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과 유토피아
강 명 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어떤 굉장하고 거룩한 생각을 접하면 늘 이 생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유토피아가 있는가, 또 그 내용은 무엇인가 되물어본다. 대개의 경우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어떤 행복지(幸福地)를 갖고 있다. 예컨대 기독교의 경우, 예수가 말한 천국(天國)이 그것이 될 터이다. 예수는 늘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천국의 구체성은 늘 소연하지 않지만, 대체로 현실에서의 차별과 고통이 사라진 세상인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종교가 약속하는 유토피아는 늘 애매하지만(애매해야 해석의 가능성이 넓어지는 법이다), 거기서는 현실에서의 고통이 존재하지 않으니, 공자와 맹자, 석가의 유토피아 역시 대충은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아편이라 했지만, 그의 사상의 종착지 역시 종교적 유토피아의 일종이다.
차등과 차별 있는 세상은 이미 유토피아가 아니다
조선의 국가이데올로기, 곧 성리학이 꿈꾼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이 역시 애매하다. 다만 기묘사화로 죽었던 개혁가 조광조(趙光祖)에게서 그 희미한 단초를 본다. 조광조가 생전에 추진했던 개혁책을 검토해 보면, 그가 모든 사회 구성원이 윤리적 인간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음을 알 수 있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형편없는, 비윤리적 인간들로 인해 고통을 겪는가. 모든 인간이 윤리적 인간이라면, 우리의 고통은 아마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한데 조광조가 생각한 그 윤리는 과연 일점의 오류도 없는 진리인 것인가. 중세의 윤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등과 차별을 근거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다. 차별과 차등을 전제하는 윤리가 진리인 세상은 이미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뿐인가. 조광조의 사유가 궐한 것은 경제적 평등이었다. 경제적 평등이 없으면 사회적 평등이 있을 수 없고, 정치적 자유가 있을 수 없다. 구조화된 경제적 불평등을 방치하고 개개의 사회 구성원의 윤리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경제적 평등을 지향한 유토피아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여전론(閭田論)은 경제적 평등을 골자로 삼고 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요약해 본다.
산골짜기와 하천 같은 천연의 경계로 땅을 자연스럽게 구획한다. 그 한 구획을 여(閭)라 부른다. 대개 30호로 구성되는 1여(閭)는 농촌 공동체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고, 공동으로 분배한다. 분배의 원칙은 노동량이다. 여장(閭長)은 개인의 노동 일수를 장부에 꼼꼼히 기록하고, 가을 수확 때 노동 일수에 따라 수확물을 분배한다. 노력에 따른 분배니 불평이 있을 수 없다. 농민이 아닌 수공업자는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상인은 자신이 판매하는 상품을 곡식과 교환하니, 역시 걱정할 것이 없다. 선비와 노동이 불가능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 선비 역시 농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농민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것도 안 되면 지식을 밑천 삼아 교육에 종사하거나 또는 농사법과 농기구의 개량 등에 기여하게 한다. 그리고 그 기여를 노동일수로 환산해 곡식을 분배한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이것이 다산의 유토피아다.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세상은 가망 없는 세상
독재정권 시절, 독재만 사라지만 모든 것이 좋아질 것 같았다. 이제 독재정권은 사라졌다. 독재정권이 사라진 뒤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독재를 걷어내자 오로지 물신(物神)을 향해 경쟁하는 인간의 욕망이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경제의 양극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만인을 적(敵)으로 삼는 무한경쟁이 인간 행위의 유일한 가치가 된 것이다. 독재정권을 걷어낸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력 속에는 역시 애매하지만 무언가 유토피아를 향한 갈망이 스며 있었다. 한데 지금 그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다산의 여전론 역시 실현 가능성 없는 공상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다산의 사유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공상이 없는, 곧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 세상에 살게 되었다. 유토피아를 꿈꾸지 못하는 세상은 가망 없는 세상이다. 21세기의 실학이 있다면 분쟁 없는, 만인이 평등한 유토피아를 다시금 상상해야 하지 않겠는가.
글쓴이 / 강명관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저서 :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 2003
『조선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푸른역사,2001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공간』,소명출판,1999
『옛글에 빗대어 세상을 말하다』,길,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