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1885년부터 그냥 알아서 줘요”


기사입력 2008-07-26 15:07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매거진 esc] 도쿄 백년 맛집 이야기 스시코 혼텐

메뉴판이 없는 희한한 맞춤초밥집… 나이·성별·국적 따라 크기·모양이 달라



주토로(참치 옆구리살)가 길게 밥을 덮고 있다.

밥의 양이 턱없이 많기 십상인 한국의 초밥과 다르다. 입에 넣자 주위는 금세 명품거리 긴자가 아니라 도쿄만이 된다. 이렇게 시작된 스시코 혼텐(壽司幸 本店)의 점심 코스는 요리사가 서로 다른 재료로 직접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초밥으로 이어졌다. 가자미, 오징어 초밥으로 이어진 코스는 성게 초밥에서 금세 절정에 달했다. 혀는 개펄이었고 개펄로 밀물이 몰려왔다. 흰새우, 아나고(붕장어), 고히다(중간 크기 전어), 다마고야키(달걀), 표고버섯, 참치살 마구로가 심처럼 박힌 데카마키가 이어졌다. 여기까지가 보통의 1인분이었지만, 조금 더 달라고 말하자 이쿠라(연어알), 새우, 가다랑어 초밥이 더 나왔다. 2008년 <미슐랭 가이드> 도쿄판이 스시코 혼텐에 별 하나를 주며 “에도마에 스시(에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으로 만든 초밥)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고 찬양한 맛이다.

까다롭고 까다로운 최상급 쌀 확보작전

창업자의 4대손인 스기야마 마모루(55)에게 요리 비법을 묻자 그가 되묻는다. “쉰 살 남성과 그의 20대 딸과, 여든 살 할머니가 가게를 찾았다. 초밥의 크기가 똑같을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스기야마 마모루는 날카로운 학자 인상이다. 그는 차분한 말투로 50대 남자의 초밥이 이 정도 크기라면 20대 여성에게는 그것의 3분의 2 정도로, 할머니에게는 그보다 더 작게 만들어 준다고 설명했다. 손님에 따라 고추냉이의 양, 밥의 양, 생선 크기도 다 달라진다. 여성 가운데 고추냉이에 약한 손님이 올 땐 그 양을 줄인다. 이런 ‘맞춤 요리’는 서양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서양인들은 젓가락질이 서툴러 초밥이 부스러지기 쉬우므로 밥을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지어 생선과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쓴다.


이 ‘맞춤 요리 철학’에서 따로 가격표를 만들지 않는 스시코 혼텐의 정책이 태어났다. 그러니 〈esc〉를 따라 시니세 여행을 온 독자는 스시코 혼텐에 갔을 때 메뉴판이 없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달 2일 스시코 혼텐을 방문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지만, 내부의 조도는 낮아 아늑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어떤 식재료도 전시하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왔는데 메뉴판도, 전시된 음식도 없다면 손님은 어떻게 주문할까? 그냥 ‘알아서 주세요’라고 하면 된다. 처음 온 분도, 열 번 이상 온 분도 그날 먹고 싶은 게 다를 수 있고, 매일 들어오는 생선의 상태가 조금씩 다르다.” 1대 창업자부터 가격표가 없었다고 한다. ‘맞춤 초밥’에 질 좋은 생선은 기본이다. 같은 업자로부터 50년 넘게 생선을 공급받고 있다. 최상급 쌀을 확보하기 위해 유명한 쌀 산지의 농가 서너 곳과 동시에 계약을 맺고 그해 가장 작황이 좋은 쌀을 공급받는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좋은 재료를 준비하는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래서 손님에게 많은 돈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점심 코스가 일인당 약 9000엔(약 9만원)이니 싸지는 않다.

1885년(메이지 18년) 스시코 혼텐을 창업한 1대 역시 메이지유신으로 월급이 사라진 하급 무사였다. 하급 무사는 먹고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칼을 놓고, 사람을 먹이는 칼을 잡았다. 첫 자리는 긴자가 아닌 신바시였다. 1952년 긴자로 옮겼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삼형제 중 막내여서 자신이 가업을 이으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대학 때 돈 많이 드는 골프 동아리 활동비를 대려고 주방에서 잠깐씩 일했을 따름이었다. ‘예정대로’ 장남인 큰형이 초밥을 만들었지만, 덜컥 몸이 아파 드러누웠다. 둘째형은 이미 취직해 직장인이었다. 아버지 스기야마 야스조는 셋째아들이 가업을 잇길 바랐다. 전통을 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그는 2대손의 사위였다. 가업을 잇길 바라는 장인의 뜻에 따라 성을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 양자가 됐다. “남은 게 나밖에 없었다”고 말하며 스기야마 마모루는 처음으로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서른여섯 되던 90년대 초반부터 경영을 책임졌다.

재산은 다 타버려도 손님은 남더라

53년생인 그는 단카이 세대(47~49년 태어나 60년대 후반 격렬한 좌파운동을 경험한 세대)에 가깝다. 아버지와 사고방식이 다르다. 딸만 둘인 그는 “아버지는 ‘내가 양자니까 여기를 망하게 할 수 없었다’고 하셨다. 나는 본류(아들)니까 상황이 안 되면 끝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이 아니더라도 괜찮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어도 된다. 가족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시니세가 지속되는 비결을 물었다. “23년 간토(관동)대지진, 전쟁, 거품경제가 꺼지면서 물게 된 엄청난 상속세.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시련이었다. 90년대 초 상속세를 지급하지 못할 상황이 닥쳤다. 그때 내게 남은 게 딱 하나 있었다. 손님들이었다. 손님들은 간토대지진 뒤에도 일부는 살아남았고 전쟁 뒤에도 예전 손님의 3분의 1은 찾아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손님이 바뀌기도 했지만, 중심적인 손님들이 있었다. 손님들이 와준다는 건 맛도 있겠지만 우리 집을 신용해주는 것이도 하다. 재산이 타버린다 하더라도 손님은 남아 있다.” 스기야마 마모루는 말을 마치고 조용히 칼을 잡았다.






■ 주소·연락처 : 도쿄도 주오구 긴자로쿠초메 산반 하치고(東京都 中央區 銀座6丁目 3番8호). 영업시간 오전 11시30분~밤 10시30분. 03-3571-1968.

■ 대표 메뉴와 가격 : 일인당 점심 약 9000엔(9만원), 저녁식사 2만5000엔(25만원). 정해진 메뉴판이 없어 가격에 변동이 있으며, 대개 이보다 덜 나온다. 1만엔(10만원) 수준의 와인을 중심으로 와인 리스트도 갖추고 있다.



글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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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实 2008-08-29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很好啊

해콩 2008-08-29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眞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