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OTL] “난 네가 병원에서 한 일을 알고있다”



세무조사 나와 환자 진료정보 몽땅 가져가는 국세청, USB에 옮긴 파일과 복사한 종이 차트는 어디로?

▣ 글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인권OTL-30개의 시선⑥]


서울 강남에서 성형외과를 운영하고 있는 ㄱ씨는 올해 초 갑자기 들이닥친 세무서 직원들 때문에 깜짝 놀랐다. 대여섯 명의 세무서 직원들은 오자마자 최근 3년치 환자들의 종이 차트와 컴퓨터에 담긴 환자 사진 등 진료정보를 몽땅 내놓으라고 했다. 성형외과의 경우는 진료 과정에서 그림을 많이 그려야 하기 때문에 전산자료 말고도 종이 차트를 매번 만든다. 해당 차트에는 환자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가족력, 진료 및 처방, 수술 내용까지 모두 담겨 있다. 사진에는 환자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진료 내용도 간단하게 언급돼 있다. ㄱ씨는 코와 눈, 턱, 가슴 등 각종 성형수술을 받거나 진료 상담을 한 환자들의 은밀한 정보가 담긴 자료들이라 내주는 게 꺼림칙했다. 하지만 특별 세무조사를 나온 세무서 직원들의 위세에 눌려 요구하는 자료를 모두 줄 수밖에 없었다.



△ 10년 동안 보관하도록 돼 있는 환자 개인에 대한 진료정보는 작은 의원의 경우라도 수천 건에 달하고 병상이 몇 개 있는 병원급만 돼도 10만 건이 넘는다고 한다. 서울의 한 성형외과 직원이 환자 차트를 정리하고 있다.





성형외과 환자 사진 1만여 장 가져가

세무서 직원들이 자료 제출을 요구한 까닭은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이 많은 성형외과의 특성상 매출을 누락한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세무서 직원들은 애초엔 40일가량 조사하면 된다며 1천 명이 훨씬 넘는 환자들의 차트와 사진 1만여 장 등 민감한 정보가 담긴 자료들을 모두 가져갔다. 디지털 정보는 아예 노트북 컴퓨터에 복사해갔다. 나중엔 30일을 연장하겠다고 해, 차트는 70일 가까이 병원을 떠나 세무서 직원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ㄱ씨는 “가지고 간 차트를 복사했는지, 디지털 사진 정보를 세무조사 뒤 폐기했는지 알 수 없다”며 “검찰 같은 수사기관들은 압수수색영장이라도 들고 오지만 세무서 직원들은 그냥 와서 민감한 정보들을 다 가져갔다”고 말했다. 그는 “불쾌한 것도 불쾌한 것이지만, 환자들의 진료정보를 내줄 수밖에 없어 자괴감이 들었다”며 “일종의 행정편의주의적 조사 관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방국세청이나 일선 세무서가 병·의원을 세무조사하면서 환자들의 진료정보에 무제한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환자와 관련한 모든 민감한 진료정보가 아무런 제지 없이 국가라는 권력 앞에 발가벗겨지고 있는 셈이다. 대학병원 등 대형 병원에서 세무공무원이 진료정보에 접근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중소형 병·의원에서는 대부분 환자의 진료정보를 일선 세무서에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컴퓨터에 저장된 정보를 USB와 같은 휴대용 저장장치에 담아가거나 아예 하드디스크를 떼어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는 게 관련 업계의 증언이다. 담당 공무원이 이를 고의로 유출하거나 실수로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칫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병·의원에 환자 관리 전산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한 정보기술(IT) 업체 관계자는 “병원에서 세무조사를 이유로 ‘빨리 와서 세무서 직원에게 진료기록을 엑셀 파일로 모두 복사해주라’는 요청이 온다”며 “세무서 직원들이 분량 때문에 종이에 인쇄해 보기 힘드니까 USB에 복사한 뒤 사무실이나 집에 가서 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 달에 1∼2건은 꾸준히 (진료정보를 복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온다”고 했다. 다른 IT 업체 관계자도 “많을 때는 한 달에 서너 건씩 그런 요청이 온다”며 “아예 진료정보 등이 담긴 하드디스크를 통째로 떼어갔다는 얘기도 들었으나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우리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프로그램 공급 업체들은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의 진료정보를 세무공무원에게 제공하다 보면 정보 유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 IT 업체의 홍보 담당자는 “병원에 세무조사를 나오면 100% 프로그램 공급 업체에 연락이 오는데, 간혹 컴퓨터 본체를 가져가버리기도 한다”며 “국세청이나 병원은 ‘갑’이고 중간에 끼인 우리만 ‘을’이라 어쩔 수 없이 요구를 들어주지만, 나중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고 털어놨다.

물론 병·의원은 환자 진료정보의 민감성을 이유로 무더기 자료 제공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난해 세무조사를 받은 지방의 ㅇ병원이 그랬다. 세무공무원 세 명이 조사를 나와 처음엔 영수증과 수익집계표 등을 보더니 곧 “외부에서 분석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 전체를 백업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병원은 내부 논의 끝에 이를 거절하는 대신 병원 안에서 필요한 부분만 모니터로 조회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병원의 전산팀장은 “세무조사를 위해 정보에 접근하는 건 인정할 수 있지만 우리로서는 보호해야 할 정보이기 때문에, 유출 우려도 있고 외부로 가져가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어 막았다”고 말했다.

“성병 치료 환자 차트까지 다 내줬다”

하지만 이는 극히 드문 사례일 뿐이다. 법인이 아닌 중소 규모 병·의원은 지방국세청이나 세무서에서 특별 세무조사를 나오는 경우 자료 제출 요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특별 세무조사를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소득 누락과 같은 탈루 혐의에 대한 단서를 잡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비뇨기과를 6년째 운영하고 있는 전문의 이아무개씨도 세무서 직원이 요구하는 대로 환자 진료 자료를 전부 내어줬다. 지난 4월 들이닥친 세무소 직원들은 지난 한 해 동안의 매출 통계부터 시작해 환자 차트까지 모두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세무서 직원들은 무려 1만2천여 명의 진료정보가 담긴 차트를 이틀 동안 샅샅이 훑어보고 돌아갔다. 이씨는 “세무서 직원이 ‘소득세 신고를 제대로 하는지 조사차 나왔다’며 차트를 다 보여달라고 하는데, 내가 뭐 꼬불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다 보여줬다”며 “나중에 다른 의사한테 들어보니 전부 보여줄 의무도 없고 일일이 답할 필요도 없다고 해 다음부터는 환자 차트를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환자 가운데 30∼40%가량이 성병 치료를 위해 온 이들이라서 자신의 진료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비뇨기과는 신경정신과, 산부인과 등과 함께 가장 민감한 진료정보를 다루는 분야다.
비록 상대가 국가 공무원일지라도 이처럼 환자의 진료정보를 조건 없이 내주는 관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사들도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칫 세무조사에 비협조적인 것으로 비치면 더 강도 높은 조사를 받거나 보복을 당하는 일이 있을까봐 자료를 내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한 성형외과 개원의는 “의료법상 환자 정보를 노출할 수 없도록 돼 있고, (세무서 직원이 진료정보를 가져가는 건) 엄밀하게 볼 때 환자 정보 유출이 맞다”면서도 “강제가 아닌 협조요청이지만 안 내줄 수 없어 협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세청은 책임회피, 복지부는 실태 몰라

현행 의료법 19조는 ‘의료인은 이 법이나 다른 법령에 특별히 규정된 경우 외에는 의료, 조산 또는 간호를 하면서 알게 된 다른 사람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발표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다. 하지만 의료법은 물론 어떤 다른 법에도 환자의 진료정보를 세무공무원에게 공개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반면 국세청 쪽은 현행 소득세법 등의 조항에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법 170조에는 ‘소득세에 관한 사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은 그 직무수행상 필요한 때에는 (납세의무자 등에게) 질문하거나 당해 장부·서류 기타 물건을 조사하거나 그 제출을 명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면서도 국세청은 의사들이 세무서 직원의 요구를 강제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등 오락가락하는 설명을 하고 있다. 의료법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는 만큼 억지로 자료를 확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국현 국세청 조사기획과 서기관은 “병·의원 쪽에서 환자의 비밀사항이나 공개하지 않아야 할 정보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세무공무원이) 가져갈 수 없다”고 말했다. 따라서 진료정보 누출사고가 생기면 해당 병·의원의 의사가 일정 정도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가족부는 실태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다 명확한 해법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21>이 이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견해를 물었을 때 복지부 쪽은 현장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곽명섭 보건복지가족부 의료제도과 사무관은 “(취재가 시작된 뒤) 부서 회의 때 이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런 세무조사 관행이) 의료법에 저촉될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본다”면서도 “세무 현장과 조화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다”고 말했다.
환자의 진료정보가 복사되거나 통째로 세무공무원이 들고 간 뒤 어떻게 관리되는지도 현재로선 투명하지 않다. 자료를 다시 복사하는지, 조사 기간 동안 보안을 지키는지, 조사가 끝난 뒤 정확하게 폐기하는지 등에 대한 엄정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시내 일선 세무서의 한 관리팀장은 “탈세 제보가 있거나 심층 조사를 할 경우에 (진료정보를 가져다 보는 일을) 하고 있다”며 “전부 받아와도 필요한 부분만 볼 뿐 내부적으로 철저히 관리를 하지만, 이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피부과 개업의 ㅎ씨는 “예전에는 세무조사를 나오면 차트를 전부 복사해갔는데 그 차트들이 어떻게 폐기됐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개인식별 정보 제외 가능, 문제는 의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이은우 변호사는 “국세청이 병·의원의 환자 정보에 접근하는 것은 일반 점포의 매출정보를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징세 편의를 위해 개인 정보를 과다하게 들여다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의사들도 자신이 치료를 담당하는 환자의 비밀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국세청이 세원 포착을 이유로 상세한 진료정보를 다 가져가는 걸 막지 못하는 것은 의료인으로서 환자 보호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환자의 진료정보를 국세청 직원처럼 의사가 아닌 제3자가 보는 게 과연 타당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환자들은 자신과 의사 사이의 상담과 치료 내용을 의사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병원에 가기 때문이다. 오병일 한겨레21인권위원(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은 “의료정보의 민감성을 봤을 때 세무공무원의 접근 자체도 허용이 돼서는 안 될 것”이라며 “필요하지 않은 정보까지 제3자가 접근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진료정보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한 업체의 전문가는 “프로그램에서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부분은 제외하고 출력할 수도 있고, 개인식별 정보만 남긴 채 진료정보는 빼고 출력할 수도 있는 만큼 세무서가 필요한 정보만 가져가면 될 것”이라며 현재 상황에서도 세무당국의 의지만 있으면 진료정보 유출 우려는 피해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세무당국에 의한 의료정보 유출사고는 아직 알려진 경우가 없을 뿐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당국의 세무조사 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 은밀한 내 진료정보가 언제 제3자에게 노출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것이 세무공무원이 됐든, 나를 아는 누군가가 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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