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 처음 만나던 날이 생각난다.
그땐 누가 어땠는지, 한 명 한 명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서로 머뭇거리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들...
교실로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 속에서 그렇게 우린 처음 만났지?
'얼굴과 번호를 익히기 쉽도록 번호순으로 앉아달라'는 나의 요구대로 운동장쪽 첫줄에 1번 윤정이가, 복도쪽엔 8번 개미가 앉아있었겠구나. 음... 이젠 교실 전체의 구도가 떠올라. 각자 자리에 앉아있던 너희들 얼굴까지 정확하게. ^^
참 신기한 것이 하루하루 세월이 쌓이면서 너희들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다가오는 그 묘한 경험이야. 실은 얼굴 생김새 뿐만이 아니라 성격이나 습관까지 환하게 느껴지거든. 한 다발의 안개꽃처럼 뭉텅이로 다가왔던 너희들이 서서히 저마다 색깔 다르고 향기 다른 송이송이의 꽃다발로 변하는 경험, 그 느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걸... 교사라는 직업이 지닌 큰 매력이지. 특히나 올해는 그다지 가시뾰족한 꽃도 없어서 크게 상처받은 일도 없었단다. 다들 잘 따라 주었지. 샘이랑 나들이 갈 때... 뭐, 솔직히 내 욕심만큼 따라와 준 것은 아니지만 나 혼자 '왕따' 시킨 적도 없잖아? 늘 한 두 녀석은 같이 가 주었지. 불쌍해서보였나? ㅋㅋ 그랬대도 상관없어. '연민'은 아주 훌륭한 감정이거덩..
2월 12일. 개학하고 너희들 제대로 못 챙겨주는 게 맘에 걸려. 아침 조례시간은 물론이고 , 아플 때, 뭔가 불편할 때 곁에 있어줬어야했는데 그러질 못했네. 그때부터 지금까지 샘의 정신적 공황상태 알지? 우리 반 분위기도 거의 그랬나? 다들 공부해야지~하면서 웃고 떠드는... 암튼 이젠 누가 뭐래도 너희들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할 나이가 되었어. 샘의 그 무수한 잔소리들...기억하지? 실천하는 사람은 얻을 것이요, 게으르게 미루는 사람은 잃을 것이야. 그렇지만 현상적 실패가 곧 실존적 패배는 아니라는 사실. 얻는 것이 곧 잃는 것이 될 수도, 잃는 것이 결국 얻는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늘 기억할 것.
고3이든 그보다 힘든 무엇이든 이 길고 긴 인생에 결국 우리가 해야할 일은 나를 속이지 말고 행복해지는 것, 그것 하나인 것 같아.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되 공부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학이 물질적 풍요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세상... 너희를 그 속으로 들여보낸다는 사실이 약간은 불안해. 스스로를 믿고 단단하게 여물기를. 그리고 꼭 기억해. 카르페디엠...
22일. 실은 정말 놀랐어. 그새 너희들이 이렇게 많이 자랐을지 몰랐거든. 정말 기쁘고 고마웠는데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너희 모두를 떠나보낸 것 같아. 그 날이 실은 마지막 날이었는데, 나도 뭔가 준비해야했었는데... 문집 때문에 샘이 정신이 홀라당 빠져있잖아. 지금까지.
오늘 오후엔 인쇄를 넘길거야. 그러면 좀 쉴 수 있으려나? ㅋㅋ
3월 1일 세상에서 한 권 뿐인 [나만의 문집] 건네줄게. 너희들 좋아라하는 모습 생각하며 며칠 밤을 꼬박 샜단다. 안 기뻐하면 안줄테다.
서로 좋아하는 관계가 어떠한 정서적 편안함을 주는지 너희를 통해 알았어. 잔소리하고 야단치고 싸우면서도 늘 마음 속엔 '믿는 구석'이 있었단다. 나를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을 거라는.. ㅋㅋ 너희도?
깐깐하고 쫀쫀하고 잘삐지고 잔소리 많은 나를 좋아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너희 한 녀석, 한 녀석 샘 역시 좋아했었다는 사실, 알지?
몸과 마음 모두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
2007. 2. 26. 아침에. 샘이 마지막으로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