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
귄터 그라스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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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영화로 본 '양철북'은 좀 난해했었다. 거기에 분위기는 침울했고... 아마 그래서 이 책을 손에 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의외로 소설은 쉽게 읽혔다. 시간의 역전이 여기 저기서 일어나고, 지극히 주관적인 서술로 일관되어 때때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긴 하지만 각 장의 에피소드들이 펼쳐 내는 선명한 이미지가 오히려 영상보다도 더 인상적이다.

삶의 무의미함을 태어나면서부터 간파한 주인공은 스스로의 의지로 성장을 거부하며, 자기 자신과 어린 예수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 삶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보잘것 없음을 거부하려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식료품점의 계산대 뒤에 서 있을 것이 뻔한 자신의 미래를 알아차린 이 어른의 정신을 가진 어린아이는 자라지 않음으로써 그 뻔한 운명에서 도망치려 하며 양철북 연주와 유리를 파괴하는 '노래'로써만 자신을 드러낸다.

이 특이한 인물이 서른이 될 때까지의 삶을 서술한 것이 바로 이 소설인데, 그토록 특이한 외모와 특이한 이력, 그리고 특별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결국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장과 역사, 그리고 가족이라는 환경과는 떨어져 설명될 수 없는 한 인간일 따름이라는 데에서 이 소설의 냉소적인 분위기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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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모사의 눈부심 - 문학세상 외국소설선 1
쥴퓨 리반엘리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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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어 보는 터키 소설이었지만 단순히 이국적인 분위기만을 느끼게 하는 소설은 아니었다. '비잔티움 제국사'에서 느꼈던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이야기들을, 이번엔 소설로 읽을 수 있었다, 물론 시대적 배경은 좀 후대이지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을 모시는 환관의 시점으로 서술된 이 이야기는 권력의 마성에대한 소설이다. 절대적 권력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인간성을 잃어가는가, 그리고 권력욕 앞에서 우리가 '천륜' 이라고 믿는 것들의 가치가 얼마나 허무하게 사그러드는가를 보여 준다.

황제가 되고 나면 찬탈 음모를 사전에 방지한다는 명분 하에 자신의 남자 형제를 모조리 죽이는 술탄, 기분이 나쁘다는, 혹은 너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는 이 절대 권력자의 모습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악마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이기 때문에 소설 속의 술탄이 자기 아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마음 먹는 것은 매우 의외였다. 죽음의 터널을 두 번째 통과하면서 권력의 허무함을 깨달은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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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대변인 1 - 엔더 위긴 시리즈 2 엔더 위긴 시리즈 2
올슨 스콧 카드 지음, 장미란 옮김 / 시공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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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책은 전작 '엔더의 게임'을 읽고 나서 읽는 편이 좋다는 말씀을 드린다. 물론 그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이 책을 읽는 데 어떤 지장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엔더의 게임'을 본다면 그 책의 재미가 반감될 것이기에 하는 말이다. 이 소설은 SF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좋은 소설이 언제나 그렇듯이 '지금, 여기'의 문제를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다름과 차별의 문제, 문화제국주의, 세계화의 문제 등, 점점 하나의 문화권, 하나의 생활권이 되어 가는 우리 세계의 문제들 말이다.

도대체 인간이 자기와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되는 수준의 이해조차 불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이 기묘한 종족인 피기들은 고사하고라도 우리는 외국인, 피부색이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쉽사리 우리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려 한다. 그래서 무슨 때만 되면 우리의 개고기 문화가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고.

이 책에서 가장 편협해 보이는 인물인 주교조차도 그런 우리들 대부분보다는 넓은 마음을 가졌다. 인간이 최소한의 관용이라도 갖기 위해서는 엔더처럼 3000년을 살아야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형태의 생명체를 상상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책이며 그 세계의 수수께끼가 책을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흡인력 또한 강하다. 높은 수준의 문화와 낮은 수준의 문화가 만났을 때의 충격, 타자의 문제 외에 한 가족의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는 진실의 힘에 대한 이야기들도 마음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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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
하일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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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소설은 <진술>이란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진행된다. 한정된 취조실 안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들리는 이러한 구조는 그래서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심문받는 카프카적 상황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눈치채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내가 죽었다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환상과 사는 것을 택한 한 불쌍한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프로이트가 슈레버라는, 재판장을 지낸 매우 지적인 환자의 강박신경증을 분석한 논문이 생각났다. 우리는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지리멸렬한 논리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나 상당한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정신이 제 궤도에서 일탈할 때조차도 내부적으로 매우 치밀한 논리를 갖추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에게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한, 그의 범죄 사실도, 그의 현실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이 제정신 아닌 사람의 행동을 그냥 '미친 사람'일 뿐 우리와 상관 없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고통스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늘 자기합리화 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결국 어디까지를 제정신이라고 부르고, 어디서부터를 광기라고 불러야할지가 모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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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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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작가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과 함께 책을 집어들었다가 국적이 어떻든 인종이 어떻든, 좋은 책은 그 모든것을 떠나 보편적인 감동을 준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면서 책을 내려놓았다. 소설은 간결하면서도 담담한 문체로 노년에 이른 주인공의 하루를 쫓는댜. 그 하룻동안의 대화로, 우리는 주인공 헨릭과 그의 친구 콘라드, 그리고 부인이 얽힌 과거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줄거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이 소설에서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작가가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심리적 진실들을 독자들로 하여금 곰곰히 생각하도록(책을 손에서 놓은 후에도)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탁월한 작가의 진정한 힘이 아닐지.

여기에는 여러 대립이 있다.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 자, 세속적 세계에 만족하는 자와 예술의 세계에 이끌리는 자, 이렇게 대립되는 한 쌍임에도 불구하고 헨릭은 무사무욕한 우정을 꿈꾼다. 그리고 그것이 그 혼자만의 생각임을 알았을 때, 콘라드의 배신은 반쯤 실패한 채로 표면에 드러난다. 그 후 40여년이 흐르면서 불꽃처럼 달아오르던 복수의 욕망은 하얗게 변해간다. 그러나 그것은 내부적으로 더욱 뜨겁게 끓어오르는 백열과도 같은 것이다. 이미 삶을 포기했으면서도 그 순간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40여년을 산다는 것, 그 파괴적인 열정의 힘이 우리 머릿속까지도 하얗게 달굴 때, 이 소설은 끝난다. 사건의 진상, 그들의 내면의 비밀들은 여전히 드러내지 않은 채로.어찌 보면 진부한 스토리인데도, 이 소설은 강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 오랜만에 만나는 훌륭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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