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멘은 고등학생 때 읽었는데 집에 나 혼자만 있었다. 그렇잖아도 이런 류를 좋아하고 잘 믿었는데 얼마나 무섭던지. 공포 소설은 집에 혼자만 있을 때 읽어야 재미가 배가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1999년이 되기 전이었다. 이미 1999년이 지난 지금은 읽으면 웃음만 나올 거다. 뻥이잖아! 이미 1999년이 지났는데 영화 터미네이터 속편이 계속 나오는 거 보면 우습다. 1999년이 지나지 않았다면 별 다섯 개를 다 줬을 텐데, 이미 지났기 때문에 별 하나 뺐다. 그레고리 팩이 나온 영화의 사진 몇 개가 책에 실려 있다.
이 소설은 좀 지루했다. 지금에 와서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어쨌든 갇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건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과 비슷하다. 집안에 독재자 같은 가장이 한 명 있다는 것도 비슷하고, 끝에 가서 로맨스 하나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비슷하다. 그래서 더 지겹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 소설은 힌트를 너무 조금 준다. 뭐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에서 힌트 갖고 범인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에선 그냥 감으로 범인을 찾는데 대개는 그게 맞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그냥 이 작가의 추리소설 몇 편을 읽어 보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보인다. 얼마전 EBS에서 했던 이 작가의 추리소설을 원작으로 한 「크리스마스 살인」에서도 그냥 인물 관계를 보니까 범인이 보이더만. 이 소설은 별로 추천 안 한다.
재밌다. 진짜 재밌다. 푹 빠진다. 그리고 부럽다. 어쩌면 이 사람은 소설을 이리도 잘 쓸까? 다작하진 않았는데 쓴 작품마다 명품이다. 우리집도 딸이 셋이라서, 만약 나라면 이런 남자가 접근하는 걸 어떻게 알아내고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고민하기도 했다 (때는 역시 고등학생 때). 내 선에서 막으리라 다짐도 했다. 하지만 일단 자매 사이에 나이 차이가 많은 데다가 집에 노릴만한 재산이 없으므로 쓸데없는 고민. 그리고 고등학생 때 이 책을 읽으며 깨달은 남자를 사귈 때 지켜야 할 것. 남자의 사진을 남겨 둘 것. 비밀 사이가 아니면 가족에게도 남자의 존재를 알려둘 것 등등. 그땐 심각했고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추리소설 읽으면서 이런 생각하는 거,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참고로 제목만 다르게 해서 마치 다른 책인 것처럼 광고문구를 달아둔 책도 있었다. 까딱하면 속아서 살 뻔했다. 지금도 있나 모르겠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맘을 졸였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주인공 여자가 된 것처럼 푹 빠져서는, 이 음모에서 이 함정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지 고민하고 고민했다. 이 책을 읽은 게 고등학생 때였는데 이 책을 다 읽은 뒤에는 그 충격에 빠져 며칠 동안 꿈자리가 사나울 정도였다. 읽으면서 주인공이 내가 된, 몇 안 되는 소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때 이 책을 읽고 다짐했던 것이다. 할 짓이 아니면 어떤 부가 주어지더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도리가 아니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또 내게 가족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마웠고 다행스러웠다.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알고 보면 교훈이 가득한 추리소설이다.
영국 공주가 받고 싶은 생일선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라고 말하자, 작가가 「쥐덫」을 써서 라디오 드라마로 방송했다고 한다. 추리 소설이 그렇게 쉽게 써지는 건지 참. 중편 「쥐덫」 말고 단편 몇 개도 실려 있지만 그건 좀 별로다. 하지만 그걸 다 덮을 만큼 「쥐덫」은 재밌다. 이것도 중편이고 구성도 간단하지만, 뭐랄까 있을 건 다 있고 그래서 무척이나 깔끔하다. 사실 「쥐덫」은 다 읽고 나면 범인은 바로 코앞에 있었고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었고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거였는데 어째서 읽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읽고나서 무릎을 탁 쳤지만, 그와 함께 내 한계를 느꼈다고나 할까. 난 역시 탐정 재능이 없나 봐 하고. 코난 도일의 단편들도 좋지만, 추리 소설 입문용으로 「쥐덫」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