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에 읽은 책은 <자두> 딱 하나다. 전에 다락방님의 글을 읽고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었고, 책모임 책으로 골랐었다. 책 읽을 시간이 많지도 않았지만 가부장제 하의 며느리와 딸로서 명절을 보내고 이 책을 읽고나니 더욱 피곤해졌다.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잠을 많이 잤다.  


주인공은 번역자이자 시아버지의 간병을 하는 며느리이다. 작가 역시 번역자인데, 소설의 첫 부분은 본인이 번역한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역자후기로 시작해서 잠시 이게 사실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하는 물음을 자아낸다. 이 시작 부분은 얼핏 보면 단순히 작가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책을 읽고나면 이 첫 부분이 매우 의미심장함을 깨닫게 된다. 


에이드리언 리치와 엘리자베스 비숍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어 소설 속 '여성의 연대' 와 관련이 있고, 이 부분에 드러난 오역을 걱정하는 번역자의 마음은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마음을 오해하는 것과 연결된다. 짧은데 압축되어 있는, 오랫만에 명민하다고 느낀 소설이다. 


이주혜 작가의 책은 번역본 <프랑스 아이처럼> 그리고 코니 윌리스의 소설만 읽어보았었다.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은 물론, 이주혜 작가의 글을 더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 



한 번 빠져나간 공간과 시간은 어떤 기도를 동원해도 고스란히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없이 웅변했습니다. - P11

리치와 비숍이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았던 그 몇 시간이 미치도록 부러울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몰이해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 마음을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실패했던 어느 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처절하게 오해받았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시간을 진술하는 일은 리치가 말한 ‘짧고 강렬한 움직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P20

이해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무작정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바탕에는 세진과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고요. - P29

시아버지의 오해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했으니까요. 저만 오역하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 P56

그러면 저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이 들고 말았습니다. - P91

장례식장이란 원래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향 연기처럼 제멋대로 피어올라 허공을 떠다니는 곳임을 이때 배웠습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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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1-26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주혜 작가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을 번역하기도 했군요. 아 진짜 더 이 작가 읽고 싶은데 자꾸 밀리네요. 수하님 글 읽으니까 빨리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또 막 들어요. ^^

건수하 2023-01-26 19:48   좋아요 1 | URL
짧은데 좋고… 명절이라 더 감정이입되고… 저 진작 읽을 걸 그랬다 했어요. 다른 책도 기대된답니다.

2023-01-26 1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6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3-01-27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기대하는 작가가 이주혜 작가입니다. 그래서 다른 책도 사두었어요.
저도 자두 읽으면서 앗 에이드리언 리치 책을 번역했다고? 하면서 얼른 책장의 책을 꺼냈더니 바로 그 번역자더라고요! 되게 짜릿했어요. 후훗.

건수하 2023-01-27 10:19   좋아요 0 | URL
제가 그 책을 미리 안 사둬서 짜릿함을 느끼지 못했... 얼른 사고 다른 책도 읽어야겠습니다 :)
다락방님 덕분에 이주혜 작가님 발견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