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예 일을 저질렀다.

야자 때문에 3월 내내 고민이었다. 자율로 하자니 반아이들 성적이 금방이라도 바닥을 칠 것 같고, 강제로 하자니 이놈의 야자라는 것이 이대로 지속되는 한 '담임노릇'이라는 게 결국 '간수'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담임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은 야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아이들을 만난 날부터, 아니 우리 학교는 첫 날은 야자를 안 했으니 둘째날부터 아이들과 나의 갈등은 시작되었다. 학원, 과외 때문에 야자를 매일 빠져야겠다는 아이가 네 명, 같은 이유로 일주일에 두세 번 빠질 수밖에 없다는 아이가 또 네다섯 명, 몸이 아파서 못 한다는 두 명. 그러고도 하루에 보통 5~6명의 아이들이 조례시간부터 종례시간까지 담임을 찾아온다. 모든 반이 다 이러니 거의 매일 학년실은 야자를 빼준다, 못빼준다 하며 실갱이하는 아이들과 담임들의 씨름장같다. 도망가는 아이들도 당연히 생긴다. 매타작하는 소리, 야단치는 살벌한 소리...

우리 반도 도망가는 아이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지? 고민하다가 도망가서 못한 만큼 공부를 시키면 되겠다는 생각에 암기할 것을 주고, 시험도 쳤다. 잔소리는 기본이고 글쓰기 훈련도 시킬 겸 반성문도 쓰게 했다. 빼주고 싶은데 형평에 어긋나서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그냥 도망가고 다른 아이들처럼 벌 받아라'하며 '도망'을 종용하기도 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하면 다음 달엔 하루를 이유 불문하고 빼주겠다는 야자자유권 티켓도 걸었다. 아이들이 문화를 누릴 권리를 지켜준다며 최민식 사진전을 보러간다면 빼주겠다며 야자를 미끼로 다른 활동을 하도록하기도 했다. 우리반의 경우 야자에 관한한 그다지 엄격한 규칙을 들이댄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도망'을 가버리면 마음이 우울했다. 섭섭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아이들은 주로 내가 일찍 퇴근할 때 도망을 간다. 나와 아이들 사이의 믿음을 깨뜨린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에게 억지 화를 낼 때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욱 나를 힘들게 했다. '도망'이라는 낙인으로 무슨 대단한 잘못을 한 것처럼 아이들을 야단쳐야한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했다. 아프다는데... 생일이라는데...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데... 솔직히 하루에도 열두번씩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한 달을 아이들도 나도 견뎠다.

목요일 조례시간 분위기가 이상했다. 뭔가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 역력했고 학년실에서 매맞는 다른 반 아이들 숫자도 많았다. 반장에게 살짝 물어보니 확실하게 말은 안 했지만 뭔가 있는 눈치였다. 금요일, 퇴근하면서 성격도 활달하고 친구도 많은 우리 반 선도부장 해인이를 불렀다. 자리에 없는 아이들 번호를 좀 써놓으라고 이야기해 두었다. 밤에 해인이는 '샘 저 야자 체크 못하겠어요ㅜㅠ 애들이 눈이 무서워요 꿋꿋한 반장한테 시키면 안되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친구들 고자질한다는 느낌이 왜 들지 않을까. 친구들이 자기를 싫어하게 될까봐 두렵지 않다면 그게 비정상이지. 어쩐다... 어쩌지...

토요일, 어제 빠진 아이들 명단을 가지고 온 해인이는 다시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선도부장이니까 이 정도는 아이들이 이해해줄거라고, 니가 못하겠다고 하면 감독샘께 부탁해야하는데 그건 다른 반 아이들까지 압박하게 되는 일이라고 말도 안되는 논리로 설득했지만 자기는 도저히 못한단다. 그렇게 말할 줄 아는 그 아이가 참 예뻐보였다. 

조례시간에 담임인 내 입장과 '도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세 가지 중에서 선택하라고 했다. 1. 완전자율 2. 지금처럼 3. 감독샘 출결체크. 모르긴해도 2번도 꽤 선택할거라 여겼던 내 예상은 완전히 헛물을 켰다. 23명이 완전자율을 원했다. 이젠 다른 선택은 없다. 완전자율로 야자를 운영하면서 성적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 수 밖에. 도망가면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며 공부를 하는 아이들에게 상을 주는 방법을 선택해야겠지. 우선 다른 반 샘들께 양해를 구하는 편지부터 써야겠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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