이 있긴 있더군요 한편도 없을줄 알았거든요 아무튼 기뻤답니다^^ 커널뉴스를 사랑하는 모임에 담아 갈께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