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이창동 <밀양>(2007): 용서의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1. 밀양(密陽)을 굳이 ‘빽빽한 빛’으로 풀었습니다. 용서라는 주제의식 속에 영화를 새길 때, 신애가 살인자의 딸의 손에 머리카락을 맡기는 그 짧은 순간 속에 용서의 빛이 ‘빽빽하게’ 응결했다고 여깁니다. 신을 매개(媒介)로 한(했기에) 신애-살인자 사이의 용서는 어긋나지만, 오히려 상처 받은 약자로서 그 딸을 매개로 그 용서의 빛은 다시 소생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요체는 ‘신⇒딸’로 옮아가는 매개의 변화에 있지요. 2. 다소 의도적으로 종찬의 시각을 생략했습니다. 종찬은 그 자체로 장편의 비평이 필요할 만큼 흥미로운 존재이고, 또 ‘밀양’이라는 빛의 내용을 용서로 제한시켰기 때문입니다. 3. 이창동은 기복이 없는 일급이고, <밀양>은 <인디아나 존스> 따위의 영화 30개와도 바꿀 수 없는 수작입니다. 그가 또 영화를 내면 무조건 보시기 바랍니다. 4. 다음 주에 다룰 영화는 이윤기의 <아주 특별한 손님>(2006)입니다.
신애가 종교를 매개로 살인자를 용서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딸 손에 머리카락을 맡긴 순간 꺼져가던 용서의 빛은 되살아나 ‘밀양’을 이뤘다
약자는 강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가령 김대중씨가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는 것과 망월동의 고혼들이 용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본을 용서하는 판국에 친일파를 용서하지 못하랴?’라고들 하지만, 친일파가 여태껏 사회적 강자의 자리를 점유할 수 있다는 한국 근현대사의 공공연한 비밀이 번연한 터에는 어림없는 소리다. 천 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다. 아니, 도덕의 탈을 쓴 정치적 구호로는 오히려 상처의 실재를 밀어낼 뿐이니 용서란 오직 불가능하다. 그래서 리쾨르는 ‘망각일 뿐인 용서’를 경계하고, 카뮈는 용서를 위한 철저한 기억을 주문한다.
하지만 종종 그 불가능을 넘어서고픈 욕동이 솟구치기도 한다. 언젠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자로 삼은 사람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신문은 한결같이 미담으로 각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낱 세속의 피해자이지 십자가상에 달려 용서를 말하는 예수[神]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은, 그리고 세속은 억압된 기억의 실재를 기어코 되불러내는 법이며, 되불려나온 상처는 이미 치료가 불가능해진다.
이 불가능한 용서를 욕심내는 일은 겉으로 보아 영웅적이다. 용서를 향한 그 도덕적 강박은 차마 초인적이기조차 한데, 관념 속에서 스스로를 영웅시·초인화하려는 이들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곧 나르시시즘이다. 영화 <밀양>에서 아이를 잃은 신애(信愛!)가 상실과 자책의 고통과 대면하는 가운데 나르시시즘에 빠져가는 장면들은 여러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외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모습을 취하며 깊어간다. 여기서 종교는 결정적인, 그리고 거의 유일한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종교란 사랑과 더불어 대표적인 나르시시즘의 형식이다. 실존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 종교에 의탁한 신애는 제 마음대로 신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그 의지를 자신의 원망(願望)과 동일시한다. 그러고는 그 용서의 무대,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야 하는 비극적이며 영웅적인 무대에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어느 화창한 날, 신애는 외려 참척(慘慽)의 절망을 씨앗 삼아 떳떳하게 가꾼 나르시시즘을 뽐내고자 꽃을 꺾어들었다. 예배를 마친 뒤에 용서의 ‘의도’를 품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찾아 굳이 교도소로 간다. (아아, 신애씨, 대단해요!) 그러나 문제는, 신애를 용서의 강박으로 내몬 바로 그 신이 유독 신애만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신을 믿고 있었고, 누구나 자신의 ‘의도’ 속에 신을 담아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애만의 영웅적 용서의 대상이어야만 할 감옥 속의 그 남자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저 홀로 ‘생각’하고 있다. 신애의 ‘의도’나 그 남자의 ‘생각’은 모두 신으로부터 발원했지만, 신애의 의도는 그 남자의 생각이 아니었다.
이 세속의 어긋남, 내 의도와 타인의 현실 사이의 어긋남과 부닥친 신애는 그만 실신하고 만다. 그러나 교도소 앞에서의 실신 장면은 실은 꿈에서 깨는 장면과 다를 바 없다. 그간 자신을 관념적으로 보호하고 변명하던 나르시시즘의 거울방[鏡箱]에서 이로써 떨쳐나오는 셈이다. 그리고 그 나르시시즘의 균열과 더불어 신애의 몸부림은 다시 시작된다. 애초에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건졌던 바로 그 나르시시즘의 환상은 이제 적대적 짝패로 둔갑한다. 아직은 현실 속으로 내려앉지 못한 신애, 아직은 용서를 세속과 시간과 타자의 문제로 이해하지 못한 신애는 여전히 신을 붙잡고 늘어진다. 영화는 신과 대결하는 신애의 모습을 매우 인간적으로 묘사한다. 나르시시즘 속의 신과 함께 웃었던 그가 다시 나르시시즘 속의 신과 더불어 울고 있는 것이다. 무릇 억압된 것은 증폭되는 법, 그사이 다시 돌아온 죄책감은 더 커져버렸고, 급기야 신애는 죄책감의 정점에서 자해에 이른다.
살인자의 중3 딸은 그 아버지에 의해 승합차 속에 끌려온 채로, 남편과의 사별 후 말없이 아버지를 떠나 밀양으로 온 신애와 처음으로 대면한다. 그리고 아득한 미래의 기억 속에서 상처는 상처를 본다.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종교에 귀의한 신애의 시야에, 그 딸은 도시의 한구석에서 또래의 남자애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구타당하는 중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신애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그 하염없는 시선은 도시의 기원과 성격을 묻는 희생양의 것이다. 그러나 희생양의 슬픔은 의문이 아니라 동종의 상처 속에서만 깊게 다가선다. 신애의 궁극적인 만남이 교도소의 살인자가 아니라 미장원의 딸과 이루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해한 후 병원에서 퇴원한 신애가 들른 미장원에는 소년원을 갓 출옥한 그 딸이 “학교를 때리(려)치운 채” 미용사로 일하고 있었다. 딸은 신애의 머리카락을 반쯤, 그것도 왼손으로, 깎아줄 수 있었다. 머리를 깎다 만 신애가 미장원을 뛰쳐나왔다는 사실은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더 중요한 사실은, 피해자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가해자의 딸손에 맡긴 그 짧은 순간 속의 ‘빽빽한 빛’[密陽]이기 때문이다.
신애는 자신에게 용서의 힘을 준 바로 그 신에 의해 ‘명시적으로’ 용서를 도난당했다. 그러나 신, 혹은 나르시시즘을 매개로 한 살인자와 신애의 용서 게임은 결국 현실에 이르지 못한다. 그 현실은 살인자의 딸이 겪는 세속의 상처와 더불어 되살아난다. 신애는 왼손의 그녀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반만 맡김으로써 ‘묵시적으로’ 용서를 되찾는다.
내 집에서 나오면 곧 ‘송강호 거리’라고 쓰인 간판이 전봇대 높이 걸려 있고, 잠시 걸어 오르면 종찬이 일하던 그 카센터가 여전히 영업 중이다. 종찬은 극히 흥미로운 캐릭터이고, 신애 역에 지지 않는 주인공이다. 종찬은 <오아시스>(2002)의 종두(설경구)와 더불어 한국 현대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남성 연기의 풍경을 이룬다. 종찬이 다만 자신의 세속적 욕망에 응해서 신애를 선택적으로 주목했고, 일반자(一般者) 중의 한 매력적인 개체를 제 나름대로 소유하려는 것인지, 혹은 신애와의 만남 자체로 그 자신의 존재와 삶의 양식이 뒤바뀐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용서의 빛’에서 바라본 종찬의 역할은 의외로 미미하고, 그가 신애에게 바치는 충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김영민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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