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OTL] 언니, 나이 든 동성애자 처음 봐요



10대부터 50대 레즈비언 50여명이 연대한 2박3일, ‘육색찬란 캠프’를 다녀와서

▣ 한채윤 한겨레21인권위원·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

[인권 OTL-30개의 시선④]

지난 5월10~12일 10대에서 60대까지 여섯 세대에 걸친 레즈비언들이 함께 만나 소통해 찬란한 역사를 만들어나가자는 뜻에서 ‘육색찬란’이라고 이름 붙인 한국 최초의 캠프가 강원도에서 열렸다. 아쉽게도 60대 참가자는 없었지만 50대까지의 다양한 세대 총 50여 명의 레즈비언(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레즈비언까지 포함해)이 모였다. 특히 ‘육색찬란 캠프’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늘 배제됐던 10대들이 다른 세대들과 함께 참여한 캠프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육색찬란 캠프’에 참여한 이들은 단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연령차나 지역차 등 모든 차이를 뛰어넘었다. 세대 간 연대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었던 2박3일이었다. 사진은 2007년 ‘퀴어문화축제’의 한 모습. (사진/ 한겨레 박종식 기자)





나이차 극복하고 놀 수 있을까 했더니…

지금까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10대와 비(非)10대는 서로 등을 돌린 듯 소원하게 지내왔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된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소년보호법은 (국가보안법보다 더한 악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듯이) 청소년들을 어떤 식으로든 ‘성적’인 것과 연결시키면 범죄라는 식이었고, 사이버 공간의 동성애자 모임들은 애매하게 법에 걸려 모임 해체를 겪을까봐 아예 청소년 가입을 금지해 모임의 ‘적법성’을 보장받았다. 물론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에서는 청소년 동성애자들을 위한 여름학교를 여는 등 연결고리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친목 기반의 커뮤니티는 성인 모임과 청소년 모임으로 완전히 이분화됐다.
2002년에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웹사이트인 엑스존(exzone.com)이 청소년 유해 사이트로 지목되면서 이에 항의하는 운동이 조직됐고, 이를 계기로 청소년보호법의 동성애자 차별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됐다. 청소년보호법의 독소조항이 2004년 개정되기는 했지만, 이미 시작된 ‘분리’를 멈추게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10대와 비10대들은 서로에 대한 소식을 마치 남의 동네 이야기를 풍문으로 듣는 정도로 계속 멀어져갔다.
2007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는 10대 성적 소수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기획하면서 많은 10대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이때 만난 한 10대 청소년 동성애자의 말을 빌리자면 “스물두 살 넘은 레즈비언은 없는 줄 알았어요”라고 할 정도였다. 바로 이런 말들이 육색찬란을 기획한 계기였다.
청소년기의 고민을 혼란과 방황, 혹은 착각으로만 치부해버리는 사회에서 10대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사랑이나 삶에 확신을 갖기 어렵다. “나이 들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 10대의 고민을 함께 나눌 자리가 필요했다. 나이 든 동성애자를 만나보지 못했기에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과 다른 삶을 상상하고 과거의 나를 해석하며 미래의 나를 기획하는 것은 나의 일상 테두리 밖의 이들과 만날 때 가능하다. 육색찬란 캠프는 10대들에게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좀더 나이 든 레즈비언들’의 모습을 눈앞에 보여주자는 소박한 목표로 시작됐다.

뒤풀이는 ‘커밍아웃 가이드북’ 후원 파티

그러나 과연 10대부터 50대까지 별 마찰 없이 소통할 수 있을지, 혹여 캠프에서 도리어 갈등이 깊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도 없진 않았다. 단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공통점만으로 연령차나 지역차, 그리고 각기 가치관의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기우였다. 첫날 참가자들의 이름과 별자리와 취미 등을 조사하는 빙고게임에서부터 연애와 섹스, 커밍아웃과 아우팅, 종교, 취업과 독립 등 여러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수다방, 배정된 방별로 준비하는 장기자랑까지 모든 프로그램 진행에서 참가자들은 서로의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 함께 어울렸다.
이성애 사회가 흔히 상상하는 그런 세대 차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육색찬란에서의 소통은 단순한 세대차이 극복 프로젝트가 아니라, 다른 듯하지만 사실은 같은 억압을 겪고 있는 동질적 존재로서 서로를 발견하는 소통이었다. 그 소통을 통해 진심으로 세대 간 연대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었다.
캠프가 끝나고 10대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어른들과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도 정신적 위안을 얻었다며 감사해했고, 결혼 압력과 독립에의 욕구 사이에서 고민에 휩싸인 20대는 이미 그 고비를 넘긴 30대에게 갈등 극복의 요령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고 평가했다. 30대 이상은 “10대들이 마냥 어리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사려 깊어서 속으로 좀 놀랐어”라며 그동안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이제는 자신이 가진 자원을 10대들을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도 했다.
첫 번째 캠프라 진행상의 부족함은 있었지만, 황금 연휴였던 2박3일을 기꺼이 캠프에 쏟았던 참가자들에게 세대 간의 교류가 얼마나 절실한지만큼은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캠프의 뒤풀이는 흔한 술자리가 아니라 10대 동성애자 친구들이 직접 마련한 ‘청소년을 위한 커밍아웃 가이드북 제작을 위한 후원 파티’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제 이렇게 한 걸음씩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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