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학급문집을 만들기 위해 학년 초부터 차곡차곡 자료를 모았다. 재작년 담임하면서 만들어본 '세상에 한 권뿐인 나만의 학급문집'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반 녀석들에게도 안겨주고 싶어서 평소 아이들에게 거의 뜯어내다시피한 여름방학 다이어리, 가족 이미지화, 폭력예방표어, 한글날 글짓기... 심지어 녀석들이 받은 상장까지 소소한 것들까지 챙기고 복사해두었다. 그리고 몇몇 착한 녀석들을 꼬셔두기도 했다.

그런데 교장샘이 예산을 할애해줄까 걱정이 되었다. 네 번째 만드는 문집이고 그 중 두번은 100%  학교 예산으로 제작했지만 올해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그'는 나를 포함한 다섯 교사를 사석에서 거리낌없이 'OO학교 五賊'으로 규정하는 교장인 것이다.

1,2학년 다른 담임샘들께 같이하자는 메신저를 띄웠지만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한 반이라도 같이 하면 학교운영위원회 안건으로 올려볼까 생각했는데... 그냥 아이들 설득해서 아이들이 조금씩 보태고 내가 또 조금 부담해서 만들려고 거의 뜻을 굳혔을 즈음 학습동아리를 운영하는 샘께서 동아리 아이들이 쓴 글로 문집을 내고 싶다고 하셨다. 달랑 나 혼자라면 형평성 문제 때문에 좀 그렇지만 다른 샘도 필요로 하는 교육활동이라면 학운위 안건을 통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12월 말 방학 직전에는 보충수업시수, 부교재채택 등을 주요 안건으로 하는 학운위가 있다. 학급문집에 대한 안건을 대충 만들어 우선 행정과장님께 예산이 어떤지 여쭤보았다. 당겨서 쓸 수 있는 다른 예산이 있다시면서 50만원 정도는 학운위 안건으로 올리지 않아도 되겠다고 하셨다. 단순한 나는 '그럼 나도 편하지~'하는 생각으로 교감샘께 갔다. 교감샘 역시 별무리는 없을 듯하다시며 교장샘께 여쭤보라는 말뿐. 나는 방학식 바로 다음날 여행일정이 잡혀있어서 교장샘께 여쭙는 건 다른 한 분 샘께 부탁했다. 우리 둘 다 교장샘은 敵도 아닌 賊으로 보시는 것 같지만 이건 뭐 공적인 일이고 마구 버려지는 교지 대신에 학급문집을 만들면 좋겠다는 당신 의사를 학년 초부터 다른 선생님들을 통해서 은근히 전하신 바가 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 싶었다.

그러나 열흘 남짓의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샘께서 전해준 교장샘의 대답은 '학교 인쇄소를 통해서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 샘이나 나나 기가 찼다. '학교 교육계획서는 왜 인쇄서에서 만들지 않느냐'고 쏘아주고 나왔다고 했다. 에휴.. 그래도 조금의 기대는 했었는데...

교지작업 때문에 방학 중에도 간간히 학교를 들르면서 과장님께 예산에 관한 부분을 다시 여쭤보았다. 문제없다고 하시는데... 마침 교장실에서 그 분께서 나오시길래 문집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생각해보자'고 하셨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자는 말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 아닌가? 나만 그렇게 느끼나? 남은 방학동안 이런 저런 꼭지를 생각해두었다. 아이들이 만들기 싫어하면 어쩌지... 이번 2월은 너무 시간이 없는데... 등등의 걱정도 하면서

그러나 '생각해보자'는 말은 철저히 NO의 표현임을 오늘 알았다. 문예부 아이들 봉사시간 인정 결재를 받으러 내려간 길에 "문집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교장선생님?" 했더니 처음엔 다른 담임들과 형평에 맞지 않아 입장이 곤란하며 여러 부장샘들도 반대한다고 하셨다. "방학 전에 이미 제가 문집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다른 담임샘들은 모두 그럴 계획이 없으신 것 같고 혹시 그것이 걱정이라면 제가 담임샘들과 부장샘들께 다시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했다. 그랬더니 "내가 못해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김주사에게 말해 둘테니까 인쇄실에서 만들라"고 하신다. "아니, 학교 인쇄실에서 그걸 어떻게 만듭니까? 시간도 너무 없고... 아이들과 제가 어떻게 합니까? 요즘 어느 학교에서 그렇게 합니까"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가관이다. "그건 강선생 문제지 그걸 왜 나보고 그러느냐, 학교에서 아이들이랑 만들면 더 교육적이지 않느냐. 내가 알기론 어떤 중학교에서는 그렇게 다들 만든다" 우리반 아이들은 조금 있으면 고3이다. 이럴 땐 평소에 누누이 강조하시는 '학력신장'은 생각도 나지 않나보다. "제가 이런 말까지는 정말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행정과장님께서 예산에 무리가 없다하시고 교감선생님께서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만든 선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그 사람들한테 가서 만들어달라고 해라. 나는 그런 교장과 다르다" "알겠습니다. 그럼 학운위 안건으로 올리겠습니다" 벌떡 이어서 나왔다. "그런 사소한 일은 안건으로 올릴 수 없다" 는 성난 목소리를 등뒤로 하고. 행정실 분들 모두 교장실을 나서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웃으며 "요즘 학교 생활 정말 힘들다"고 한마디 하고 수업갔다. 4반 녀석들이 그럭저럭 내 말도 들어주고 수업도 나름 열심히 해주어서 맘이 좀 풀렸다. 아이들은 까불어도 이렇게 이쁜데...

학교내규를 살펴봤더니 '안건발의는 학교장 또는 재적 운영위원 1/3의 연서에 의해 발의할 수 있'단다. 1/3이면 5명. 교사위원이 모두 서명을 해준다 해도 1명이 부족하다. 학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애긴데... 학부모위원이 학교장과 날을 세우는 이런 일에 흔쾌히 동의해줄까? 급식업체 바꾸는 일에도 결국 '교장선생님 뜻대로'였던 그분들이... 참... 문집은 만들기도 전에 거기에 쏟아야할 에너지를 이런 일에 몽땅 쏟고 있다니 정말 짜증이 제대로다.

비조합원 운영위원 한 분 샘을 찾아가서 의논했다. 샘도 알고 계셔야한다는 판단으로. 샘 말씀은 '일을 되게 하려면 조율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이들도 어느 정도 부담하고 학교에서도 지원하는 것으로 하자'고 하셨다. 학운위에서 교사들끼리 기껏 50만원 가지고 의견 조율을 못해 아웅다웅 하는 것도 학부모들에게 신뢰를 잃을 수 있는 꼴불견이라고. 그러니 교장샘께 일을 풀어갈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주어야한다고. 소중한 것에 대한 가치를 알도록 일정부분 스스로 부담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고 학부모들 앞에서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럼 아이들에게 2~3천원 부담할 수 있도록 이야기해 보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샘의 전화를 받았다. 교장샘께서는 학습동아리 문집은  교육청에서 주어진 예산 안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므로 만들어 줄 수 없으시단다. 그리고 우리 반 문집도 반 정도 지원해줄 수 있단다. 기가 막힌다. 그래봤자 10만원 남짓. 그 돈은 내가 부담할 수도 있다. 내가 무슨 구걸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교사가 정당한 교육적인 활동을 하겠다는데 그걸 학교장이 지원해주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이게 무슨 흥정꺼리인가 반을 깎고 말고,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그럼 도대체 왜 교지 대신 문집을 만들자고 했었던 걸까? 문집의 '교육적 가치'를 아시는 걸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다.

이걸 받아들여야하는 건지 어떤지... 중간에서 말을 해준 선생님 입장도 있는데... 하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기분이 나쁘다. 받아들인다면 나는 정말 처음부터 단순히 '돈'때문에 움직인 결과가 된다. 문집 만드는 데 들여할 에너지... 만들기도 전에 정말 지친다. 사람을 미워하는 일, 내가 너무 힘들어서 하지않으려고 했는데 정말 너무 안 도와준다.

길고 지겨운 1월, 그리 더디 가더니 2월 역시 그런 나날이려나?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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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3 07: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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