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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
하일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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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짧은 소설은 <진술>이란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진행된다. 한정된 취조실 안에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들리는 이러한 구조는 그래서 모노드라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심문받는 카프카적 상황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무엇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눈치채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아내가 죽었다는 심한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환상과 사는 것을 택한 한 불쌍한 남자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프로이트가 슈레버라는, 재판장을 지낸 매우 지적인 환자의 강박신경증을 분석한 논문이 생각났다. 우리는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지리멸렬한 논리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일 것이라고 흔히 생각하나 상당한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정신이 제 궤도에서 일탈할 때조차도 내부적으로 매우 치밀한 논리를 갖추기 때문에 그것을 치료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주인공에게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한, 그의 범죄 사실도, 그의 현실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해시킬 수 없다.
그러나 이 제정신 아닌 사람의 행동을 그냥 '미친 사람'일 뿐 우리와 상관 없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누구나 고통스런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고, 늘 자기합리화 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결국 어디까지를 제정신이라고 부르고, 어디서부터를 광기라고 불러야할지가 모호해진다.