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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도(流民圖)와 다산의 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는 마음이 없이 쓰는 시는 시가 아니다”(不傷時憤俗非詩也)라고 했던 다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없이 지은 시는 시가 아니다”(不愛君憂國非詩也)라고 했던 다산, 그래서 ‘음풍영월(吟風詠月)’이나 ‘담기설주(譚棋說酒)’하는, 즉 바람이나 달을 읊고 장기나 바둑을 두며 술이나 마시는 이야기를 시로 읊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 다산의 시에 대한 견해였습니다.

젊은 시절 다산은 경기도 몇 개 고을을 염찰(廉察)하는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참담한 농민들의 실태를 읊은 눈물겨운 시를 지은 바 있습니다. 「적성촌 마을에서 읊은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 “멀리 정협(鄭俠)의 유민도(流民圖)를 본받아다가, 새로 시 한 편 지어 임금께 바쳐볼까”(遠摹鄭俠流民圖 聊寫新詩歸紫
)라고 하여, ‘유민도’를 거론했던 적이 있습니다.

유민도란 송(宋)나라 때의 훌륭한 벼슬아치인 정협이 백성들의 고달파하는 참상을 보다 못 견디고, 그들의 떠도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임금께 바치자,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큰 가뭄까지 겹쳐 비참한 농민들이 유리걸식하던 때에 백성들의 소원이 풀리 듯 가뭄에 단비가 내렸고, 임금도 백성들의 참상을 실감하여 신법을 폐지하여 백성들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뒤 다산은 ‘굶주리는 백성의 노래’라는 ‘기민시(飢民詩)’를 지어 시를 읽은 사람이라면 백성들의 굶주리는 모습에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여는데, 그 시를 읽는 평자(評者)가 “이 시야말로 바로 유민도로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산은 언제나 시를 지으면서 마음속에 ‘유민도’를 상상하며 지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참담한 백성들의 실상을 그림으로 그리듯 핍진하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수법을 시를 짓는데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요즘 반FTA를 위한 농민들의 투쟁을 TV에서 보며 ‘저게 바로 유민도로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다산이 살아계시면 어떤 시를 지었을까도 생각해보고, 요즘 시인들은 왜 유민도 같은 시를 짓지 않는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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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연구소 홈페이지 www.edas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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