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OTL] 쓰린 새벽의 아이들



연속기획 ‘인권 OTL-30개의 시선’ 첫 번째 이야기… 일터로 내몰린 이주·탈북 청소년들

▣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인권 OTL-30개의 시선①]






“전 제 자신을 포기했어요. 다음 생애에 태어나면 달라지겠죠.”
슈허(18·가명)는 10살 때 몽골에서 한국에 왔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던 2002년부터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당시 슈허의 부모는 불법 체류 노동자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사정은 점점 나빠졌다. 엄마가 몽골로 돌아간 사이 아빠가 같은 공장 동료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지 몇 달 만의 일이었다. 결국 엄마가 돌아와 장례를 치른 뒤 슈허는 아예 학교를 그만두고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뒤 엄마도 단속에 걸려 몽골로 강제 출국됐다. 이후 지금까지 혼자 살며 공장과 건축 현장을 전전하며 일을 하고 있다.

아빠 살해된 뒤 엄마까지 강제 출국

“이대로 일하다가 단속에 걸리면 제 신분을 보장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노력해도 바뀌는 건 없어요.” 아빠가 살해를 당했는데도 불법 체류(미등록) 신분이라 큰 소리 한 번 못 낸 기억은 아직도 가슴을 후빈다. 아이는 그렇게 일찍 포기하는 법을 배워갔다. 세상을 향한 불신도 커져갔다. 대화를 나눌 때도 사람과 눈을 맞추지 않고 말은 일부러 냉소적으로 내뱉는다.
어릴 때부터 키가 컸다는 슈허는 3년 전부터 수염을 기른다. 그러면 나이가 더 많아 보여 일하기가 편해서다. 일하는 곳에서는 늘 ‘26살’이다. 주점, 노래방 등 ‘밤업소’에서도 꽤 많이 일해봤다는 슈허는 그렇게 일해 번 돈 중 20만~40만원씩을 몽골에 있는 엄마에게 보낸다. 슈허는 불안정한 일용직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빵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이주민 지원단체를 통해 직업교육센터를 알아보았지만 ‘불법 체류자’인 그에겐 직업교육의 문마저 닫혀 있었다.
“열심히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던데요.”
인호(18·가명)도 이제 절망을 본다. 북한에서 6살 때 중국에 넘어가 6년, 다시 한국에 넘어와 6년을 살았다. 중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닐 때는 우등생이었던 그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는 열등생이 됐다. 한국 입국 과정에서 생긴 교육의 공백에 외국어, 외래어가 뒤섞인 교과과정이 겹치자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게다가 왕따시키는 아이들과 무시하는 교사를 만나 상황이 나빠졌다. 욱하는 마음에 사고도 쳤고 싸움도 벌였다. 공부가 아니라도 운동으로 성공하자, 마음을 먹고 축구공을 찼다. 초등학교 6학년 축구교실도 다니고 새터민 친구와 어울려 하루에 6시간씩 연습했다. 하지만 유치원 때부터 축구를 배운 한국 아이들의 기술을 당하긴 어려웠다.
갈수록 집안은 어려워졌다. 국경을 넘다가 잡혀서 중국 감옥에 갇힌 누나에게 꼬박꼬박 가족이 돈을 부쳐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버지 건강은 날로 나빠져 일을 계속하기 어려웠고, 동생은 몸까지 불편했다. 차라리 돈을 벌자고 마음을 먹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방과후 음식점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시급으로 4천원씩 받아서 한 달에 80만~90만원을 벌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지만 부모도 끝까지 말리진 않았다. 중국집, 김밥집, 피자집, 야식집…. 각종 배달일을 전전하며 2년이 흘렀다.



△ 교육청이 펴낸 <내 이름은 마르갓>은 몽골 소녀 유나가 한국에 와서 경험한 차별과 고립을 그리고 있다. <내 이름은 마르갓>, 오세호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하루에 60~70개 배달을 감당하려면 가게 매장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고 움직여야 했다. 그러다가 허리를 다쳤다. 한두 주 병원에서 쉬다가 또다시 일을 나갔다. ‘전쟁 같은’ 일을 끝내고 눕기만 하면 곯아떨어지는 날들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 학원을 다니던 친구가 가장 부러웠다는 인호는 오늘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오토바이 배달만 2년, 허리 다쳐도 일해

통계(상자기사 참조)로는 잘 잡히지 않아도 현실은 명확하다. 부모를 따라서 한국에 들어온 이주 1.5세대 혹은 2세대 청소년들,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남쪽으로 온 탈북 청소년들 가운데 학업 대신 노동으로 내몰리는 아이들이 많다.
새벽 5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아저씨들이 드디어 가게 문을 나선다. 재빠르게 흩어져 있는 소주병과 안주 그릇을 치운다. 누가 또 들어올까 간판 불도 꺼버린다. “저 들어갈게요.” 이렇게 마치르(16·가명)의 노동의 새벽은 끝난다. 토요일은 영락없이 이 시간이다. 거리에 나오자 어렴풋이 동이 트려고 한다. “다녀왔습니다.” 엄마는 벌써 출근 준비 중이다. 마치르는 눕자마자 잠에 빠져든다.
몽골 출신인 마치르가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온 지도 벌써 3년째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면서부터다. 친구와 싸움을 했는데 선생님이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해 고민하다 그날부터 학교에 안 갔다. 당시 아빠는 단속에 걸려 몽골로 강제 출국 됐고 엄마만 남아 불법 노동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마치르가 학교에 계속 다니길 바랐지만 곧 포기하고 일자리를 알아봐주었다. 그렇게 14살 때부터 전국의 공장과 우시장, 이삿짐센터 등 9곳의 일자리를 전전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잡았지만 힘든 일에 쉽게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힘들었다는 우시장에서는 한 달, 새벽별 보고 퇴근해야 했던 빵공장에선 세 달을 버텼다. “우시장에선 아침 6시30분부터 돼지머리 털 벗기는 일을 했는데 불법 취업 단속이 심했어요. 빵공장에선 기계에 들어간 재료가 바닥날 때까지 15시간 이상 일을 해야 했고요.” 그래도 또래의 몽골인 동료들이 많았던 대형 물류센터에서는 ‘6개월 근무’ 기록을 세웠다. 마치르가 몽골인 친구를 하나둘 일터로 불러 7명까지 늘었다. 아침 8시부터 쉬지 않고 짐을 날라 번 월급 100만원은 딱 하루 쉬는 일요일에 또래 동료들과 어울리다 보면 곧 동이 났다. 불안한 신분에 미래가 불투명하니 저축의 동기도 적다. 그는 친구 2~3명과 같이 공장을 떠돌다 최근엔 집 근처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저녁 7시에 출근해 모든 손님이 나갈 때까지 서빙을 하고 낮에는 주로 잔다. “술집은 밤에 놀려고 다니는 거지요, 뭐.” 한국말 표현이 서툰 그가 말한 ‘술집에서 일하는 이유’다. 시급 2천원씩 받는 돈은 그나마도 가불을 많이 해 월급은 늘 ‘쥐꼬리’이다.

일하고 돈 못 받기도… “또래 동료가 위안”

일만 하고 돈을 못 받은 기억도 있다. “한국에는 미리 그만둔다고 말 안 하고 그만두면 돈 안 줘도 된다는 법이 있어요?” 마치르가 물었다. 1년 전, 한 공장에서 3개월 정도 일한 뒤 마지막달 월급을 못 받았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친구를 만나 놀다가 ‘그냥’ 쭉 안 갔다. 그래도 마지막달 월급은 받고 싶어서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사장은 “이럴 땐 한국 법으로는 돈을 안 줘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마치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별수 없었다.



△ 서울의 한 교회에서 몽골 아이들을 위한 방과후 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서 비로소 한국말을 배우는 아이들도 많다.




빌구릉(17·가명)은 그래도 학교에 다니고 싶어 발버둥을 쳤다.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친 뒤 고등학교에 가고 싶어 직접 교육청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비자가 없어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그러다 친구 츠러(18·가명)가 일하는 식당에 소개를 받아 들어갔다. 아침 10시부터 12시간을 주방에서 일한다. 아버지와 함께 살려고 14살에 한국에 왔던 츠러는 오자마자 공장과 공사장에서 일을 했다. 이후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2년을 채 못 다녔다. 한국에서 몽골 여성과 재혼한 츠러의 아버지는 새엄마의 자녀가 입국한 뒤부터 츠러에게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학대를 못 이겨 가출을 하자 아버지는 “몽골에 돌아가 대학에 가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아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결국 다니던 학교만 그만두게 한 뒤 츠러를 내쫓았다. 옷가지도 챙겨나오지 못한 그는 가까스로 식당일을 구했고 지금 하고 있는 노동이 그에게 ‘전부’다. 쫓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몸이 아파도 쉰단 말 한 번 하지 못한다.
이렇게 학교는 멀고 일터는 가깝다. 이주 1.5세대 또는 2세대들은 이주 1세대인 부모들과 다른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10대에 입국해 5년 이상 한국에 살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한국인’이 된다. 부모는 40년의 인생 중 5년을 한국에 산 것에 불과하지만 아이는 15살의 인생에서 사실상 절반에 가까운, 더구나 민감한 성장의 시기를 이곳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아이는 한국말과 물정을 익히며 ‘유능한 한국인’이 되고 부모는 여전히 말이 서툴러 ‘무능한 외국인’에 머물게 된다. 결국 부모는 아이에게 의지하게 되고, 아이는 부모에게 불만을 품는 갈등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돌아갈 이주민’이 아니라 ‘살아갈 한국인’이 된다. 하지만 아직도 미성년인 그들을 부모는 보호해주지 못하고, 한국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

탈북 뒤 처음 꾼 꿈 ‘의대 진학’ 포기

부모가 ‘불법’이어서 학교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적응하기는 더욱 어렵다.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이은하 교육문화팀장은 “불안한 신분에 한국어로 자신의 상황을 표현도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교육 접근성은 떨어지고 노동 접근성은 높은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지적이다. 이 팀장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는 교육이 안 된 아이들이 결국 사용자에게 다루기 쉬운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에선 초기가 중요하다. 한국에 입국한 뒤 3~6개월만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면 수업에 적응을 하지만, 수준별 한국어 어학과정조차 공교육에 마련돼 있지 않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서바이벌 한국어’를 배워서 체류 2~3년이 지나면 한국말에 능숙해지지만 이미 학교 진도에서는 멀찌감치 떨어져버린 뒤다. 더구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10대 초반에 입국하기 때문에 2~3년이 지나면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맞는다. 이렇게 노동 권하는 사회에서 학교는 멀고 노동은 가깝다.



△ 차별은 분노를 키운다. 2007년 프랑스 파리 교외의 이주민 밀집지구에서 이주 청소년들이 ‘봉기’를 일으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더 이상 남의 나라 얘기만은 아니다. (사진/연합/ AP PHOTO/ THIBAULT CAMUS)




탈북 청소년도 이주 청소년과 비슷하게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다. 은미(18·가명)는 9살 때 북한 국경을 넘어 5년 동안 중국을 떠돌았다. 중국 고아원에서도 있었고 교회를 통해 소개받은 가정집에 머물기도 했다. 북한에서는 소학교를 2년 정도 다닌 게 전부다. 중간에 북한에 잡혀갔다가 다시 탈출하기도 했다. 2004년, 드디어 입국해 먼저 들어와 있던 아빠를 만났다. 하지만 엄마는 탈북 중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얼마 뒤 아빠는 한국에서 만난 새터민 여성과 재혼해 아이를 낳았다. 은미는 1년 동안 혼자 공부해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학력 간극이 컸던 상황에서 정말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공부를 하다 보니 꿈이 생겼다.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수능시험에 맞춰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돈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결국 꿈을 포기했다. 대신 탈북 과정에서 습득한 중국어 실력을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집을 떠나 독립했다. 친구와 살며 대학에 갈 때까지 돈을 벌기로 했다. 지금은 편의점 두 곳에서 하루 8시간씩 일한다.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는다. 시급 3500원은 그에게 소중하다. 그 돈을 쪼개 아침에 중국어 학원에 다닌다. 편의점에서 일하면서도 책을 한시도 놓지 않는다. 계산대 옆에는 늘 중국어 교재가 펼쳐져 있다. 힘들다는 말도 뱉어본 적 없이 그저 묵묵히 현실을 헤쳐나간다. “돈을 벌면, 엄마를 찾고 싶습니다.” 그를 지탱하는 힘이다.

“인권 짓밟힌 아이들, 결집한다면 재앙”

이주·탈북 청소년들은 여기, 한국에 살고 있다. 교육보다 노동이 ‘현실’이란 이름으로 이들에게 가깝다. 자꾸만 노동으로 떠밀리며 사회를 향해 냉소를 던지는 아이들이 “위험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접촉해온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 이은하 팀장은 “교육에서 소외된 채 노동하고 살아가야 한다면 인권이 짓밟힌 아이들이 결집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라며 “아이들을 잘 길러낸다면 엄청난 인적 자원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재앙”이라고 말했다.
청소년. 아직은 고단한 노동의 새벽을 맞기보다 희망찬 미래의 꿈을 꿀 나이다. 슈허의 자포자기, 인호의 전쟁 같은 일, 마치르가 맞는 지친 새벽, 빌구릉의 좌절된 향학열, 의사가 되고픈 은미의 희미한 꿈.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제, 선택은 우리 몫이다.





 



‘노동하는 이주아동’ 얼마나 될까


이주아동 8천여 명·새터민 51.8% 어디로?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대부분 미등록(불법체류) 신분인 부모를 따라서 한국으로 온 이주 2세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현재로선 뚜렷한 통계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현재 학교에 다니지 않는 이주 아동 수를 묻자 교육과학기술부는 “행정자치부에 (이주 아동) 전수조사를 할 때 좀 파악해달라고 요청했는데 실제 조사에서는 빠졌다”는 답만 돌아왔다.
간접적인 파악은 가능하다.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 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2007년 12월 말 기준으로 20살 이하 국내 불법 체류 아동·청소년은 9014명이다. 법무부의 2005년 자료에는 불법 체류를 포함한 외국인 중 취학 연령대인 7~18살은 1만7287명으로 나온다. 이 중 외국인 학교 재학생 7800명을 제외하면 약 9500명이 남는다. 이들 중에서 국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1574명에 불과하다.(‘다문화 가정의 자녀교육 실태조사’, 조영달, 2006) 즉, 8천여 명의 학령기 외국인 아동·청소년이 학교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불법체류 신분으로 추정된다.
옛 교육인적자원부 내부 조사자료를 보면, 국내 학교에 재학 중인 불법 체류자 자녀는 2003년 205명에서 2005년엔 148명으로 오히려 줄었다. 2003년 조사에서 재학생 205명의 국가별 분포는 몽골이 16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중국 14명, 파키스탄 8명, 방글라데시 7명 순이었다.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몽골인의 특성상 부모가 이주하면 아이도 한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조사는 지난해부터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주해 ‘새터’를 잡은 아이들의 상황은 이주 아동들과 다르고도 같다. 최근 무지개청소년센터가 새터민 청소년 613명을 대상으로 한 현황조사 결과, 이들의 탈북 당시 평균 연령은 13.8살, 북한에서의 평균 학력은 4.99년으로, 중1 수료 수준에 해당한다. 탈북을 혼자 감행하는 비율도 전체의 31.8%에 이른다. 남한에 와서 가족을 만나는 경우가 많지만 19.2%는 혼자 삶을 꾸려간다. 제3국 체류 기간은 평균 29개월로, 13살의 나이에 다른 나라를 전전하며 고생을 하고 오는 셈이다.
힘들게 와서도 51.8%는 학교 밖으로 내몰렸다. 그 아이들의 39.1%가 자동차 정비, 미용실 등의 일터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도 한국에 ‘코리안드림’을 품고 오지만 학교 정착에 어려움을 겪다가 노동으로 내몰리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국제결혼 가정의 자녀들


“재혼한 엄마 따라 온 한국, 힘들어요”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저는 한국 사람과 재혼한 어머니와 살기 위해 2003년 한국에 왔습니다. 처음엔 한국말을 몰라 1년 동안 집에만 있었습니다. 이후 중학교 3학년으로 학교에 들어갔지만 한국어를 하나도 몰라 수업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에겐 왕따를 당했고, 선생님들은 저를 포기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니 저를 보고 외국인 노동자라며 놀리더군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결국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몽골 출신 17살)
지난 1월16일에 있었던 ‘미등록 이주아동 합법 체류 촉구 연대’ 기자회견장에서 발표된 사례다. 국제결혼이 늘고 특히 재혼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이주아동들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국제결혼 가정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교육 문제 등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재혼가정에 엄마를 따라 들어온 아이들은 언어, 국적 등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재혼한 이주여성을 따라온 자녀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2007년 2월 경기도가족여성개발원이 조사한 자료를 통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결혼이민여성은 1만8420명(2006년 기준)이다. 국제결혼 건수로 보면 전국의 23.1%(2005년 기준)를 차지한다. 경기 지역 이주여성 810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 결과 이 가운데 21.3%가 재혼인 것으로 밝혀졌다. 재혼 가정 중 자녀를 한국에 데려올 의향이 있는 사람이 87.4%에 이른다. 이미 자녀를 데려온 경우도 6명 정도 확인됐다.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경우 국적, 언어, 한국 가정 적응 등 다양한 문제가 겹친다. 하지만 아직 실태 파악도 되지 않아 뾰족한 지원책은 없다. 한 국제결혼알선업체 관계자는 “한국 남자도 재혼이면 자신의 아이 양육을 위해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사람과 결혼하길 원하기 때문에 재혼인 상대를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이 경우 여자에게도 아이가 있다면 결혼 뒤 양육 문제로 남자 쪽 눈치를 보게 된다”고 전했다.
국제결혼 가정 자녀의 고단한 삶을 보여주는 자료도 있다. “국제결혼 가정 자녀는 10명 중 1명꼴로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거나 중퇴했으며, 중학교 미진학 및 중퇴자는 10명 중 2명 정도인 것으로 추측된다.” 2006년 12월에 나온 ‘다문화 가정 교육 지원을 위한 자료개발 연구’ 결과의 일부다.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한국염 대표는 “국제결혼 가정 자녀의 경우 학습 부진이나 부적응으로 문제가 생기면 이주여성들이 엄청난 자책에 빠진다”며 “사회적으로 뒷받침을 못해 일어나는 일을 엄마가 외국인이라 그렇다는 식으로 주홍글씨를 달아서는 안 된다. 재혼가정의 아이들은 국적, 언어 등 문제가 더 심각한 만큼 특별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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