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OTL] 내가 10대 레즈비언이다, 어쩔래?




서울의 한 공원과 ‘라틴’ 봄소풍에서 만난 청소년들, 햇빛 아래 드러낸 그들의 무지갯빛 꿈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인권 OTL-30개의 시선 ④]


서울에도 레즈비언들의 ‘레스보스’(각주1)가 있다. 그것도 10대들의 레스보스다.
서울의 도심에 이른바 ‘레즈(비언) 공원’으로 불리는 한 공원이 섬처럼 떠 있다(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어 공원의 이름과 위치는 밝히지 않는다). 이성애 사회에서 외로운 섬으로 고립됐던 10대 레즈비언들은 그곳에서 자유의 공기를 마시고 친구를 만나고 비로소 ‘자신’이 된다. 그러나 그곳은 즐겁고도 외로운 섬이다.




△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여러분 덕분에 ‘일차’ 잘 마쳤습니다”

봄날의 공원에 소녀들이 앉아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톰보이,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어울려 얘기를 나눈다. 여기에 운동복 차림에 축구공을 든 여성이 다가가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때로는 서너 명, 이따금 10여 명,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서 10대 여성들이 일요일 나들이를 즐기고 있었다. 한껏 정성을 다한 그들의 차림에서 오늘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눈에 드러난다. 5월 어느날 오후 4시, 공원의 중앙에 10여 명의 소녀들이 줄지어 늘어서 인사를 했다. “여러분 덕분에 ‘일차’ 잘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흔히 ‘일차’로 줄여 부르는 ‘일일찻집’을 주최한 팀의 인사다. 일일찻집은 이 공원을 중심으로 모이는 10대 여성 성소수자들이 스스로 주최자가 되고 다 함께 관객이 되는 문화다. 인사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춤 연습을 계속하는 대여섯 명 소녀들의 손목에는 스탬프가 찍혀 있다. 공원 주변의 호프집을 빌려서 열리는 일일찻집의 입장권을 대신하는 손도장이다. 그들은 인기그룹 빅뱅의 춤을 연습하며 말했다. “우리도 7월에 일차를 (주최)하거든요. 연습하는 거예요.” 그렇게 그들은 문화 기획자와 공연 관객의 위치를 넘나들며 그들만의 ‘일차’ 문화를 즐긴다.
외로운 섬에 반가운 손님도 있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이하 센터) 활동가들이 10대의 손에 소식지 ‘퀴어뱅’을 건넸다. 소식지에는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만화도 있고 안전한 성관계를 위한 지식과 검정고시 학원 정보도 담겨 있다. 센터는 지난 4월부터 늘푸른여성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서 10대 성소수자 여성과 사회적 서비스를 연결하는 이동상담 프로그램 ‘레인보우 브릿지’(무지개 다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날도 센터의 활동가들이 공원의 한켠에 상담소를 차리자 10대들이 하나둘 다가와 고민을 나눴다. 지난해 이들은 ‘레인보우 브릿지’의 사전조사 활동인 ‘물보라 작전’을 통해서 성소수자 여성들 사이에 무지개 다리를 놓았다. 물보라 작전은 10대 성소수자 여성들의 생활실태 조사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어느새 안면을 익힌 공원의 10대 몇 명은 반갑게 다가와 활동가들과 인사를 나눴다.
공원의 또 다른 곳에선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들이 ‘학교 종이 띵동’이란 피켓을 들고 ‘10대 이반 교육환경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 레즈비언 ‘고딩어’ 사전 첫 장엔 ‘띵동’이 나온다. 용례는 이렇다. “너네 학교 종은 어떻게 울려?” 서로를 레즈비언인지 알아보는 질문이다. 만약에 “띵동”이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동성애자. 동성애자를 뜻하는 은어인 ‘이반’조차 이미 이성애자들이 알아버린 상황에서 10대 성소수자들이 새롭게 개발한 은어가 ‘띵’이다. 그래서 그들은 ‘레즈비언’이나 ‘이반’보다는 ‘띵’을 애용한다.

인천·강원·부산… 전국에서 모인 ‘띵’들

레인보우 브릿지 10대 활동가 유성(18·가명)이는 이 공원 출신 띵이다. 그의 첫 번째 공원 나들이는 중학교 2학년 때인 2003년. 그는 학교에서 이미 띵들을 만나고 있었지만 공원에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띵들을 보았다. 그리하여 존재 확인. “내가 레즈비언인지 확실하게 몰랐고, 우리 학교에만 그런 애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했는데 거기서 비로소 맞구나 했다.” 일차를 가서 신세계가 열리는 희열도 맛봤다. 그는 “학교에선 이반으로 찍혔고 공부는 이미 늦었는데, 일차를 직접 준비하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즐거웠다”고 돌이켰다. 일차에서 그가 맡은 일은 ‘남웨’. 일차팀은 사장, 부사장, 사회자, 남성웨이터, 여성웨이터 등을 맡은 10~20명으로 구성된다. 10대들이 스스로 회비를 모아서 종자돈을 만들고 호프집을 빌린다. 퍼포먼스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주로 가수들의 춤을 차용한다. 공연 연습엔 짧게는 한두 달, 길게는 1년씩 걸린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일차에선 댄스타임, 공개고백 등의 프로그램을 두어서 띵들 사이의 만남도 주선한다. 유성이는 “흥행이 성공하면 1천 명까지 손님이 몰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 레즈비언 10대의 ‘깜짝’ 등장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활력소가 됐다. 올바른 차별금지법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는 모습.




이러한 10대에 의한, 10대를 위한 일차 문화는 2000년대 초반부터 존재했다. 소문난 일차엔 경향 각지의 띵들이 몰려온다. 유성이의 친구 리인(가명)이는 “인천에선 매주 오고, 강원도나 부산에서도 매달 왔다”고 전했다. 그곳은 대한민국 10대 레즈비언의 해방구인 것이다.
공원의 10대에겐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진짜 가족에게서는 이해받지 못하는 성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 서로를 엄마, 아빠, 아들, 딸로 부르며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리인이는 “친가족에게 느끼지 못했던 면을 선배나 친구들 속에서 찾으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배제당한 기성의 가족문화를 반복하는 한계도 있지만, 서로를 그만큼 ‘끔찍하게’ 아낀다는 방증이다. 이렇게 혈연처럼 단단히 엮인 공원의 내부 지지 체계는 가출 뒤에도 기대는 언덕이다. 지난해 166명을 대상으로 한 ‘물보라 작전’ 조사에서 가출한 이후에 누구와 살았는지 묻는 질문에 52.6%가 이반 친구나 선후배와 지냈다고 응답했다.
이 공원 바깥에도 자신을 드러낸 10대 성소수자들이 있다. 5월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나무 그늘 아래서 이들의 ‘전국구 모임’이 열렸다.


인권운동 커뮤니티 활동에 신난 아이들


대전에서 올라온 중학생 지민(이하 가명), 대구에서 올라온 고고생 진기, 강원도에서 올라온 대학교 1학년 은희 등 청소년 20여 명이 모여 앉았다. 봄소풍을 나온 청소년성소수자커뮤니티 ‘라틴’(‘레인보우 틴에이저’의 줄임말·cafe.daum.net/Rateen)의 회원들이다. 이들 가운데 경기 분당에 사는 중학교 3학년 여학생 서진(15)이는 서울의 한강도, 이반(동성애자)도 이날 처음 보았다. 각별한 첫날을 맞은 서진이는 게임을 하다가 벌칙에 걸려 노래를 불렀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혼자서 서울에 와봤다는 서진이는 “어떤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서서 버스를 타고 여기에 왔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와 자신이 여성을 좋아한단 생각에 힘들었던 기억을 토해냈다. 얼마 전 두 살 위의 언니에게 커밍아웃을 했다가 ‘하나님의 섭리를 역행하는 죄인’이란 소리를 들었던 아픈 기억, 정말로 다니고 싶었던 교회에 나갔을 때 전도사가 ‘가정은 올바른 남녀의 결합’이란 얘기를 하자 남들은 웃는데 혼자서 털썩 주저앉아 말없이 울었던 기억을 곱씹었다. 그래도 비로소 ‘동포’를 만난 소녀의 얼굴엔 웃음이 번졌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맑음(17)이는 중학교 시절에 공원에 몇 번 나갔지만 공원 문화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묻어두어야 하나, 고민하던 즈음에 라틴을 만났다.
지난해 1월 라틴을 만든 진기(18)는 대구발 서울행 고속버스 첫차를 벌써 여러 번 탔다. 매달 열리는 라틴의 정기모임을 위해서 새벽 6시20분 첫차를 탔다. 진기는 “지방에선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접할 기회가 적다”며 “그래서 자기 안의 호모포비아도 크고 탈반도 많이 한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답답했던 진기는 스스로 성소수자의 인권을 얘기하는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현재 라틴의 회원 수는 560여 명. 그는 “정말로 이만큼 커뮤니티가 커질 줄은 몰랐다”며 “목마른 인재들이 스스로 찾아왔다”고 말했다. 라틴은 한 달에 한 번씩 성소수자 관련 토론 모임을 연다. 이날도 봄소풍을 나오기 전에 5월 말에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에 들고 나갈 피켓을 만들었다.



△ 10대들이 스스로 기획했던 거리 플래시 몹, ‘작전, 그녀를 찾아라.’ (사진/ ‘무지개행동’ 10대팀 제공)





라틴에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청소년도 있다. ‘여고에 다니는 남학생’ 준엽(18)이는 스스로를 ‘여성에서 남성으로’(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로 소개했다. 어린 나이에 스스로를 레즈비언도 아닌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것이다. 준엽이는 “열다섯 살에 레즈비언의 정체성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가방끈으로 목을 조였다”며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렵게 선배 FTM 트랜스젠더를 만나 내 정체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성정체성을 찾아온 준엽이는 “어른들은 성인이 된 뒤 (성정체성을) 결정하라고 하지만 사실 그 말에는 어른이 되면 그렇지 않을 것이란 전제가 들어 있다”고 말했다. “치마를 입고 있으면 벗고 있는 것 같다”는 그가 여고를 다니며 겪었을 고충은 ‘안 봐도 비디오’다. 날마다 “여자냐 남자냐”고 나무라는 교사들과 전쟁을 치렀다. 그는 “지금도 여자로 패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며 한숨을 지었다. ‘패싱’(Passing)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드러내면 차별받기 때문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체성을 숨기는 일을 말한다.
성소수자 집회에 떠오르는 ‘10대팀’

자신의 문제에 맞서는 10대 레즈비언들은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지난해 성적 지향을 차별금지 항목에서 삭제한 차별금지 법안에 반대하는 운동 과정에서 레즈비언 10대들의 활약은 빛났다. 이들의 갑작스런 등장은 성소수자 차별반대 연대운동체인 ‘무지개 행동’이 10대팀을 별도로 결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0대팀’은 당시 서울 대학로에서 차별금지 법안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도 벌였다.
5월14일 서울 북아현동에선 10대팀의 춤연습이 한창이었다. 인기가수 아이비의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10대팀 아이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공연을 준비하는 10대팀 10명 중에 9명이 레즈비언. 가히 ‘청소녀 아마조네스’의 전성기다. 이들은 일일찻집 준비에서 익혔던 노하우를 후원파티에 쓰고 있다. 이들이 주최하는 ‘성소수자 10대가 10대를 위해 만드는 커밍아웃 가이드북’ 제작을 위한 후원파티는 5월24일 홍익대 부근 클럽에서 열린다.
이렇게 새로운 세대의 레즈비언들은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오래된 슬로건을 몸으로 실천하고 있다. ‘침묵은 죽음이고, 행동만이 삶이다.’(Silence Is Death, Action Is Life) 더 이상 행복은 무지개 너머에 있지 않다. 바로 여기가 무지개 너머의 섬이다.

각주1: 그리스 동부 에게해에 있는 섬. 이곳의 여성을 레즈비언이라 부르는데, 고대 레스보스에는 여성들만의 공동체가 있었다. 여기서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단어 레즈비언이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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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8-07-01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요일 시청 광장에 갔더니, 정말 무지개 깃발이 등장했더군요. 부산서 같이 간 젊은이들에게 저 깃발 아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모르데요. 그래서 동성애자, 성적 소수자들 상징이라 했더니... 좀 거부감이 드는 듯하다는 말들을... ^^ 아직 오래 오래 더 있어야 할 문제일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